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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왼손에 맡기신 구원 (사사기 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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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본문 · 사사기 3:12-30
2026년 10월 4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자기 자신에게 점수를 매깁니다.

남이 매기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를 평가합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나누고, 자랑할 것과 감출 것을 나눕니다.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고 싶은 이력은 앞에 내놓고, 설명하기 부끄러운 실패와 약점은 뒤로 숨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도 내가 잘하는 부분만 쓰실 것이고, 준비된 사람과 강한 사람을 먼저 찾으실 것이라고.

그래서 부르심 앞에서도 자격부터 계산합니다. 말을 잘해야 한다,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형편이 안정되고 마음의 상처가 정리되고 지난 실패도 어느 정도 만회한 다음에야 하나님이 나를 쓰실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금은 부족하니 조금 더 나아진 뒤에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조금 더 나아진 뒤'는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한 가지 약점을 겨우 다루면 다른 약점이 보이고, 한 두려움을 넘으면 더 큰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은 몇몇 특별한 사람의 몫으로 밀려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 앞에 에훗이라는 사람을 세웁니다. 성경은 그를 소개하면서 화려한 경력부터 늘어놓지 않습니다. 어느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는지, 얼마나 말을 잘했는지, 어떤 집안의 명망을 가졌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굳이 밝히는 것은 그가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라는 사실입니다(삿 3:15).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의 눈에 불편함이던 그 특징이 구원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에훗은 칼을 오른쪽 허벅지에 감추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손으로 그 칼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자기계발 이야기'로 들으면 본문의 중심을 놓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훗의 재치가 아닙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시작은 사람의 잠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구원은 에훗의 왼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또 하나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폭력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사사 시대의 전쟁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개인적인 갈등 위에 그대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에훗의 행동은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본문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공격할 명분으로 삼거나,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욕망과 섞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전쟁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사람을 없애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는 두려움과 거짓, 죄의 반복과 자기 의를 대적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에훗을 영웅으로 높이기보다 이 낯설고 불편한 본문에서 세 가지를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의 반복되는 실패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크다는 것.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약함까지 그분의 손에 받아 쓰신다는 것. 셋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혼자 간직할 비밀이 아니라 공동체를 깨우는 나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나는 부족해서 안 된다'는 체념에서 일어나고, 동시에 '내가 해냈다'는 자랑에서도 내려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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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반복되는 실패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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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어두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12절).

'또'라는 말이 무겁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옷니엘을 세워 이스라엘을 건지셨고, 땅은 사십 년 동안 평온했습니다(삿 3:11). 위기가 지나갔고 숨 돌릴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평온은 감사의 뿌리가 되지 못하고 망각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평안이 길어지자 그들은 평안을 주신 분을 잊었습니다.

사사기 2장은 이 비극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라고 정리합니다.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백성을 건지셨지만,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삿 2:19) 다시 이전 길로 돌아갔습니다. 압제를 받고, 부르짖고, 구원받고, 평온을 누리다가, 다시 더 깊이 타락합니다. 같은 자리를 도는 원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입니다. 죄는 그대로 두면 제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익숙해지고, 합리화되고,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마음 한쪽의 작은 타협이던 것이 생활의 방식이 되고, 마침내 공동체의 상식이 됩니다.

12절에는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이스라엘을 짓누른 압제도 하나님의 손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떠난 자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 결과를 겪게 하십니다. 모압 왕은 암몬과 아말렉을 끌어모아 이스라엘을 치고 종려나무 성읍을 차지했습니다(13절). 종려나무 성읍은 대체로 여리고 일대로 봅니다.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무너뜨린 그 성읍이 이제 적의 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압제 아래 보낸 세월이 열여덟 해입니다(14절).

열여덟 해는 짧지 않습니다. 태어난 아이가 어른이 될 만큼의 시간입니다. 무엇이 정상인지 모르고 자란 세대가 생길 만큼의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죄에는 이렇게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반복이 있지 않습니까.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관계가 흔들리면 말을 조심하겠다고 결심하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 삶의 순서를 바꾸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고 문제가 가라앉으면 감사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전 습관이 돌아옵니다. 다시 조급해지고, 다시 비교하고, 다시 내 힘을 의지합니다. 같은 말로 가족을 아프게 하고, 같은 방식으로 동료를 판단하고, 같은 염려를 붙잡고 밤을 지새웁니다. 그러고는 자기에게 실망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넘어졌는데 하나님도 이제 지치셨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죄의 반복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상처를 주고도 은혜만 말하며 책임을 피할 수 없고, 관계를 깨뜨리고도 기도했으니 아무 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회개는 감정적인 미안함이 아니라 방향을 돌리고 가능한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사사기 2장의 보김에서 백성은 소리를 높여 울었지만(삿 2:4-5), 그 눈물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의 선택과 습관을 바꾸어야 회개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복음의 놀라움이 터져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15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완벽한 회개문을 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의 모든 결과를 스스로 정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사사기 2장 18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사사기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의 반복되는 배신만이 아닙니다. 그 아래 더 깊은 바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긍휼입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크니 계속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긍휼은 죄를 안전하게 만드는 담요가 아니라, 죄에서 나오게 하는 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놓았는데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라는 뜻이 아니듯, 용서는 우리를 옛 삶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은혜는 넘어짐을 변명하게 하지 않고 다시 걷게 합니다.

혹시 반복되는 실패 때문에 기도를 포기한 분이 계십니까. 같은 문제를 들고 또 하나님께 가는 것이 염치없다고 느껴지십니까. 물론 정직해야 합니다. 상황만 바뀌기를 구하고 내 방향은 바꾸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부끄러움을 안고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인정하고 구원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자기 구원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방법을 찾았습니다'라는 보고가 아니라 '우리를 건져 주십시오'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내가 강하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자격 있는 사람이 제출하는 성취 보고서가 아닙니다.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내미는 빈손입니다.

교회도 이 긍휼의 질서를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같은 문제로 다시 찾아왔을 때 "지난번에도 그랬잖아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면 그 사람은 도움을 청할 길을 잃습니다. 물론 반복되는 해악에는 경계가 필요하고, 피해를 막기 위한 책임 있는 조치도 필요합니다. 긍휼은 무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그의 최악의 순간에 영원히 가두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반복해서 불러 돌이키셨다면, 교회도 진실을 말하면서 회복의 길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족의 오래된 약점을 너무 잘 안다는 이유로 변화의 가능성을 닫아 버릴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과거의 실패를 현재의 이름으로 붙여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배신으로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다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죄라고 말하되, 한 사람의 미래까지 대신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큰 구원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에훗이 가져온 평온은 귀했지만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에훗도 죽었고, 백성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사사기의 반복은 영웅 한 명으로는 사람 마음의 뿌리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 위기를 넘겨 주는 임시 구원자가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를 근본에서 이기시는 구원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잠시 곁에 있다가 사라지는 사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죄의 값은 외면되지 않았고 주님이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의 실패보다 은혜가 크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반복해서 넘어진 사람의 소망은 더 강한 의지에 있지 않습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이루신다는 약속에 있습니다.

이 은혜를 붙들면 두 극단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는 '어차피 또 넘어질 텐데'라는 체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번에는 내 힘으로 완벽히 해내겠다'는 교만입니다. 체념도 나를 바라보고 교만도 나를 바라봅니다. 복음은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립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나는 같은 자리에서 흔들리지만 주님은 다시 부르십니다. 그러니 오늘 다시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은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작은 순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대지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반복되는 실패를 숨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가지고 가고 있습니까. 은혜를 변명으로 쓰고 있습니까, 돌이킬 힘으로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정직한 기도도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긍휼은 어떤 사람을 통해 길을 냅니까. 하나님이 고르신 사람은 모두의 예상에 맞는 오른손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왼손잡이 에훗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감추고 싶은 약함까지 그분의 손에 받아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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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에훗을 "베냐민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파에서 왼손잡이 구원자가 나옵니다. 이름이 품은 기대와 실제 인물이 엇갈립니다.

여기서 잠깐 원문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15절에서 '왼손잡이'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글자 그대로 읽으면 '오른손이 제한된 사람'에 가깝습니다. 타고난 왼손잡이였는지, 오른손에 어떤 불편이 있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요점은 같습니다. 사람들이 강점이라 부르기 어려운 몸의 조건을 성경은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하나님은 그 조건 속에서 길을 내셨습니다.

그 지파에 왼손을 쓰는 이들이 많았던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사기 20장 16절은 베냐민 지파의 정병 가운데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었다고 전합니다. 오른손의 아들들에게서 왼손을 쓰는 사람들이 나왔고, 그 왼손이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표준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익숙한 기준표를 씁니다. 말이 빠르고 판단이 분명하면 지도자답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시간이 넉넉하면 봉사하기 좋다고 여깁니다. 이력이 반듯하고 실패가 적으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합니다. 말이 느리고 낯선 자리에서 긴장하거나, 눈에 띄는 약점이 있거나, 시작이 늦은 사람은 뒤로 밀어 둡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평가 방식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은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효율과 자신감과 익숙함만 높이 칩니다.

하나님은 에훗의 왼손을 지우고 오른손잡이처럼 고쳐서 쓰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 몸의 조건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에훗은 한 규빗 길이의 좌우에 날 선 칼을 만들어(16절) 흔히 칼을 차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감추었습니다. 주석가들은 오른손잡이 무사가 흔히 왼쪽 허리에 칼을 찬다는 점을 짚습니다. 몸수색을 한다면 그쪽부터 살폈을 테니, 경계하는 방향과 에훗이 움직인 방향이 달랐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약함이 저절로 능력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약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만났을 때 쓰임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잠깐 이 장면의 분위기도 보십시오. 에훗이 공물을 바치러 간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다고 합니다(17절). 압제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공물이 쌓였고 서늘한 다락방이 있었고, 그 방에서 왕은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에훗은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돌려보낸 뒤,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돌아와 은밀한 일을 아뢰겠다고 청합니다(18-19절). 이 '돌 뜨는 곳'을 영어 성경 여럿은 길갈 근처의 우상들이나 석상이 있는 곳으로 옮깁니다. 본문이 에훗의 속마음을 적어 두지는 않았지만, 칼을 만들고 때를 보고 길을 알아본 그의 걸음은 충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20절에서 에훗은 왕에게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 말과 행동을 구원사의 한 장면으로 서술할 뿐 도덕적으로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아 거짓과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정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 21). 에훗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압제 아래 신음하는 백성을 직접 건지셨다는 증언이지, 개인의 복수를 허락하는 승인서가 아닙니다.

이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하겠습니다. 모든 약점을 무조건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고쳐야 할 습관과 품어야 할 한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무책임을 '나는 원래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포장할 수 없고, 준비하지 않음을 '성령께 맡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계속 해치면서 그것을 내 성격이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회개하고, 훈련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애써도 당장 사라지지 않는 몸의 한계, 지나온 배경, 기질의 차이, 실패의 흔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격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에훗은 자기 특징만 믿고 움직인 사람도 아닙니다. 칼을 만들었고, 때를 살폈고, 길을 알아보았고, 해야 할 일을 실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의 준비를 무의미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준비를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우리는 준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맡겨진 일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이 여기서 도움이 됩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날을 갈지 않은 채 힘만 쓰면 더 지칩니다. 날을 가는 시간은 일을 안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배우고, 쉬고, 점검하고, 도움을 청하고, 다시 준비하는 시간이 모두 순종의 일부입니다. '나는 약하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준비를 내려놓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준비가 완벽해야 시작하겠다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에훗은 자기에게 있는 몸과 손, 만들 수 있는 칼,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왼손이 있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무엇입니까. 학력이 부족하다고 느낍니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속도가 느립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긴장합니까. 과거의 실패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까. 형편이나 나이 때문에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까. 너무 바쁘고 지쳐서 이전처럼 감당하지 못합니까. 그 약함이 여러분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동으로 취소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가시 같은 약함을 두고 세 번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대답은 약함을 없애 주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29). 약함이 자랑거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약한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함을 쓰신다는 말을 약한 사람을 더 몰아붙이는 데 써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쓰신다'는 말을 앞세워 지친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고,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하다고 압박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만 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자녀로 사랑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각 사람에게 맞는 몫을 맡기십니다. 어떤 때의 순종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어떤 때의 순종은 멈추어 치료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사명은 앞에 서는 것이고, 어떤 사람의 사명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은사의 모양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목소리가 큰 것만 은사가 아닙니다. 조용히 기록을 정리하는 손도 필요하고, 처음 온 사람에게 자리를 안내하는 친절도 필요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감정을 키우지 않고 사실을 차분히 확인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손, 아픈 사람을 위해 짧게 기도하는 마음,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성실함, 다른 세대의 질문을 끝까지 듣는 인내가 모두 교회를 살립니다.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갈(31절)을 보십시오. 평범한 일상의 도구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생명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에훗의 이야기를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으면 반드시 크게 성공한다'는 약속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세상의 성공을 보장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약점은 평생 불편함으로 남을 수 있고, 어떤 기도는 우리가 기대한 모양으로 응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약속은 모든 약점이 곧 경쟁력이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밀려나지 않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 삶을 쓰신다는 데 있습니다.

더 깊이 보면 하나님의 구원 방식 자체가 세상의 기대를 뒤집습니다. 세상은 높이 올라간 사람, 힘을 많이 가진 사람,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승리자라 부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패배와 무력함으로 보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지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살리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훗의 약함을 바라보다가 결국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을 막습니다. 에훗이 왼손을 썼다고 해서 왼손 자체가 구원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도 같습니다. 말을 잘하고, 계획을 잘 세우고, 사람을 잘 돌보고, 물질을 나눌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구원의 근원은 아닙니다. 은사는 자랑의 단상이 아니라 사랑의 도구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길 책임을 받은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열등감도 막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재능이 내게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몫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한 종류의 사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오른손처럼 보이려 하면 몸은 오히려 가난해집니다. 느린 사람의 신중함이 공동체의 실수를 막고, 아픔을 지나온 사람의 경청이 누군가에게 안전한 방이 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의 꾸준함이 무너질 뻔한 일을 붙듭니다. 하나님은 비교로 몸을 세우지 않으시고 서로 다른 지체를 이어서 몸을 세우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남의 오른손을 제게 주십시오'만이 아닙니다. '주님, 제게 맡기신 왼손을 주님의 손에 드립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고칠 것은 고치게 하시고, 배울 것은 배우게 하시고, 받아들일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약함을 핑계 삼아 숨지 않게 하시고, 강점을 자랑 삼아 사람 위에 서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작게 시작하면 됩니다. 이번 주에 내가 피해 온 선한 일 하나를 정해 보십시오. 먼저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변명 없이 사과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일을 아는 척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오래 미룬 훈련을 시작하고, 지친 몸을 정직하게 쉬게 하고, 예배와 기도의 시간을 다시 정돈할 수 있습니다. 말이 느리다면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것으로, 밖에 나가기 어렵다면 이름을 적어 놓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척 드리기보다 지금 손에 있는 것을 진실하게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훗의 이야기는 개인의 특별한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혼자 살아남은 뒤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산지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한 사람의 비밀스러운 성공이 아니라 공동체를 깨우는 소식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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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공동체를 깨우는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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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은 다락방을 잠그고 빠져나와 스이라로 피했고(23, 26절),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러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27-28절).

은밀한 방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순종이 공개적인 공동체의 참여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구원을 개인의 용기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우셨고, 그 한 사람이 백성을 깨웠고, 백성은 함께 요단강 나루를 막고 싸움에 참여했습니다. 에훗의 첫마디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넘겨 주셨느니라"였다는 점도 기억할 만합니다. 구원의 주어는 끝까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주 개인적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새벽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 한 구절이 나만 아는 상처를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만남은 귀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은혜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화해의 길을 찾고, 위로받은 사람은 지친 사람 곁에 앉고, 도움받은 사람은 누군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을 엽니다.

에훗의 나팔은 이제 일어나 함께 움직일 때라는 신호였습니다. 구경꾼을 동역자로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사사 한 명이 모든 것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기다리는 백성은 자유를 지킬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앞에서 방향을 알려야 하고, 누군가는 길목을 지켜야 하고, 누군가는 두려워하는 이웃의 손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쓰시지만 한 사람 숭배를 만드시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공동체 전체를 깨우십니다.

교회도 몇몇 강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설교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 행정을 맡은 사람이 중요하지만 그들만이 교회는 아닙니다. 예배 후 혼자 남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성도, 보이지 않는 곳을 정리하는 손, 갈등이 생겼을 때 소문을 옮기지 않는 입술, 다음 세대의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는 어른, 지친 봉사자에게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해 주는 동역자가 교회를 세웁니다. 나팔은 모두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같은 주님 아래에서 각자 자리를 찾으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에훗의 이야기를 오늘의 전쟁 명령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성경의 전쟁 장면은 역사 속 특수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증언합니다. 이것을 오늘의 정치적 상대나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데 쓰면 안 됩니다. 종교적 열정이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건 인간의 전쟁이 됩니다. 역사 속 십자군의 사례는 신앙의 언어가 폭력의 포장지로 쓰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 편'이라는 말을 자기 분노의 면허로 바꾸지 맙시다.

오늘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은 먼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속삭이는 교만, 사람을 쓸모로만 평가하는 습관,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피하는 마음,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되갚으려는 욕망, 확인하지 않은 말을 퍼뜨리는 조급함이 우리의 싸움 상대입니다. 이 싸움은 사람을 해치는 방식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죄를 고백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우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 반복된 악순환을 한 사람이 멈추는 일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화를 낼 때 한 사람이 말을 늦추는 것, 잘못을 상대에게 돌리던 사람이 먼저 자기 몫을 인정하는 것, 대화가 격해질 때 잠시 멈추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나팔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빠가 틀렸다"고 말하면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권위가 세워집니다. 부부가 이기고 지는 대화 대신 함께 진실을 찾기 시작하면 집 안의 오래된 길이 달라집니다.

일터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신앙을 과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책임을 미룰 때 자기 몫을 정직하게 감당하는 것, 약한 사람에게 불편을 떠넘기는 관행 앞에서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 성과를 위해 사람을 소모시키는 방식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확인하고, 실수는 숨기지 않고, 공로는 함께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런 선택이 두려움과 거짓의 지배를 끊는 작은 나팔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익숙한 사람들만 결정을 알고, 새로 온 사람은 늘 설명을 기다려야 하고, 말이 빠른 사람이 회의의 방향을 정한다면 몸의 많은 지체가 잠들게 됩니다. 에훗의 왼손을 쓰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익숙하지 않은 은사와 느린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을 불신앙으로 몰지 않고, 모르는 것을 함께 확인하고, 처음 참여하는 사람이 실수해도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팔에는 분명한 소리가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깨운다는 이유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큰 말이 늘 선명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내가 옳다'가 아니라 '주님이 구원하신다'여야 합니다. 에훗이 백성을 자기 왕국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참여하도록 불렀듯이, 교회의 모든 부름도 사람을 특정 지도자의 소유로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신을 구원자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나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위험입니다. 좋은 지도자는 모든 답을 혼자 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체가 자기 은사를 발견하고 책임 있게 참여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일을 나누고, 정보를 설명하고, 질문을 허용하고,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저부터 그렇습니다.

반대로 성도도 지도자 한 사람에게 모든 신앙의 책임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설교를 들었으니 순종도 누군가 대신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내 관계와 습관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에훗이 나팔을 불었을 때 백성은 산지에서 내려왔습니다. 각자 자기 발로 내려왔습니다. 말씀을 들은 뒤 내가 내려가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자리, 섬겨야 할 자리, 멈춰야 할 자리, 배우기 시작해야 할 자리입니다.

함께 움직일 때에도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목표는 에훗의 명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압제에서 백성이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사역도 행사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보다, 누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는지, 누가 혼자 감당하던 짐을 함께 나누게 되었는지, 누가 자기 약점을 감추지 않고도 안전하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숫자와 속도가 사람을 가리기 시작하면 나팔 소리는 커져도 구원의 방향은 잃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마침내 이렇게 맺습니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30절). 팔십 년은 한 세대를 넘어 거의 한 평생입니다. 앞선 옷니엘 때의 사십 년보다 두 배입니다. 평온은 단지 싸움이 끝난 상태가 아닙니다. 압제자의 말이 마지막 말이 아니게 된 상태이고, 두려움이 일상의 규칙을 정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백성이 다시 자기 땅에서 숨을 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도 현실을 외면한 조용함이 아닙니다. 진실을 직면하고, 악한 순환을 끊고, 관계를 회복하고, 각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제자리를 찾을 때 오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평온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에훗이 죽은 뒤 백성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삿 4:1).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상황이 잠시 잠잠해지는 것보다 깊습니다. 세상이 주는 조건이 무너져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관계에서 나오는 평안입니다. 주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화평을 이루셨고, 부활로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님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교회가 이 평안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나팔은 공포를 조장하는 경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움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악이 전부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내 힘이 작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작은 순종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왼손을 쓰셨다면 우리의 작은 정직과 기도, 경청과 나눔도 쓰실 수 있습니다. 결과를 부풀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주님께 오늘의 순종을 드리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불어야 할 나팔은 무엇입니까. 누군가를 공격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잠든 믿음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는 체념을 깨우는 진실한 사과일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비하를 깨우는 작은 참여일 수 있습니다. '나만 알면 된다'는 개인주의를 깨우는 나눔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멈추고 필요한 경계 안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여러분에게서 멈추지 않고 한 사람을 깨우게 하십시오.


맺으며

설교 | 왼손에 맡기신 구원 (사사기 3:12-30) 본문 이미지

오늘 우리는 사사기 3장의 낯선 이야기를 따라 세 걸음을 걸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에훗의 왼손처럼 사람들이 약점으로 여기는 부분까지 그분의 손에 받아 쓰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셋째, 한 사람에게 주신 구원은 개인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깨우는 나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오늘도 자기 자신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오른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왼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하나님께까지 숨기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능력뿐 아니라 한계도 아시고, 열심뿐 아니라 두려움도 아시며, 믿음뿐 아니라 반복되는 흔들림도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 부르십니다. 완벽해진 뒤에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오되 그 모습 그대로 머물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첫 응답은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또 넘어졌습니다. 제 힘으로 이 순환을 끊을 수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십시오." 이렇게 정직하게 기도하십시오. 실패를 축소하지 말고, 남 탓으로 돌리지 말고, 은혜를 핑계 삼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수치심 때문에 도망가지도 마십시오. 죽지 않으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두 번째 응답은 드림입니다. "주님, 제가 감추고 싶은 왼손까지 주님께 드립니다." 잘하는 것만 드리지 말고 부족한 것도 드리십시오. 성공의 기억만 드리지 말고 실패에서 배운 것도 드리십시오. 젊음만 드리지 말고 나이 듦도 드리고, 건강한 시간만 드리지 말고 쉬어야 하는 시간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소모품으로 쓰지 않으십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품으시고,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생명의 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응답은 참여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내가 내려가야 할 산길을 찾으십시오. 오늘 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할 수 있습니다. 미뤄 둔 사과를 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도 내 앞의 한 걸음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기억하십시오. 에훗은 최종 구원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강력한 지도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영웅이 되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십자가에서 약함의 모양으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이 참 왕이시고, 그분이 죄의 순환을 끊으시며, 그분이 성령으로 교회를 깨우십니다. 우리는 그 구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분당한신교회 성도 여러분, 자기 약함 때문에 물러서지 마십시오. 동시에 자기 강함 때문에 앞서가지도 마십시오. 강함도 약함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십시오. 오른손도 왼손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아십니다. 오늘 그분이 물으십니다. 네가 가진 것을 내게 맡기겠느냐. 내가 너를 통해 다른 사람을 깨우도록 순종하겠느냐.

하나님이 우리의 왼손까지 붙드십니다. 우리 눈에 부족해 보이는 삶도 주님의 손에서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오늘 다시 부르짖고, 오늘 손에 있는 것을 드리고, 오늘 한 걸음 순종하십시오. 구원은 우리의 완벽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그 긍휼을 의지하여 일어나고, 서로를 깨우며,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부르짖게 하시고,
긍휼을 값싸게 여기지 않고 실제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남의 강점을 부러워하느라 제게 맡기신 것을 묻어 두지 않게 하시고,
감추고 싶은 약함까지 주님의 손에 드리게 하옵소서.
받은 은혜를 나만 간직하지 않고
가정과 교회와 일터를 깨우는 진실한 나팔로 살게 하옵소서.
사람을 공격하는 싸움이 아니라
거짓과 두려움과 죄의 순환을 끊는 믿음의 싸움을 하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나눌 질문

첫째 질문. 나는 요즘 어떤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하나님께, 그리고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정직하게 꺼내 놓는다면 무엇부터 말하겠습니까?

둘째 질문. 나의 '왼손'은 무엇입니까?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웠던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이번 주 어떤 모습일까요?

셋째 질문. 이번 주에 내가 불 수 있는 작은 나팔은 무엇입니까? 먼저 연락할 사람, 미뤄 둔 사과, 함께 나누고 싶은 소식을 하나씩 나눠 봅시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5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