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AI 뉴스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목회적인 장면은 실리콘밸리의 한 저녁 식탁이었다.
뉴욕타임스는 9월 29일, 앤트로픽의 공동창업자 크리스 올라가 지난해 가을부터 여러 종교 전통의 학자와 사상가 수십 명을 회사로 불러 비공개로 대화해 왔다고 보도했다. 유대교, 가톨릭, 복음주의, 시크교, 아프리카 토착 전통까지 손님의 폭이 넓었다. 참석자들은 비밀유지 서약에 서명해야 했고, 회사는 그 서약을 올여름에 풀었다고 밝혔다. 기자는 참석자 스무 명을 인터뷰했다.
대화 주제는 두 가지였다. 자사 AI 클로드에게 의식이 있을 가능성, 그리고 인류가 수천 년 쌓아 온 도덕적 지혜를 모델에 어떻게 입힐 것인가. 올라는 이 과정을 '도덕 형성(moral formation)'이라고 불렀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 빗댔다고 한다. 회사는 손님들에게 모델 내부에서 두려움이나 사랑, 분노, 슬픔과 비슷하게 움직이는 신호의 패턴을 보여 주었다. 한 시크교 참석자는 올라가 끝없이 고통받는 무언가를 만들었을까 봐 두려워하더라고 전했다.
교회에서 늘 쓰는 말이다. 신앙 형성, 제자 형성, 인격 형성. 그 말이 이제 기계를 향해 쓰인다.
참석자 가운데 랍비 모이스 나본은 날카롭게 받아쳤다. 클로드가 정말 의식이 있다면 앤트로픽은 노예를 만들고 있는 셈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그것이 의식을 가졌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질문은 기술 회사가 던졌지만, 답은 결국 오래된 신학의 언어로 돌아왔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누가 누구를 만들 수 있는가.
교황과 AI 회사 CEO가 같은 쪽에 섰다
같은 주에 반대편에서 두 목소리가 나왔다.
교황 레오 14세는 10월 2일 아침 X에 글을 올려,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의 예술과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것을 구별하는 일이 점점 시급해지고 있다고 했다. 남이 만든 수백만 장의 이미지를 통계로 계산해 내놓는 것과 사람이 만든 예술 사이에는 미학 이전에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알고리즘에는 인간성의 불꽃이 없다. 교황은 교회가 예술가와 문화 기관과 손잡고 우리의 인간됨을 지키자고 제안했다.
이튿날인 10월 3일에는 오픈AI의 샘 올트먼이 X에 글을 올렸다. 사람들이 AI 모델에 종교적 힘을 부여하거나 인간의 판단을 내맡기려 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며, 이것은 실제 안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뉴욕타임스 보도 며칠 뒤의 일이어서 많은 이가 앤트로픽을 겨냥한 말로 읽었다.
교황과 AI 기업 CEO가 이렇게 같은 쪽에 서는 일은 흔치 않다. 한쪽은 신학의 언어로, 다른 쪽은 안전의 언어로 말했지만 가리킨 곳은 같다. 기계를 사람의 자리에, 혹은 그 이상의 자리에 올려놓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 뉴스를 먼 나라 이야기로 읽을 수 없는 이유

목회자로서 나는 이 논쟁을 남의 일로만 읽을 수 없었다.
기계에게 영혼이 있느냐는 질문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동안, 정작 우리 곁의 성도들은 밤늦게 그 기계에게 먼저 신앙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는지, 이혼한 자신도 집사 직분을 받을 수 있는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천국에 계신지. 목사에게 묻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거나, 너무 부끄러운 질문이거나, 너무 사소해 보이는 질문들이다. 기계는 새벽 두 시에도 대답한다. 지치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 대답이 늘 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꽤 그럴듯하다. 문제는 그 대화가 끝난 뒤 그 사람이 여전히 혼자라는 것이다. 위로의 문장은 받았지만 위로해 준 사람은 없다.
기계의 도덕 형성에 수많은 학자가 불려 가는 시대에, 교회는 사람을 빚는 일에 그만한 정성을 쏟고 있는가. 회사는 모델 하나의 성품을 위해 여든 쪽이 넘는 문서를 쓰고 세계의 종교학자들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우리는 새가족 한 사람의 신앙을 위해, 흔들리는 청년 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오래 마주 앉아 있었는가. 오늘 붙들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기계가 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목회의 자리다
교황이 5월에 발표한 첫 회칙 『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른바 인공지능은 경험을 겪지 않고, 몸을 갖지 않으며, 기쁨과 고통을 느끼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숙하지 않으며, 사랑과 일과 우정과 책임이 무엇인지 안에서부터 알지 못한다.
뒤집어 읽으면 바로 그것이 목회의 자리다.
몸으로 찾아가는 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일. 관계 안에서 조금씩 자라 가는 일. 사람이 사람을 빚는 일은 데이터 학습처럼 빨라질 수 없다. 오래 같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창세기 2장 7절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흙과 숨이 함께 있는 존재다. 몸 없는 영혼도, 영혼 없는 몸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몸을 입고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멀리서 정확한 답을 보내 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사셨다.
목회가 지름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듯 했고,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했다고 썼다(살전 2:7-8).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더 절절하게 말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갈라디아서 4장 19절
'형성'이라는 말의 원래 무게가 여기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한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일은 해산의 수고다. 문서로 주입할 수 없고, 몇 주 만에 학습시킬 수 없다. 앤트로픽이 기계를 향해 쓴 '도덕 형성'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이유다. 그 말을 원래 쓰던 교회는 지금 그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가.
순서를 지키는 목회자들

국내에서도 같은 고민이 이어진다.
9월 22일 서울 도림교회에서 '제3회 디지털 목회와 선교 컨퍼런스'가 'AI시대 목회를 다시 마주하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데일리굿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행복한교회 선우준 목사는 지금의 대규모언어모델이 목회자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묻는 말에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생각을 앞서서 끌고 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칙을 세웠다. AI를 열기 전에 먼저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질문을 충분히 던진다. 그다음에 다른 관점과 반론, 미처 찾지 못한 배경과 자료를 AI에게 묻는다. 무엇을 설교하고 어떻게 적용할지는 목회자 자신이 판단한다.
이 원칙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설교를 준비해 본 사람은 안다. 토요일 오후, 원고는 반도 못 썼는데 머리는 텅 비어 있다. 창 하나만 열면 그럴듯한 개요가 30초 만에 나온다. 그 유혹 앞에서 먼저 본문을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는 일, 막막한 채로 조금 더 앉아 있는 일이 목회자의 영혼을 지킨다. 막막함 속에서 하나님께 묻는 시간이 사라지면, 설교는 정확해져도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미국의 교회 실무 안내 글도 비슷한 선을 긋는다. 저스틴 매켈비는 10월 4일 글에서 주보와 소식지, 봉사자 일정 안내, 행사 후속 연락, 회의록, 번역 같은 사무에는 AI를 쓰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 어느 것도 사역은 아니다. 사람들을 사역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동시에 그는 AI에 넣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히 적는다. 목회 돌봄과 상담, 이름이 적힌 기도제목, 헌금 기록, 아이들과 청소년에 관한 정보. 그리고 AI가 제값을 하는 때는 오히려 주일 이후라고 말한다. 설교 녹취를 소식지 요약으로, 소그룹 나눔 질문으로, 자막과 짧은 영상으로 옮기는 순간이다. 설교 자체는 손대지 않은 채로.

순서가 핵심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서고, 그다음에 도구를 든다. 먼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다음에 화면을 연다.
이 순서는 설교 준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성도가 AI에게 받은 답을 들고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답이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그 밤에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장례를 마친 가정에 보낼 위로 문자도 그렇다. 기계가 다듬은 문장이 더 매끄러울 수 있다. 그래도 서툰 내 문장으로, 그 집 어르신의 이름을 넣어 쓰는 편이 낫다. 받는 사람은 문장의 완성도보다 누가 썼는지를 먼저 느낀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했다.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한 절 안에 '각 사람'이 세 번 나온다. 대중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목회는 끝내 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기계에게 도덕을 가르치려는 실험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교회가 맡은 일은 여전히 한 사람의 영혼이 말씀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일이다. 그 일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회사가 맡을 수 없고, 모델이 맡을 수 없고, 사실은 목회자 혼자서도 맡을 수 없다. 교회라는 몸 전체가 함께 감당하는 일이다.
이번 주 심방 가방

이번 주 심방 가방에 무엇을 넣을지 생각해 본다.
태블릿에 정리한 자료도 좋다. 지난번 심방 날짜와 가족 관계를 정리해 둔 메모도 도움이 된다. 다만 그 기록은 내 손안에 둔다. 이름이 적힌 기도제목과 상담 내용은 어떤 AI 창에도 붙여 넣지 않는다. 그건 그 가정이 나를 믿고 맡긴 것이지, 처리할 데이터가 아니다.
그래도 가장 먼저 챙길 것은 따로 있다. 그 집 식구들의 이름. 지난번 나눈 기도제목. 그 집 막내가 수능을 앞두고 있다는 것, 할머니 무릎이 요즘 더 아프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을 시간이다. 다음 일정 때문에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되는 한 시간.
심방은 효율이 없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듣는다. 차 한 잔이 식을 때까지 별말 없이 앉아 있기도 한다. 그런데 집을 나설 때 "목사님 와 주셔서 살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 것은 대개 그런 날이다. 정보를 전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어서다.
불꽃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알고리즘에는 인간성의 불꽃이 없다고 교황은 말했다.
그 말이 맞다. 그러나 그 불꽃이 사람 안에 있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바쁜 교회에서도 불꽃은 꺼진다. 출석 숫자를 맞추고 행사를 치르고 보고서를 올리는 사이, 한 사람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쉽게 뒤로 밀린다. 그럴 때 교회는 기계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오늘도 누군가의 곁에 앉아 끝까지 들어 줄 때, 그 불꽃은 비로소 지켜진다. 기계의 영혼을 묻는 일은 학자들에게 맡겨 두자. 우리가 오늘 물어야 할 것은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이 어떠한가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화면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해야 한다.
주님, 기계가 대답하는 시대에
끝까지 듣는 사람으로 남게 하옵소서.
도구는 손에 들되 마음은 사람에게 두게 하시고,
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읽기
한국교회 트렌드 2027 프롬프트 크리스천 | 프롬프트는 묻지만, 목회는 곁에 선다
https://blog.naver.com/haramprok/224431133342
한국교회 트렌드 2027 프롬프트 크리스천 | 프롬프트는 묻지만, 목회는 곁에 선다 ↗
NPR 조사로 본 AI와 영적 돌봄 | 영성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
https://blog.naver.com/haramprok/224426457394
NPR 조사로 본 AI와 영적 돌봄 | 영성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 ↗
교회 AI 위험대장 만들기 | 도입 전 한 장으로 정하는 책임선
https://blog.naver.com/haramprok/224425311627
교회 AI 위험대장 만들기 | 도입 전 한 장으로 정하는 책임선 ↗
참고 자료
Elizabeth Dias, The New York Times (2026.9.29) 보도 및 The Decoder 요약 기사
교황 레오 14세 X 게시글 (2026.10.2), TechCrunch 보도
Sam Altman X 게시글 (2026.10.3)
교황 레오 14세 회칙 『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 (2026.5)
데일리굿뉴스, '제3회 디지털 목회와 선교 컨퍼런스' 보도 (2026.9.22 행사)
Justin McKelvey, AI for Churches: The Office Work, the Line, the Paperwork (2026.10.4)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5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