
핵심 본문 ·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직이 어려움을 만나면 흔히 이런 진단이 나옵니다. "비전이 부족하다."
더 크고 선명한 목표를 내놓고,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표는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를 크게 외친다고 공동체가 저절로 바르게 서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방향으로도 힘차게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구호 아래에서 꼭 필요한 질문이 금지되기도 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면 표어를 정하고, 현수막을 걸고, 목표 숫자를 세웁니다. 그런데 한 해가 끝날 즈음 돌아보면, 표어는 기억나는데 그 표어 아래서 무엇을 지켰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잠언 29장은 우리가 즐겨 쓰는 '비전'이라는 말보다 더 깊은 것을 묻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첫째, 익숙한 한 구절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이 말씀은 교회 안팎에서 참 자주 인용됩니다. 대개는 지도자에게 미래의 구상이 없으면 조직이 망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영어 성경 킹제임스역이 이 구절을 "비전이 없는 곳에서 백성은 멸망한다"고 옮긴 뒤로 이런 쓰임이 더 널리 퍼졌습니다. 경영 강의에도, 교회 비전 선포식에도 이 구절이 단골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조금만 천천히 읽으면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묵시'는 지도자의 꿈이 아닙니다
여기서 '묵시'로 옮긴 히브리어는 '하존'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계시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니." 엘리 제사장 시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던 어두운 시대를 가리킨 말입니다.
그러니 잠언 29장 18절의 '묵시'는 개인의 꿈이나 조직의 발전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방자히 행하다'는 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자히 행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파라'는 묶인 것을 풀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흩어지는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같은 말이 나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는 백성을 보았을 때, 성경은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출 32:25)고 씁니다. 백성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제단을 쌓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다만 고삐가 풀렸을 뿐입니다. 말씀이 떠난 자리에서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열심을 냅니다.
문장의 뒷부분이 앞부분을 풉니다
무엇보다 이 구절은 뒷부분이 앞부분을 해석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가 없는 상태와 맞서는 것은 멋진 기획안을 가진 상태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입니다. 문제의 중심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 모자란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말씀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앞부분만 떼어 내면 지도자의 구상을 하나님의 뜻처럼 높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장을 온전히 읽으면, 시선은 지도자의 창의성에서 공동체 모두의 순종으로 옮겨 갑니다.

익숙한 구절일수록 문맥으로 돌려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해석이 늘 본문에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힘을 주는 문구로 소비하기 전에 앞뒤 문장을 살피고, 서로 맞서는 낱말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본문을 존중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메시지를 성경에서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익숙한 메시지를 고쳐 말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존중한다는 것은
원하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메시지를 고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둘째, 큰 목표가 고삐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비전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는 가려 주지 못합니다.
성장이라는 목표가 분명해도, 약속을 가볍게 여기거나 성과를 위해 약한 사람의 사정을 뒤로 미룬다면 고삐는 이미 풀린 것입니다. 숫자가 늘고 일정이 계획대로 굴러간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만큼, 어떤 기준 아래서 이루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절은 고삐 풀린 시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 시대 사람들이 게을렀던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옳다고 믿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서로를 해쳤습니다.
말씀이 고삐가 된다는 것
말씀이 고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상황에 간단한 답을 붙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욕망이 결론을 서두르지 못하게 하고, 불편한 사실도 끝까지 보게 하는 기준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정직, 정의, 절제, 이웃 사랑. 이런 기준은 목표를 이루는 데 걸림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빠진 속도는 전진이 아니라 이탈일 수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다는 확신이 과정의 잘못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계획표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함께 "무엇은 하지 않을 것인가"도 적혀야 합니다. 성과를 위해 사실을 부풀리지 않겠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루지 않겠다. 반대 의견을 불충으로 몰지 않겠다. 이런 경계는 열정을 식히는 장치가 아닙니다. 열정이 본래의 목적을 배반하지 않도록 붙드는 울타리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공동체의 징후
말씀이 사라지는 과정은 대개 성경책이 없어지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상한 기근을 예고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이라"(암 8:11). 그 시대 이스라엘에는 성소도 있었고 절기도 있었고 제사도 넘쳐났습니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리지 않아서 굶주렸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와 회의에서 성경을 자주 인용해도, 이미 정한 결론을 꾸미는 장식으로만 쓴다면 말씀은 실제로 들리지 않습니다. 지도자의 생각과 다른 본문은 건너뛰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잘못을 짚는 권면을 조직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때, 공동체는 풍성한 신앙 언어 속에서도 고삐를 잃습니다.
잠언 29장 전체가 이 문제를 구체적인 관계 속에 놓습니다.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12절).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11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7절).
계시를 듣는다는 말은 추상적인 표어가 아닙니다. 어떤 보고를 반기는지, 힘없는 사람의 사정을 알아보는지, 화가 날 때 자신을 다스리는지에서 그 진실함이 드러납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특히 자기에게 올라오는 정보가 이미 걸러져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듣기 좋은 소식에만 반응하면 곧 주변에는 듣기 좋은 말만 남습니다. 12절이 경고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반대 의견을 묻고, 결정의 근거를 기록하고, 불편한 보고를 한 사람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말씀이 들리는 문화는 좋은 설교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안전한 관계가 함께 세워져야 합니다.

셋째, 순종은 구호가 아니라 고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을 강조하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순종이 아랫사람에게만 요구되면, 말씀은 권력을 지키는 도구가 됩니다.
성경 앞에 선 공동체라면 지도자도 자기 판단을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된 관행도 말씀의 기준으로 다시 살펴야 합니다. 참된 권위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바른 말을 들었을 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책망을 받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잠언 29장은 첫 절부터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1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망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은 책망을 '자주' 받았습니다.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도 목을 곧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의견을 받는 창구가 있어도 결론이 늘 같고, 사과문을 내도 책임지는 변화가 없고, 성찰을 말해도 다음 결정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듣는 모양만 남은 것입니다. 순종은 감동적인 동의가 아니라 실제로 고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 앞에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만을 은혜라고 여기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피하기 쉽습니다.
때로 말씀은 우리의 계획을 격려하기보다 멈추게 합니다. 자신감을 북돋기보다 동기를 묻습니다. 그 순간 변명보다 질문을 택해야 합니다. 내가 놓친 사람은 누구인가. 사실보다 체면을 지킨 부분은 없는가. 목표를 위해 정당화한 잘못은 무엇인가. 이것을 살피는 것이 말씀을 듣는 시작입니다.
비전은 말씀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렇다고 미래의 계획과 상상을 모두 믿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방향을 설명하는 언어가 필요하고, 현실의 문제를 넘어 더 나은 모습을 그리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다만 비전은 계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계획은 검토되고 고쳐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계획을 검토하고 고치는 기준이 됩니다. 둘의 자리가 바뀌면, 반대는 불순종이 되고 지도자의 선호는 거룩한 명령이 됩니다.
건강한 비전은 그래서 더 겸손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모든 답을 안다고 선언하기보다, 지금까지 분명히 들은 기준을 밝히고 아직 모르는 것은 함께 분별하자고 청합니다. 성공의 그림만 보여 주기보다 그 과정에서 지킬 약속을 먼저 세웁니다. 결과가 기대와 달라도 정직과 사랑은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비전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책임 있게 걷게 합니다.
맺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가장 큰 꿈이 아니라 가장 바른 목소리를 듣는 능력입니다.
잠언의 경고는 미래를 계획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획보다 먼저 우리를 판단하고 붙드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이 사라지면 열심은 쉽게 독주가 되고, 확신은 고집이 되고, 일치는 침묵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새 표어를 정하기 전에, 먼저 오래된 질문을 함께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은 누구의 결정을 고치고 있습니까. 불편한 진실을 말할 통로가 열려 있습니까. 약한 사람의 사정이 목표 뒤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더 화려한 문구는 문제를 가릴 뿐입니다. 반대로 말씀 앞에서 기꺼이 멈추고 고칠 수 있다면, 비전은 권력을 꾸미는 깃발이 아니라 함께 걸을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은 멀리 있는 목적지를 화려하게 보여 주기보다, 오늘 내딛을 발 앞의 몇 걸음을 비춥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우리의 비전이 얼마나 큰가"만이 아닙니다. "그 비전은 무엇 앞에서 멈추고 고쳐지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잘못을 발견했을 때 돌아설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고삐는 자유를 빼앗으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있습니다. 비전도 그 고삐 아래 있을 때, 사람을 몰아붙이는 구호가 아니라 바른 길을 함께 걷게 하는 약속이 됩니다.
주님, 저희가 큰 꿈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듣기 좋은 말보다 바른 말을 반기게 하시고,
책망 앞에서 목을 곧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의 계획이 주님의 말씀 앞에서 멈추고 고쳐지게 하시며,
말씀을 발의 등으로 삼아 오늘 한 걸음을 바르게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나눌 질문
첫째 질문.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을 그동안 어떤 뜻으로 들어 왔습니까? 오늘 뒷부분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와 함께 읽으니 무엇이 달라 보입니까?
둘째 질문. 우리 공동체의 계획표에 "하지 않을 것"을 한 가지 적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셋째 질문. 최근 나를 불편하게 한 말씀이나 권면이 있었습니까? 그 앞에서 나는 목을 곧게 했습니까, 방향을 고쳤습니까?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30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