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본문 · 에베소서 4:1-16
2026년 9월 16일 주일
들어가며 —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차이를 대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의 속도가 다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결정을 빨리 내리고, 어떤 사람은 충분히 살핀 뒤에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만나면 곧바로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오래 품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엽니다. 어떤 사람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관계의 온기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차이는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 안에 여러 사람을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그 차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향이 비슷하고 경험이 비슷하며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안이 유지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과 다릅니다. 비슷해서 편한 것은 친숙함일 수 있지만, 복음이 만들어 낸 일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의 하나 됨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은혜를 받고, 같은 주님을 바라보며, 서로를 버리지 않기로 결단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차이가 사라져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보다 크신 주님 때문에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은 교회를 향한 매우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이미 무엇을 받았는지 말한 뒤에, 이제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걸으라고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마음속에 종교적 확신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한 몸에 속하게 하시고, 그 몸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혼자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느냐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흐르는지, 내 말과 선택이 공동체를 세우는지, 갈등의 순간에도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지키려 하는지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함께 살피려 합니다.
① 하나 됨은 우리가 새로 만들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미 주신 선물입니다
②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③ 성숙한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각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함으로 자라갑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지키고,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기며, 사랑 안에서 함께 자라는 하나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서 먼저 공동체를 평가하려 하지 맙시다. 누가 문제인지, 누가 부족한지, 누가 내 뜻을 몰라주는지부터 찾지 맙시다.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춥니다.
· 나는 하나 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옳음을 지키느라 사람을 잃는 사람입니까
· 나는 교회를 섬기는 지체입니까, 아니면 섬김을 제공받는 손님처럼 머물고 있습니까
· 나는 진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흐리게 합니까, 아니면 진리를 말한다면서 사랑을 잃습니까
첫째,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힘써 지키십시오

바울의 권면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점수를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삶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자녀답게 살고, 한 몸으로 부르셨다면 지체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은혜는 신분을 바꾸고, 바뀐 신분은 걸음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태도는 신앙의 부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바울은 그 걸음의 모양으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말하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권합니다. 이 덕목들은 갈등이 전혀 없는 공동체에 필요한 장식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복음의 훈련입니다.
겸손은 나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공동체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 판단이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내 경험이 모든 사람의 기준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나 없이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도 약함이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상대를 누르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지만 상대가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고, 이길 수 있지만 관계를 파괴하는 승리를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강한 어조를 진리의 확신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크다고 진리가 더 참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맡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가 자기 감정의 무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온유는 진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진리가 사람을 살리도록 내 힘을 절제하는 태도입니다.
오래 참음은 단지 시간을 견디는 수동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상대의 미숙함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아직 그 사람을 빚고 계심을 믿는 태도입니다.
우리도 하루아침에 성숙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더딘 변화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죄를 방치하거나 상처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필요한 권면과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상대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회복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말도 무조건 참고 삼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의 결함을 알면서도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결단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모습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선택적 호감에 가깝습니다.
복음의 사랑은 상대가 불편해지는 순간에 비로소 시험받습니다.
· 오해가 생겼을 때 확인하지 않고 단정하는가, 아니면 직접 듣고 이해하려 하는가
· 서운함이 생겼을 때 사람을 규정하는가, 아니면 회복의 문을 남겨 두는가
· 의견이 다를 때 상대의 신앙 전체를 의심하는가, 아니면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는가
이런 작은 선택들이 하나 됨을 지키기도 하고 찢기도 합니다.
만들라 하지 않고 지키라 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은 교회의 하나 됨을 일곱 겹으로 고백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 됨이 우리의 기분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맞아서 한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한 소망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 됨을 만들라고 하지 않고 지키라고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 주신 것을 소중히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자 무거운 책임입니다. 위로인 이유는 교회의 미래가 우리의 기술과 성품에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책임인 이유는 우리가 함부로 찢을 수 없는 것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밀어내는 말, 확인하지 않은 소문, 자기편을 모으는 행동, 작은 차이를 복음의 차이처럼 부풀리는 태도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실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의 비유를 진지하게 받는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가족이고, 성령의 전입니다. 몸의 비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다른 지체를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손이 발과 다르다고 발을 잘라 내지 않습니다. 눈이 귀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고 귀를 쓸모없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기능은 몸의 결함이 아니라 몸의 풍성함입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지 않은 채 자기가 몸 전체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지체가 머리의 자리를 차지하면 비교와 경쟁이 시작되고, 서로를 세우는 은사는 자기 영향력을 넓히는 도구로 변합니다.
일치는 감상이 아니라 규율입니다. 따뜻한 기분이 오래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반복해서 훈련되는 삶입니다.
· 상대의 말을 내가 반박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지 않고, 상대도 동의할 방식으로 먼저 이해하는 훈련
· 내 확신의 강도를 구별하는 훈련
· 복음의 본질과 목회 방식의 차이와 개인의 취향을 같은 무게로 다루지 않는 훈련
·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하나님 앞에서 열어 두는 훈련
갈등은 낮은 자리에서 일찍 다루십시오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에 이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갈등은 내용보다 방식 때문에 커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의견 차이였는데, 상대의 동기를 나쁘게 해석하면서 관계의 문제가 됩니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라는 말로 한 사람의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직접 묻기보다 제삼자에게 말하고,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마음속 재판을 끝냅니다.
그러면 갈등의 내용은 사라지고 상처받은 자존심만 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 됨을 지키려면 갈등을 낮은 자리에서 일찍 다루어야 합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듣고, 내가 오해한 부분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구체적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갈등을 덮어 두는 끈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끈입니다.
평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피하는 것도 평안이 아닙니다. 복음의 평안은 십자가에서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키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하고, 때로는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며, 때로는 잘못된 행동에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도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는 일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화해를 말하면서 내부의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면, 세상은 복음의 화해를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세대와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함께 예배하고, 갈등 후에도 다시 손을 잡으며, 약한 지체를 더 귀히 여긴다면 세상은 다른 질서를 보게 됩니다.
이번 주에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정해 보십시오.
· 미루어 둔 대화가 있다면 정죄의 문장이 아니라 질문을 준비하십시오
· 누군가의 말을 전해 들었다면 더 퍼뜨리지 말고 사실을 확인하십시오
·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설명보다 사과를 먼저 하십시오
· 용서가 아직 어렵다면, 적어도 상대를 미워할 권리를 붙들고 있지 않도록 도움을 구하십시오
둘째, 받은 은사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다양한 사람과 직분을 주신 목적은 몇몇 사람이 모든 일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돌보는 직분은 성도들을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능력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받아 서로를 섬기는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을 생각할 때 쉽게 두 부류를 나눕니다. 일을 하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목회자와 평신도입니다.
물론 역할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할의 차이가 사명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성도는 봉사의 자리로 부름받았습니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훈련하여 서로를 섬기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도 역시 교회를 종교 서비스를 받는 곳으로만 여기지 않고, 내가 누구를 세울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식당이 아니라 몸입니다
목사가 모든 사람을 알고, 모든 곳에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는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성경적으로도 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구조에서는 성도들의 은사가 잠들고, 목회자는 소진되며, 공동체는 소비자와 제공자로 나뉩니다. 누군가가 필요를 채워 주지 않으면 불평하고, 내가 몸의 한 지체로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는 묻지 않게 됩니다.
교회는 식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메뉴를 평가하고 서비스를 비교하려 모인 손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몸입니다. 몸의 지체는 공급을 받지만 동시에 움직입니다. 손은 몸에서 피와 산소를 공급받고, 그 힘으로 다른 지체를 위해 일합니다. 눈은 보도록 도움받고, 본 것을 몸 전체에 알립니다.
아무 지체도 모든 일을 하지 않지만, 아무 지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로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섬김이 몸을 살립니다
은사는 눈에 띄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말하는 능력만 은사가 아니고, 사람을 많이 모으는 능력만 은사가 아닙니다.
· 낙심한 사람의 말을 오래 들어 주는 것
· 처음 온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자리를 내어 주는 것
· 보이지 않는 곳을 정돈하는 것
· 아픈 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것
· 갈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부드럽게 잇는 것
· 필요한 재정을 정직하게 관리하는 것
· 다음 세대가 질문할 때 귀찮아하지 않고 함께 답을 찾는 것
이 모두가 몸을 세우는 귀한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은사를 계급으로 바꿀 때 생깁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은사를 더 크다고 여기고, 조용한 섬김을 작다고 여깁니다. 많은 사람의 반응을 얻는 사역은 성공이라 하고, 한 사람을 오래 붙드는 사역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은 보이는 부분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심장은 보이지 않지만 멈출 수 없고, 작은 신경 하나가 다치면 몸 전체가 고통받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이 교회의 성장을 말할 때는 몸과 나무와 씨앗 같은 유기체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라게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성장은 우리가 생산해 내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심고 물을 주며 돌보는 수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수고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이 관점은 우리를 두 극단에서 건져 냅니다.
하나는 성과에 대한 강박입니다. 숫자가 늘고 일이 커져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태도는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지표로 보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책임한 체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니 우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바른 길은 충성입니다. 결과를 우상으로 삼지 않되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숫자를 자랑의 근거로 삼지 않되 실제로 누가 돌봄에서 빠져 있는지 살피며, 크기를 성공으로 여기지 않되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우는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동시에 현실을 살피고 구체적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는 혼자 성벽을 쌓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공동체와 나누고, 백성이 함께 일어나 건축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한 사람의 영웅담으로 완성되지 않고,
여러 사람이 각자 맡은 구간을 세울 때 현실이 됩니다.
교회 안에는 때때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하겠지." 그러나 몸에는 이름 없는 '누군가'가 없습니다. 내가 지체라면 나에게 맡겨진 분량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도 위험합니다. 그것은 헌신처럼 보이지만 다른 지체가 자랄 자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섬김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일을 감당하고,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다리며, 함께 기뻐합니다. 주도권을 붙드는 것보다 몸이 자라는 것을 더 기뻐합니다.
은사는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교회 사역이 바쁘게 돌아가도 사람이 지치고 상처받아 사라진다면 우리는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행사가 잘 끝났다는 보고보다 그 과정에서 누가 세워졌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회의가 계획대로 마쳤는가보다 말할 기회를 잃은 사람이 없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봉사가 정확했는가뿐 아니라 함께 봉사한 이들이 존중받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봉사의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보다, 그 일을 통해 누가 자랐는가
· 내 이름이 알려졌는가보다,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더 바라보게 되었는가
· 내가 없을 때 일이 멈추는 구조를 자랑하지 말고, 다른 지체가 함께 감당할 길을 열었는가
"성경만"이라는 고백은 "나 혼자 성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셔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지만 고립되어 읽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은사 사용에도 적용됩니다. 내가 열정이 있다고 해서 모든 방향이 자동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분별을 받아야 하고, 열매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공동체는 새로운 은사를 두려움으로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익숙한 방식만 지키느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을 눌러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질서와 사랑 안에서 길러야 할 선물입니다.
이번 주에 자신의 은사를 거창하게 찾으려 애쓰기보다, 눈앞의 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일을 시작해 보십시오. 은사는 사용하면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각 지체의 분량대로 자라가십시오

바울은 교회의 목표를 성숙으로 제시합니다.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온갖 가르침과 사람의 속임수에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장성한 사람으로 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숙은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갖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분의 성품과 방식이 공동체의 관계와 판단 속에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지식은 많지만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아직 성숙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열심은 크지만 검증되지 않은 말에 쉽게 흔들린다면 성숙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내 감정과 현실을 구별하기 어렵고, 지금 불편하면 관계 전체가 나쁘다고 판단합니다.
신앙의 미성숙도 비슷합니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익숙한 방식이 바뀌면 진리가 무너졌다고 느끼며, 내가 좋아하는 지도자나 콘텐츠의 말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따릅니다.
반대로 성숙한 사람은 감정을 무시하지 않지만 감정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공동체의 지혜 앞에서 기다리고 분별합니다.
접근성이 곧 신뢰성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를 삽니다. 설교 영상과 짧은 글, 인공지능 요약과 신학 콘텐츠를 언제든 접할 수 있습니다.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유익하지만, 접근성이 곧 신뢰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강하게 말한다고 옳은 것이 아니고, 많이 공유되었다고 검증된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는 새로운 정보를 무조건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출처를 확인하고, 문맥을 살피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비교하며, 공교회의 신앙과 공동체의 분별 속에서 판단합니다.
진리와 사랑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이때 바울이 제시하는 길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사람을 잠시 편하게 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옳은 내용을 가지고도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진리와 사랑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지만 죄인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말할 때 그 목적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자라게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상대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두려움과 경험 속에서 그 말을 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진리는 쉽게 폭력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상대가 한 말보다 내가 추측한 동기와 싸웁니다.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요", "당신은 변화를 싫어해서 그래요", "당신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행동과 말에 대해서는 분별하고 권면할 수 있지만, 알지 못하는 마음을 함부로 재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할 때는 확신의 층위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관한 고백은 분명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세부 방식, 사역의 순서, 세대별 취향, 행정적 판단까지 모두 같은 강도로 말하면 작은 차이가 신앙의 전쟁으로 변합니다.
모든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본질에는 굳게 서고, 비본질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서 사랑을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흐리는 핑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잘못된 행동이 반복되어 공동체를 해치는데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권면과 권징의 목적은 회개와 회복입니다. 건강한 경계는 배제를 위한 벽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울타리입니다. 다만 절차는 중요합니다. 가능한 한 개인적으로 말하고, 충분히 듣고, 사실을 확인하며, 공개의 범위를 성급히 넓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교회의 성숙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몸의 각 부분은 서로 직접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부터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돕지만 서로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섬김이 통제가 됩니다. 내가 조언했으니 상대가 내 뜻대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수고했으니 공동체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만이 머리이십니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사랑하고 말하고 섬기되, 사람을 변화시키는 주권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활동이 많을수록 더 깊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불안과 욕망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사람을 몰아붙이고, 일이 잘되면 자기 능력을 자랑하며, 멈추어야 할 때도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성숙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데서 드러납니다. 공동체를 살리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내려놓고, 소진된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며, 내 계획보다 한 사람의 눈물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숫자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숫자가 사람을 가리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몇 명이 왔는가를 살피는 동시에 누가 이름 없이 사라졌는지 물어야 합니다.
비교에서 자유롭게 하는 말씀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한다는 말씀은 비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손은 눈처럼 볼 수 없고 눈은 발처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이 손으로 충실하고 발이 발로 충실할 때 몸은 움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느라 자기 몫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혹은 내가 잘하는 일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말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조용한 사람을 소극적이라 여기고, 치밀한 사람은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을 무책임하다 하며, 행동이 빠른 사람은 신중한 사람을 믿음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숙은 서로의 분량을 인정하고 연결하는 지혜입니다.
또한 각 지체의 분량은 고정된 한계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충실히 감당하면서 자라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다 시작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고, 늘 초보라는 말로 훈련을 피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은 한 사람이 한꺼번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일어나 각자의 자리를 감당할 때 무너진 곳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교회가 세워지는 방식도 같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아픈 이를 돌보며, 누군가는 공간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재정을 정직하게 관리하고, 누군가는 다음 세대를 품고, 누군가는 교회 밖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세우는 교회는 약한 지체를 비용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속도가 느린 사람, 표현이 서툰 사람,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자리를 냅니다.
효율만 생각하면 기다림은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효율 때문에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셨고, 길을 잃은 한 사람을 찾으셨으며, 넘어진 제자를 다시 맡기셨습니다.
이런 교회는 교회 밖을 향해서도 열려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지는 목적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사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교회가 이웃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한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아닙니다. 잘못이 전혀 없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잘못을 숨기지 않고 회개할 줄 아는 교회, 갈등이 생겨도 사람을 버리는 대신 진실하게 대화하는 교회, 은사를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섬김의 통로로 사용하는 교회, 약한 지체를 기다리고 모든 지체가 자기 몫을 감당하도록 돕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입니다.
맺으며 —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4장이 보여 주는 교회는 한 사람이 빛나는 무대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신 사람들이 평안의 줄을 붙들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서로를 위해 사용하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함께 자라는 몸입니다.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생명의 근원도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목표도 그리스도이십니다.
· 우리는 하나 됨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 우리는 교회를 우리의 힘으로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을 주고, 상처를 싸매고, 봉사의 일을 감당할 수는 있습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진실하게 말하고, 기다리고, 다시 손을 내밀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에 합당한 걸음입니다.
혹시 이런 분이 계십니까
교회 때문에 상처받은 분이 계십니까. 사람이 준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상처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포기하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공동체가 완전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회복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며 지친 분이 계십니까. 당신이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위로입니다. 일을 나누고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잠시 쉬어도 주님의 몸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붙드십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낯선 이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지친 이의 말을 들어 주며, 보이지 않는 곳을 정돈하십시오. 작은 지체는 있어도 쓸모없는 지체는 없습니다.
이번 한 주
이제 우리의 고백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아버지를 고백하는 우리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이 사람을 살리고, 우리의 은사가 몸을 세우며, 우리의 다름이 경쟁이 아니라 조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 평안의 줄 하나를 붙드십시오. 멀어진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고, 내 몫의 봉사를 시작하며, 진실을 사랑으로 말하고, 다른 지체의 수고를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내가 몸의 주인이 아니라 지체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성령께서 주신 하나 됨을 힘써 지키게 하시고,
받은 은사로 사람을 살리게 하시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그리스도께로 함께 자라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조급함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모든 지체의 충성으로, 경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서로 연결되고,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세우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1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