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역은 오랫동안 한국교회 목회에서 가장 작은 단위였습니다.
주일 설교가 큰 그림을 그렸다면, 구역예배는 그 그림을 한 집 한 집의 식탁 위로 옮겨 놓았습니다. 화요일 오전 열 시, 누군가의 거실에 방석을 깔고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고, 공과를 읽고, 기도 제목을 나누고, 과일 한 접시를 먹고 헤어지던 시간. 그 자리에서 누가 이사를 가는지, 누구 집 아이가 아픈지, 누가 요즘 얼굴빛이 안 좋은지가 다 드러났습니다. 목회자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구역장이 먼저 보았고, 심방 일정은 대개 구역에서 올라온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요즘 구역 이야기를 꺼내면 반응이 엇갈립니다. 모이기 어렵다, 형식만 남았다, 이름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맞벌이 가정은 평일 낮에 모일 수 없고, 젊은 부부는 남의 집 거실에 들어가는 일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구역장은 고령이 되었는데 이어받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출석 보고서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실제로 모이는 사람은 서너 명뿐인 구역도 적지 않습니다.
「월간목회」가 10월호에서 '한국교회 목회백서 11_구역'이라는 이름으로 구역을 특집으로 다룬 것(기독일보 10월 1일, 컵뉴스 10월 3일 보도)은 그래서 때에 맞습니다. 특집은 사회 구조와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성도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전통적인 구역도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간판보다 체질
특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름보다 본질을 묻는 태도입니다.
큰숲목회연구소 이평강 목사는 전통적 구역을 셀이나 목장으로 바꾸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내놓으면서, 이름을 바꾼다고 곧바로 살아 있는 소그룹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목회 철학을 점검하고, 담임목사가 먼저 변하고, 지금의 구역을 진단한 뒤에 리더를 세우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간판을 바꾸는 일은 하루면 되지만 체질을 바꾸는 일은 몇 해가 걸립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많은 교회가 반대로 갑니다. 성공했다는 교회의 모델을 들여오고, 이름을 바꾸고, 교재를 새로 사고, 리더 모임을 만듭니다. 그리고 1년쯤 지나면 조용히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체질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었기 때문입니다.
영통영락교회 고요셉 목사가 소개한 구역에서 목장으로의 전환도 설교와 목자 교육을 통해 차분하게 단계를 밟았다고 합니다. 제주제일교회 김홍양 목사는 구역이 오래 해 온 목양 기능과 셀의 역동성을 합친 '구역셀'을 소개합니다. 도림교회 정명철 목사는 전통 구역을 그대로 두고 '소그룹 선교회'를 더해 운영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서울씨티교회 조희서 목사는 평신도 리더에게 사역을 맡기고 소그룹 중심의 사역을 정착시킨 경험을 나눕니다.
전환한 교회, 합친 교회, 덧붙인 교회가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정답이 하나의 모델에 있지 않다는 것, 교회마다 본질을 붙드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 특집 전체의 메시지로 읽힙니다.

우리 구역은 어디서 왔을까

잠깐 뒤를 돌아보면 소그룹은 교회가 새로 발명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감리교회의 속회는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가 만든 '클래스 미팅'에서 왔습니다. 1742년 브리스톨에서 예배당 빚을 갚으려고 열두 명 남짓씩 묶어 한 사람이 매주 1페니씩 거두게 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걷으러 집집을 다니던 리더들이 그 집의 형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술에 빠진 가장, 다투는 부부, 병든 아이. 헌금을 걷는 조직이 서로의 영혼을 돌보는 모임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이면 리더는 한 사람씩 물었습니다. 지난 한 주 당신의 영혼은 어떠했느냐고.
한국교회의 구역과 속회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 자랐습니다. 교회가 빠르게 커지던 시절, 목회자 한 사람이 수백 수천 가정을 다 돌볼 수 없을 때 구역은 교회의 실핏줄이 되었습니다. 큰 예배당에서는 이름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구역에서는 서로의 집 현관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실핏줄이 행정 조직처럼 굳어 갔다는 데 있습니다. 출석을 점검하고, 헌금 봉투를 걷고, 행사 인원을 배정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리더가 묻던 "당신의 영혼은 어떠했느냐"는 질문은 "이번 주 몇 명 모였느냐"로 바뀌었습니다. 구역이 힘을 잃은 것은 시대 탓만이 아닙니다. 본래의 질문을 잃어버린 탓도 큽니다.
코이노니아, 친목이 아니라 참여
신학적으로 그 본질의 이름은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사도행전 2장 42절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과 떡을 뗌과 기도와 함께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습니다. 46절은 그 교제가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도 알려 줍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큰 모임과 작은 모임이 처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 앞에 함께 서는 자리였다면, 집은 서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자리였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은 그 사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밝힙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끼리 마음이 잘 맞아서 생기는 우정이 아닙니다. 같은 분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는 친목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함께 나눈다', '한몫을 가진다'는 뜻의 이 말은 신약에서 성도의 교제뿐 아니라 연보를 나누는 일,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일에도 쓰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일이고, 그래서 바울의 말처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소그룹이 관리 단위나 출석 점검 체계로만 움직일 때 이 뿌리가 끊어집니다. 밥은 같이 먹는데 짐은 각자 지고 갑니다. 기도 제목은 나누는데 그다음 주에 그 기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느리고 불편한 만남

이리신광교회 권오국 목사는 'AI 시대, 왜 다시 소그룹인가'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오늘의 언어로 짚습니다. AI가 사람의 필요를 빠르고 편리하게 채워 가는 시대일수록,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가치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기독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교회가 필요에 따라 고르고 떠나는 '서비스 플랫폼'처럼 소비되기 쉬운 시대라고 하면서, 함께 먹고 울며 기도하고 서로의 삶을 책임지는 느리고 불편한 만남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넘어 '교회가 되는 삶'을 맛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느리고 불편한'이라는 표현이 정직합니다.
소그룹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야 하고, 잘 맞지 않는 사람과도 한 식탁에 앉아야 합니다. 말이 너무 많은 집사님이 있고, 매번 늦는 부부가 있고, 같은 이야기를 몇 주째 반복하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설교 영상은 1.5배속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람의 이야기는 배속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교회를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몸으로 만듭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 고린도전서 12장 26절
바울이 이렇게 썼을 때, 그것은 서로의 얼굴을 아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주에 같이 김밥을 말았던 사람, 내 아이 이름을 기억해 주던 사람이 아플 때 비로소 몸이 함께 아픕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울려면 먼저 그 사람이 왜 우는지 알 만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플랫폼은 내가 원할 때 접속하고 원하지 않으면 끊을 수 있습니다. 몸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손이 귀찮다고 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되는 삶은 바로 그 끊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은혜의 사각지대
서현교회 이상화 목사는 건강한 소그룹을 고립과 외로움의 시대에 성도를 잇고 돌보는 '생명 안전망'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아무도 형편을 모르는 성도가 있습니다. 아이 키우느라 지쳐 예배 시간 내내 유아실 유리창 너머로만 설교를 듣는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혼자 사시며 주일 점심 식사 시간이 일주일 중 유일하게 누군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인 어르신이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도 아무에게 말하지 못한 채 계속 같은 자리에 앉는 중년의 집사님이 있습니다.
큰 예배당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들이 작은 모임에서는 보입니다. 열 명이 둘러앉으면 누가 빠졌는지 바로 압니다. 두 주 연속 빠지면 누군가 전화를 겁니다. 그 전화 한 통이 한 사람을 붙드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4-25)라고 권합니다. 모이라는 말 앞에 서로 돌아보라는 말이 먼저 있습니다. 모임은 목적이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기 위한 자리입니다.
고립과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대에, 교회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선물이 여기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가 외로움을 사회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답을 제도의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부터 할까

그렇다면 목회자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교회 구역이 지금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진단하는 일입니다. 모임 횟수보다 "지난 한 달 동안 누가 누구를 돌보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출석 보고서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구역장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 앉아 들어야 보입니다. 어느 구역은 숫자는 적어도 서로 반찬을 나르고 병원에 동행하고 있을 것이고, 어느 구역은 숫자는 많아도 공과만 읽고 헤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리더를 관리자가 아니라 목양의 동역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제주제일교회가 영성과 사랑을 갖춘 구역셀장을 세우고 꾸준히 교육하고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는 대목이 핵심입니다. 양평공흥교회 강하룡 목사가 특집에서 구역장과 셀리더를 위한 코칭 훈련을 다룬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구역장에게 보고서 양식을 주기 전에,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법과 함께 기도하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누군가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리더를 돌보지 않는 교회의 소그룹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델을 서두르지 않는 일입니다. 셀이든 목장이든 구역이든, 이름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떡이 떼어지고 기도가 오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른 교회의 성공 모델을 그대로 들여오기보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언제 모일 수 있는지, 어떤 세대가 어떤 방식을 편하게 여기는지부터 살피는 편이 낫습니다. 평일 오전에 모이기 어려운 젊은 세대에게는 주일 오후나 평일 저녁 온라인 모임이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어르신들에게는 익숙한 구역예배가 여전히 가장 좋은 자리일 수 있습니다.

작은 모임이 지켜야 할 것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소그룹이 가까워질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집니다. 서로의 형편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서로의 약함을 손에 쥐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구역에서 나눈 기도 제목이 다른 구역으로 옮겨 다니는 순간, 그 모임은 안전망이 아니라 소문의 통로가 됩니다. 한 번 그런 일을 겪은 성도는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소그룹은 나눔만큼 비밀을 지키는 일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이 자리에 두고 간다는 약속을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두면 좋습니다. 기도 제목을 단체 대화방에 올릴 때도 본인에게 먼저 물어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돌봄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 위에서만 자랍니다.
또 하나, 소그룹은 닫힌 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 함께한 사람들끼리 편해지면 새로 온 사람이 끼어들 틈이 사라집니다. 의자 하나를 늘 비워 두는 모임, 그 빈자리에 누가 앉을지 함께 기도하는 모임이 교회의 소그룹입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곁에 있는가

구역은 오래된 제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늘 새롭습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곁에 있는가.
주일에 같은 예배당에 앉는 것과 서로의 곁에 있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찬양을 부르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모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갑니다. 교회가 되는 사람은 예배가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 물음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작은 모임 하나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교회가 되는 사람으로 바꿔 갑니다. 거창한 개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번 주에 구역 식구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일, 지난번에 나눈 기도 제목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묻는 일, 새로 온 사람 옆자리에 먼저 앉는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몸은 모일 때만 몸이 아닙니다. 흩어져 있는 월요일에도, 서로를 기억하고 기도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한 몸입니다.
주님, 예배당에 앉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곁에 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느리고 불편한 만남을 귀찮아하지 않게 하시고,
그 식탁 위에서 주님을 함께 만나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지난 한 달 동안 교회 안에서 내가 돌본 사람, 나를 돌봐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우리 구역이나 소그룹에서 다음 주에 비워 둘 의자 하나에는 누가 앉으면 좋겠습니까.
참고 자료
「월간목회」 2026년 10월호 특집 '한국교회 목회백서 11_구역'
기독일보 2026년 10월 1일 보도, 컵뉴스 2026년 10월 3일 보도 「월간목회 10월호, '구역' 통해 한국교회 소그룹 목회 방향 제시」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5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