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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문장 안에도 끝은 있다 | 예레미야 25장 묵상

심판의 문장 안에도 끝은 있다 | 예레미야 25장 묵상 본문 이미지

잘못을 바로잡는 말은 대개 두 방향 가운데 하나로 기울기 쉽다.

한쪽은 심각성을 낮추는 쪽이다.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문제를 작게 부르고, 좋은 뜻이었다는 설명으로 결과를 덮는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실수죠." 회의가 끝난 복도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문장이다. 다른 한쪽은 잘못을 그 사람의 최종 이름으로 만드는 쪽이다. 한 번의 실패를 영원한 판결처럼 말하고, 다시 시작할 가능성은 순진한 기대라고 치부한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요." 한 번 꼬리표가 붙으면 십 년이 지나도 떼어지지 않는다.

전자는 책임을 흐리고, 후자는 사람을 닫힌 미래에 가둔다. 진실과 소망을 함께 말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예레미야 25장은 이 어려움 한복판에 서 있는 본문이다. 가벼운 위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판결문 한가운데에 뜻밖의 경계선을 하나 긋는다. 심판은 실제이지만 끝이 없지는 않다는 선이다.


이십삼 년 동안 전해진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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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날짜로 시작한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1절). 일반적으로 주전 605년 무렵으로 보는 해다. 바벨론이 큰 제국으로 올라서는 바로 그 해에 예레미야는 유다 온 백성에게 말씀을 전한다.

그가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바벨론이 아니라 듣지 않은 세월이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절). 이십삼 년은 한 청년이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룰 만큼 긴 시간이다. 한 번 말하고 만 것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꾸준히 말했다는 뜻이다. 4절은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다고 덧붙인다. 한 사람의 입으로 안 되면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것도 안 되면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거듭 부르셨다.

전하신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5-6절). 이어서 쓰라린 한 문장이 나온다.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7절). 판결의 이유가 먼저 분명히 기록된다. 하나님이 갑자기 화를 내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오랫동안 문 앞에 서 있었고, 사람이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십삼 년이 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몇 년 동안 모른 척하다가 쓰러진 사람이 있고, 가정에서 같은 갈등을 되풀이하다 어느 날 식탁이 조용해진 집이 있다. 교회에서도 "이건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하는 일이 몇 해씩 미뤄지다가 한꺼번에 터지는 일이 있다. 무너짐은 하루아침에 오는 것 같지만 대개는 오래 쌓인 불순종의 결과다. 예레미야서는 그 쌓임을 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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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것은 일상의 소리였다

본문이 그리는 심판은 추상적인 실패가 아니다. 9절에서 하나님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을 치겠다고 하시고, 10절은 그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잔치 소리, 혼인 소리, 맷돌 소리, 등불 빛. 모두 평범한 일상의 소리와 빛이다. 맷돌 소리는 이른 아침 어느 집에서 곡식을 갈아 하루 양식을 마련한다는 뜻이고, 등불은 해가 진 뒤에도 그 집에 사람이 산다는 표시다. 여기에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더해진다. 한 가정이 새로 시작되는 소리다. 이것이 모두 끊어진다는 것은 무너짐이 숫자나 전쟁 기사보다 먼저 생활의 침묵으로 찾아온다는 말이다.

저녁 무렵 마을을 걷다 아무 집에도 불이 켜지지 않았을 때의 적막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알게 된다. 아침에 밥 짓는 냄새가 나지 않고, 골목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네. 심판이 지나간 자리는 그렇게 조용하다.

그래서 회복도 거창한 구호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밥을 마련할 수 있는지, 밤에 안심하고 불을 켤 수 있는지, 관계 안에서 웃음과 약속의 말이 돌아오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가 소망을 말할 때에도 이 구체성이 필요하다. 상처를 입은 가정이 예배의 자리로 돌아왔는지만 묻지 말고, 그 집에 안전과 신뢰와 평범한 저녁 식사가 돌아왔는지를 물어야 한다. 일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회복은 당사자보다 계획표를 위한 회복일 수 있다.


쓰임과 옳음은 같은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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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5장에서 가장 곱씹게 되는 대목은 바벨론의 왕을 부르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 부르신다(9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라는 뜻이다. 그런데 12절은 바로 이어 이렇게 말한다.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도구로 쓰였지만 죄가 면제되지는 않는다. 같은 구조가 이사야 10장에도 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라고 하시면서도, 그 마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 욕심이라고 말씀하신다(사 10:5-7).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10:15). 도끼는 도끼일 뿐인데 자기가 나무를 쓰러뜨렸다고 뽐내는 어리석음이다.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행동의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행한 폭력과 교만이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악한 행동까지 넘어 역사를 이끄실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행동한 사람의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이 구분은 교회와 일터의 언어를 돌아보게 한다. 일이 잘되었고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았다는 결과가 부당한 과정의 면허가 될 수는 없다. 건축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고, 행사가 성황이었다고, 모금이 목표를 채웠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오간 무례한 말과 일방적인 결정, 약한 사람에게 떠넘겨진 부담까지 사소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의 잘못이 드러났다고 그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선한 결과를 거짓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결과와 동기와 과정과 책임을 한 덩어리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분별이다.

"하나님이 선을 이루셨다"는 고백은 내가 내 행동을 검토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선한 결과를 자기 무죄의 증거로 독점할 수 없다는 경계가 된다.


기한은 잘못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끝이 있다는 말을 성급히 꺼내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참으라는 압박이 될 수 있다. 피해가 계속되는데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거나, 잘못이 충분히 밝혀지기도 전에 화해를 재촉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책임을 미래의 문장 뒤로 숨기는 일이다.

예레미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한을 말하기 전에 이유를 먼저 말했다. 듣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섬겼다는 사실이 먼저 기록된다. 그리고 그다음에 기한이 온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11절).

그러므로 기한이 있다는 사실은 죄의 무게를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을 정확히 말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게 한다. 책임을 묻는 일과 회복을 기다리는 일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밝히고,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구분하고, 되돌릴 수 있는 것을 실제로 고쳐야 '미래'라는 말도 정직해진다. 값싼 낙관은 오늘의 고통을 건너뛰지만, 성경의 소망은 오늘을 통과한다.


칠십 년이라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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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년이 정확히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인지는 학자들도 한 가지로 말하지 않는다. 자주 소개되는 계산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말씀이 전해진 주전 605년 무렵부터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무너진 539년까지로 보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586년부터 성전이 다시 세워진 516년까지로 보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요점은 같다. 시간이 끝없이 이어지지 않고,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끝도 있다는 것이다.

그 끝을 믿은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이다.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단 9:2). 그리고 이어지는 3절에서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기도하기를 결심한다. 기한을 읽은 사람이 기한이 알아서 이루어지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기한을 믿는 신앙은 기도하게 만든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에도 같은 약속이 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0-11). 흔히 개인의 성공을 비는 구절로 인용되는 이 말씀은 사실 칠십 년의 한복판, 포로지에서 들은 말씀이다. 고통이 멈춘 뒤에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애가는 그 시간을 지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그리고 조금 뒤에는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32)고 고백한다. 근심과 긍휼이 한 문장 안에 있다.


강한 힘에도 종료 시각이 있다

당대의 제국은 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일상의 소리가 끊어지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 사람에게 권력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현실감 없는 위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씀은 제국이 힘을 얻기 시작하는 때부터 그 힘의 기한을 함께 말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권세도 시간을 소유하지 못한다. 시작과 끝을 정하는 권한은 제국의 손에 있지 않다.

이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이 영원하다는 착각에서 우리를 풀어 준다. 부당한 구조 앞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작더라도, 그 구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기록을 남기고, 사실을 확인하고, 손해를 줄이고, 혼자 말하기 어려운 이의 곁에 서는 작은 행동은 역사의 주인이 강한 자가 아니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반대로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기한의 신앙은 겸손을 요구한다. 지금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나 결정권자라는 뜻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에도 임기가 있고 맡은 부서에도 교체가 있다. 맡겨진 시간 안에 무엇을 살렸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지웠는지 언젠가 답해야 한다.

기한을 믿는 공동체는 기다림의 방식도 달라야 한다. 막연히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며 손을 놓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진실이 지워지지 않게 돌본다. 결정의 근거와 수정 과정을 기록하고, 책임자가 바뀌어도 약속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같은 잘못을 막을 기준을 남긴다. 기다림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회복이 머물 자리를 준비하는 노동이다. 기억을 보존하지 않는 소망은 다음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물려줄 수 있다.

또한 정해진 끝은 우리의 조급함을 다스린다. 사람과 공동체의 변화에는 명령만으로 줄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당장 달라진 모습을 보이라고 압박하면 사과는 연출이 되고 제도 개선은 문서에만 머물기 쉽다.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리며 책임을 미뤄서도 안 된다. 약속한 변화를 확인할 시점을 정하고, 중간 과정을 점검하고, 지켜지지 않았을 때 취할 조치도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기한은 책임 없는 유예가 아니라, 책임이 역사 안에서 실제로 집행된다는 표지다.

개인의 회개도 이 리듬을 따른다. 잘못을 깨달은 순간 방향은 바꿀 수 있지만, 무너진 신뢰가 같은 순간에 모두 회복되지는 않는다.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상대에게 즉시 이전 관계로 돌아오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과한 사람은 결과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달라진 선택을 반복해야 한다.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회복의 속도와 거리를 정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끝을 믿는다는 것은 과정을 생략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긴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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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아는 사람이 오늘을 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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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 기한이 있다는 믿음은 달력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예레미야 25장의 기간을 오늘의 사건에 옮겨 종료 날짜를 예측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악도 영원한 주권을 갖지 못한다는 고백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무한하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강한 힘이 마지막 말을 갖지 못한다는 위로가 되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쓰임과 성공이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경고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유혹을 함께 거절해야 한다.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어 값싼 평화를 얻으려는 유혹과, 잘못한 사람과 무너진 공동체의 미래를 영원히 닫아 버리려는 유혹이다. 판결을 판결답게 받아들이되 그것을 하나님의 마지막 문장으로 바꾸지 않는 것, 회복을 바라되 필요한 책임과 수정을 건너뛰지 않는 것이 믿음의 긴장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해야 할 일을 선명하게 한다. 사과할 수 있을 때 사과하고, 고칠 수 있을 때 절차를 고치고, 맡은 권한이 끝나기 전에 약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동시에 지금의 어둠이 전부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 등불이 꺼진 시간을 정직하게 기억하면서도 등불을 다시 켤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기한을 믿는 사람의 태도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제국의 힘도, 인간의 실패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절망을 신앙처럼 붙들지 않는다.

주님, 제 잘못을 작게 부르지 않게 하시고
이웃의 잘못을 영원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게 하옵소서.
꺼진 등불을 정직하게 기억하되
다시 불 켤 날을 위해 오늘의 일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요즘 내가 "그 정도는 괜찮다"고 작게 부르고 있는 잘못은 없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원래 그렇다"고 영원히 닫아 버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서 '끊어진 소리와 꺼진 등불'은 무엇입니까? 그 소리가 돌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표지는 무엇일까요?

내가 맡은 권한 중에, 언젠가 "누구의 목소리를 지웠는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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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성경: 개역개정 렘 25:1-14, 29:10-11, 사 10:5-15, 단 9:2-3, 애 3:21-33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5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