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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타락론 | 똑똑해진 세상에서 다시 묻는 타락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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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 24일 토요일, 명지대학교에서 제43회 기독교학문연구회 연차학술대회가 열린다.

주제는 'AI시대 타락론 톺아보기'다. 공지에 따르면 장소는 명지대학교 MCC관 10134호 코이노니아홀이고, 낮 12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이어진다. 대학원생 세션은 오전 10시에 따로 열린다. 기조 발표는 세 가지다. 이승구(합신대, 조직신학)가 '타락의 역사성과 죄의 인지적 영향'을, 박희주(명지대 방목기초대학)가 '인간의 타락과 과학기술'을, 김태황(명지대, 국제통상학)이 '현대 사회와 경제, 타락의 성과인가? 번성의 결과인가?'를 맡는다. 신학자와 과학기술을 다루는 학자, 경제학자가 한자리에서 창세기 3장을 다시 펼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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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학회에 다녀와서 쓰는 보고가 아니다. 공지된 주제를 읽고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본 것이다. 발표 내용을 미리 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세 제목이 던지는 질문을 따라 성경을 다시 읽어 보려고 한다.


왜 하필 타락인가

주제를 처음 보았을 때 조금 의외였다.

AI 시대라면 보통 창조, 형상, 인간다움 같은 말이 먼저 떠오른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함을 말하려면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의 형상 이야기부터 꺼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학회는 타락을 꺼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쪽이 더 정직한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을 만들고 쓰는 손은 여전히 아담의 후손의 손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손이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의 손이라는 사실을 빼고 기술을 논하면 이야기가 절반만 남는다. 도구가 얼마나 정교해졌는가를 말하기 전에, 그 도구를 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자주 반대로 한다. 기술이 좋아졌으니 사람도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기술이 위험하니 막아야 한다고 외친다. 둘 다 사람을 가운데 두지 않는 말이다. 타락론은 사람을 가운데로 돌려놓는다.


창세기 3장을 천천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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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첫마디는 질문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명령을 뒤집지 않고 질문으로 흔든다.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그 말씀의 뜻이 정말 그것이냐. 질문의 형식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의 대상으로 올려놓는다.

여자가 대답하면서 이미 조금 달라진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3:3)고 전한다. 말씀이 조금 늘어나 있다. 그러자 뱀은 한 걸음 더 간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 그리고 약속을 내건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핵심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식을 금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미 동산의 이름 붙이기와 경작과 다스림을 맡은 지적인 존재였다. 금지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2:17),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하나님 없이 스스로 판정하는 자리였다. 타락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판단의 주권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바라보는 장면도 곱씹을 만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6). 먹음직한 것은 필요를 채워 주고, 보암직한 것은 즐거움을 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은 더 많이 알게 해 준다. 유익하고 아름답고 똑똑해지는 일. 세 가지가 한꺼번에 약속되었다.

이 구절을 AI 이야기로 곧바로 옮기는 일에는 조심해야 한다. 본문은 컴퓨터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새 기술에 거는 기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결이 섞여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정확하게 예측하면 삶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도구는 중립적일 수 있어도, 그 도구에 거는 우리의 기대까지 중립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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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11:3) 하고 새 기술을 만들어 낸다. 돌 대신 구운 벽돌, 진흙 대신 역청이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4). 벽돌 기술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기술로 이름을 내고 하나님이 맡기신 흩어짐의 길을 피하려 한 데에 문제가 있었다.


죄는 잘못 보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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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의 발표 제목 가운데 '죄의 인지적 영향'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개혁신학 전통은 죄가 행위뿐 아니라 지성과 판단에도 미친다고 고백해 왔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죄의 '노에틱(noetic) 영향'이라 부르기도 한다. 죄는 우리를 나쁘게 행동하게 할 뿐 아니라 잘못 보게 만든다는 뜻이다. 다만 이것은 죄가 사람의 이성을 없애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리고니어의 묵상 자료는 죄가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생각하는 능력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불신자도 많은 영역에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은 증거를 외면하는 사람을 책망하신다.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책망도 성립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어두워짐을 여러 곳에서 말한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21-22)라고 쓴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의 모습을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라고 그린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라고 말한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는 일과 어리석어지는 일이 한 문장 안에서 나란히 선다.

그렇다면 사람이 만든 데이터와 알고리즘도 그 굽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AI는 사람이 쓴 글과 사람이 남긴 기록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지식과 함께 우리의 편견, 탐욕, 두려움도 학습된다. 그것이 더 정교한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사람이 만든 거울이 사람의 얼굴을 비춘다. 이 거울을 두려워할 일도, 신처럼 숭배할 일도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얼굴은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정직하게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일이다. AI가 내놓은 답이 그럴듯할 때 "그럴듯함"이 곧 옳음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 답이 내 마음에 꼭 들 때 오히려 한 번 더 의심하는 것.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주는 도구를 곁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 죄의 인지적 영향을 믿는 사람은 자기 판단도 의심할 줄 안다.


타락의 성과인가, 번성의 결과인가

세 번째 발표의 질문, "타락의 성과인가, 번성의 결과인가"는 목회 현장에도 그대로 던져진다.

한쪽으로 기울면 이런 말이 나온다. 기술과 경제의 진보는 모두 사람의 교만이 만든 산물이니 멀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는 세상이 쓰는 기술과 일터의 현실에서 물러서게 되고, 교회의 말은 힘을 잃는다. 다른 쪽으로 기울면 이런 말이 나온다. 진보는 곧 하나님의 복이니 그대로 받으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는 시대의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성경은 두 눈으로 함께 본다. 창세기 4장은 문명이 시작되는 장면을 이렇게 적는다. 가인이 성을 쌓고(4:17),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4:20-22). 가축과 음악과 금속 기술. 모두 삶을 넉넉하게 하는 문명의 성취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라멕의 노래가 나온다. 그는 자기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자랑하며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하고 노래한다. 문명이 자라는 그 자리에서 폭력도 함께 자란다.

기술이 한 계보에서 나오고 폭력이 같은 계보에서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기술이 농기구도 되고 무기도 될 수 있다. 같은 기술이 둘 다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의 AI도 의료 진단과 사기 전화에 똑같이 쓰인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줄기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심판의 자리에서도 돌봄은 멈추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은 사람들(3:7)에게, 하나님이 직접 옷을 지어 입히셨다. 예수님도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고 하셨다. 개혁신학은 이 폭넓은 돌봄을 일반은총이라 부른다. 문명의 성취 속에는 일반은총이 있고, 그 성취를 비틀어 쓰는 죄도 함께 있다. 둘을 함께 보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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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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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성도들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성찰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있는가"보다 "이것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습관이다. 편리함 앞에서 잠시 멈추어 이웃을 떠올리는 습관이다. 내가 쓰는 도구 때문에 일자리가 흔들리는 사람은 없는지, 내가 올린 사진과 글 때문에 불편해질 사람은 없는지, 이 서비스가 어떤 노동 위에 서 있는지 한 번 물어보는 일이다. 소그룹에서 "이번 주에 AI에게 맡긴 일과 직접 한 일은 무엇인가"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작이 된다.

죄를 개인의 도덕 문제로만 좁히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라멕의 노래가 보여 주듯 죄는 개인의 마음에서 나와 구조와 문화 속으로 스며든다. 알고리즘이 누구를 눈에 띄게 하고 누구를 보이지 않게 하는지, 데이터가 누구의 목소리를 많이 담고 누구의 목소리를 빠뜨렸는지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교회는 개인의 회개를 말하면서 구조의 문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정리한 교회 AI 위험대장처럼 도입 전에 책임선을 정하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락 이야기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창세기 3장은 심판의 선언 한가운데에서 이미 약속 하나를 심어 놓았다. 뱀을 향해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3:15)라고 하신다. 교회는 이 구절을 오래전부터 오실 구원자에 대한 첫 약속으로 읽어 왔다. 인간의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고백과 함께 간다.


우리를 참으로 밝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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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타락론을 다시 읽는 일은 결국 인간을 겸손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연약하고 생각보다 쉽게 속는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의 자리는 분명하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8:2). 그리고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3-24).

똑똑해지는 일과 하나님을 아는 일은 같은 말이 아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선악을 아는 나무 앞에서 사람은 눈이 밝아졌으나(창 3:7) 자기가 벗은 줄만 알았다. 그 눈을 참으로 다시 열어 주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세상이 똑똑해질수록 교회는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를 참으로 밝게 하는 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주님, 더 많이 아는 것으로 안전해지려 하지 않게 하시고
제 판단도 굽을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게 하옵소서.
편리한 도구를 쓰되 이웃의 얼굴을 잊지 않게 하시고
어두운 데 빛을 비추시는 주님을 아는 것으로 족하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내가 요즘 AI나 새 기술에 거는 기대 가운데 "이것만 있으면 삶을 통제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섞여 있다면 무엇입니까?

AI의 답이 내 마음에 꼭 들었을 때, 그 답을 한 번 더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이 그 의심을 도왔습니까?

우리 교회와 일터에서 기술의 이익은 누리면서 그 그늘은 보지 않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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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기독교학문연구회 공지, 「제43회 기독교학문연구회 연차 학술대회 개최」 (2026.9.16) https://www.worldview.or.kr/xe/community/352599

Ligonier, The Noetic Effects of Sin (확인: 2026.10.6)

성경: 개역개정 창 1:27-28, 2:17, 3:1-7, 15, 21, 4:17-24, 11:3-4, 마 5:45, 요 17:3, 롬 1:21-22, 고전 8:1-3, 고후 4:4, 6, 엡 4:17-18, 잠 1:7, 렘 9:23-24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6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