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본문 · 스바냐 3:14-20
2026년 10월 7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으며 살아갑니다.
집에 들어갈 때 가족의 표정을 살피고, 일터에서는 상사의 말투를 살피고, 교회에서도 누가 나를 반기는지 조심스럽게 헤아립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같은 질문을 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겨우 참아 주시는 것일까. 실수 많은 나를 보며 또 실망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알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더 선명히 보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기쁨보다 실망의 얼굴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바냐 3장 14절부터 20절입니다. 스바냐서는 가벼운 위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1장 1절은 이 말씀이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요시야 시대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기억되는 때이지만, 스바냐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1:12) 하나님은 복도 재앙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가 있지만 마음은 가라앉은 앙금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앞부분은 죄에 대한 엄중한 고발과 심판의 경고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르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두려움에 웅크렸던 백성에게 노래하라고 하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하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심판을 건너뛴 기쁨이 아닙니다. 심판과 회복의 약속을 통과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의 환희는 현실을 모르는 얕은 웃음이 아니라, 무너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깊고 무거운 기쁨입니다.

그 가운데 17절이 오늘 설교의 중심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 스바냐 3장 17절
여기에는 놀라운 방향의 전환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고 노래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이야기보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붙드시는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기분을 북돋우는 문구로 줄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선택을 무조건 기뻐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바냐는 죄와 교만과 거짓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은 자기 힘을 자랑하는 백성이 아니라, 남겨지고 낮아져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는 백성입니다(3:12). 그러므로 오늘의 질문은 "나는 사랑받을 만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구원으로 자기 백성을 다시 기쁨의 자리에 세우시는가"입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과 사랑이 본문의 주어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멀리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억지로 참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잠잠히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쁨을 받은 백성은 늘어진 손을 들고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정죄의 눈으로만 자신을 바라보던 마음이 복음의 눈을 뜨고, 사랑받기 위해 분주하던 삶이 이미 주어진 사랑 안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본문의 첫 소식은 우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15절은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라고 하고, 17절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라고 합니다. 같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5절에서는 형벌이 제거되고 원수가 쫓겨난 뒤의 안도 속에서, 17절에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라는 이름과 함께 나옵니다. 신앙의 출발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느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감정은 날씨처럼 바뀝니다. 어떤 날은 기도가 잘되고 예배가 뜨겁지만, 어떤 날은 말씀 한 줄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감정 온도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뜨거워진 뒤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메마른 백성을 살리시려고 먼저 그 가운데로 오시는 분입니다.
이 약속은 이사야서의 노래와 깊이 만납니다. 이사야 12장은 구원받은 백성이 이렇게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사 12:6).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크시기 때문에 노래합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고 풀어 줍니다. 백성이 올라가서 마침내 하나님을 찾아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낮아지고 흩어진 백성 가운데 계시며, 그 가운데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려오심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멀리 있는 심사위원처럼 생각합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장 밖에서 점수를 매기다가 잘하면 박수하고 못하면 고개를 젓는 분처럼 상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을 관중석에 두지 않습니다. 울고 있는 자리, 실패를 수습하는 자리, 관계를 다시 세우는 자리, 내일의 양식을 염려하는 자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안전한 거리에서 조언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전능하심과 가까이 계심이 한 문장에 함께 있습니다. 능력은 있으나 멀리 계신 분도 아니고, 가까이 있으나 도울 힘이 없는 분도 아닙니다.
심판을 지난 자리의 남은 사람들
그런데 이 약속은 아무 조건 없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앞부분을 읽어 보면 3장 1절에서 7절까지 예루살렘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라 불립니다. 지도자들은 "부르짖는 사자"와 "저녁 이리"에 비유되고, 선지자는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습니다(3:3-4). 그 한가운데서 5절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15절의 가운데와 5절의 가운데는 같은 자리입니다. 죄로 얼룩진 성읍 가운데도 계셨고, 회복된 성읍 가운데도 계십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님의 위치가 아니라 백성의 자리입니다. 7절은 아프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아침마다 빛을 비추셨는데 사람들은 부지런히 어둠을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은 심판 이후에 오는 순서를 따릅니다. 12절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1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겠다고 하셨고, 그 뒤에 남는 사람들이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입니다. 말과 병거를 많이 가진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할 것이 없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약함이 구원의 대가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이라는 거짓 구원자를 내려놓고 참된 구원자께 피하게 된 것입니다.
13절은 그 백성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9절에서는 하나님이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입술의 변화부터 시작되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입술을 정결하게 하시고, 그다음에 그 입술로 노래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의존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미성숙의 표지가 아니라 피조물의 바른 자리입니다. 세상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서는 것을 강함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생명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강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 하셨습니다. 하루치 양식을 날마다 거두며 자기 창고가 아니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위험한 길에서 손을 놓고 혼자 가겠다고 우기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은 오늘 무엇을 바꿉니까.
먼저 두려움의 독백을 멈추게 합니다. 15절은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고, 16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합니다. 두려움은 문제의 크기만 계산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계산에서 빼 버릴 때 커집니다. 문제는 실제입니다. 병도, 경제적 압박도, 관계의 상처도, 교회의 어려움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믿음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자기암시가 아니라, 문제보다 더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보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는 외로움의 해석을 바꿉니다. 곁에 사람이 없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쉽게 "나는 버려졌다"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외롭다고 느끼는 것과 버려진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도움이 늦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며, 때로 한 사람의 전화와 한 끼의 식사와 조용한 동행을 통해 그 임재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을 말로만 반복하지 말고 서로의 곁을 지킴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는 고백을 서둘러 문제 해결의 공식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정한 시간표와 모양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상황을 곧바로 바꾸시지만, 때로는 상황을 통과할 힘을 주시고, 때로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붙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에서도 구원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설득해서 구원자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휘두르는 도구로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욥기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말하면서 고통 속에 부르짖는 사람을 논박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욥 35:9-10)라고 했습니다. 말 자체에 진리의 조각이 들어 있어도 눈물로 부르짖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사람을 두 번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받아야 완전해지는 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궁핍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진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죄인에게 스스로 올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의 죄와 수치를 담당하셨고, 버림받음의 깊은 자리를 지나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충분히 깨끗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가운데 계심"은 막연한 종교 감정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 21:3)라는 약속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적용은 단순합니다.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자신의 약함을 숨긴 뒤 강한 모습으로 나아가려 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약함을 들고 나아가십시오. "주님, 저는 제 힘으로 저를 구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필요한 양식과 지혜와 인내를 주십시오." 이것이 패배자의 기도가 아니라 남은 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기도를 안전하게 드릴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약함을 고백할 때 빨리 훈계하기보다 곁에 앉고, 답을 만들기보다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십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이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너무 익숙하게 읽으면 놀라움을 잃어버립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회복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는 선언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겨우 화나지 않게 만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지못해 받아 주시는 짐도 아닙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소식에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받아 기뻐하신다는 소식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성도가 용서와 기쁨 사이에서 멈춥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믿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법정에서 무죄 판결은 받았지만 집에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원은 형벌 면제만이 아닙니다. 관계의 회복이며 집으로 돌아옴이며 잔치에 참여함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하셨습니다. 아들이 준비해 온 사과의 말(15:21)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2-23). 회복의 목적은 죄인이 겨우 생존하는 데 있지 않고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 32편은 용서받은 사람의 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죄를 숨기고 입을 열지 않았을 때는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고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시 32:3-4)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32:5). 그리고 용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32:7). 정죄가 사라진 빈자리를 하나님의 노래와 사랑이 채웁니다. 스바냐 3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두고 노래하시는 장면과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말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표현은 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읽으면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고요해지신다', '잠잠하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낱말을 두고 해석이 갈리기도 합니다. 칠십인역을 따라 '새롭게 하신다'로 읽는 길이 있어서, 일부 영어 번역은 그렇게 옮깁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방향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요란한 훈계와 다그침이 아니라 우리를 품고 진정시키며 새롭게 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말이 필요하지만, 어떤 사랑은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곁을 지킵니다. 어린아이가 지쳐 잠들었을 때 부모는 계속 설명하지 않습니다. 곁을 떠나지 않고 조용히 숨소리를 듣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말을 잃었을 때도 참된 사랑은 해답을 쏟아 놓기보다 함께 침묵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잠잠한 사랑은 무관심의 침묵이 아닙니다. 포기해서 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품고, 진정시키고,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사랑의 고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종종 부재로 해석합니다. 기도한 뒤 즉시 답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설명되지 않는 침묵을 통과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욥도 하나님을 찾았고, 시편의 탄식자들도 밤낮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욥기 35장은 하나님을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로 부릅니다(35:10). 노래는 밤이 끝난 다음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밤 한가운데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고난 중인 사람에게 "왜 아직 노래하지 않느냐"고 요구하는 데 써서는 안 됩니다. 노래는 숙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스바냐에서도 먼저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다음에 백성의 기쁨이 일어납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응답이 뒤따릅니다. 교회는 울고 있는 사람에게 억지 미소를 요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가 다시 노래할 때까지 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자기애를 부풀리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아 숭배에서 우리를 해방합니다. 내가 나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면 인생은 비교의 법정이 됩니다. 더 성공한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 더 경건해 보이는 사람 옆에서 나는 계속 작아집니다. 실패하면 존재 전체가 실패가 되고, 칭찬이 끊기면 사랑도 끊긴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뿌리내리면 성취는 감사의 열매가 되고 실패는 회복을 배우는 자리가 됩니다.
시편 149편 4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세상은 사람을 외모와 성과와 소유로 꾸미지만, 하나님은 낮은 자를 구원으로 입히십니다. 그 아름다움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입니다. 스바냐 3장 12절의 곤고하고 가난한 남은 자와 통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는 사람을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나님께 합격점을 얻기 위한 수행처럼 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사랑받고, 봉사를 잘하면 가까워지고, 실수하면 즉시 멀어진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기도와 순종과 봉사는 귀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면 모든 경건이 불안의 노동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예배는 냉정한 하나님을 달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회개를 가능하게 합니다. 정죄만 예상하는 사람은 잘못을 숨깁니다. 들키면 버림받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사랑이 확증되었음을 믿는 사람은 빛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시편 32편에서 죄를 숨기기를 그치자 하나님이 은신처가 되셨습니다. 참된 안전은 죄를 숨기는 데 있지 않고 은혜 안에서 정직해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완벽한 사람의 전시장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회복되어 가는 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행동이 아무 상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자녀의 해로운 선택을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잡고, 기다리고, 다시 길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은 죄를 승인하는 감상적인 호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백성이 사랑과 정의와 진실을 배우며 자라기를 바라시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나태함의 핑계가 아니라 변화의 가장 깊은 동력입니다.
이 기쁨은 새 창조의 약속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9). 구원의 종착지는 단순히 재난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이 서로 기뻐하는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새롭게 하신다는 마지막 약속을 미리 맛보는 기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복음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 "나는 역시 아무 가치가 없어" 하고 존재 전체를 저주하지 마십시오. 죄는 구체적으로 고백하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십시오. 실패를 핑계로 책임을 피하지도 말고,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폐기하지도 마십시오. "나는 잘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며 회개와 순종의 길로 다시 부르신다." 이것이 은혜 안의 정직입니다. 복음은 사실을 흐리는 위로가 아니라 가장 깊은 사실 위에 서는 위로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도 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할 때 지적부터 시작하기 쉽습니다. 부족한 점을 정확히 알려 주면 곧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더 깊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상대를 문제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떤 인내로 붙드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가능성을 성급히 닫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며, 작은 변화를 함께 기뻐하십시오.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의 돌봄을 바꾸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쁨을 받은 백성은 다시 손을 들고 살아갑니다

16절에는 이런 권면이 있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손이 늘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자세가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낙심으로 행동할 힘을 잃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무엇을 시작해도 소용없다고 느끼고, 기도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 힘도 사라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백성에게 먼저 힘을 내라고 소리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가운데 있다. 내가 구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다음 손을 들게 하십니다. 행동보다 관계가 먼저이고, 사명보다 복음이 먼저입니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인정받기 위해 일할 때는 결과가 나쁘면 모든 힘이 꺼집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일할 때는 실패해도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므로 실패했다고 사랑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책임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감당할 용기를 줍니다.
스바냐 3장의 마지막 대목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합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번역과 해석이 쉽지 않은 대목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절기, 곧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해 근심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모아 주신다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흩어지고 쫓겨나서 예배의 자리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다시 한곳에 모이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어서 19절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던 자.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찾으시는 사람들입니다. 20절은 "내가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고 맺습니다. 세상이 부끄럽게 만든 자리가 하나님이 영예를 돌려주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을 받은 백성이 손을 드는 방식은 혼자만의 평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첫째, 다시 예배합니다. 이사야 12장은 구원받은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12:5)라고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예배는 한쪽의 독백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수 없는 날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의 뜻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이 조금씩 굳은 입술을 열고, 마침내 다시 노래하게 합니다. 때로는 눈물 속에서 드리는 신뢰도 예배입니다. 성경의 예배에는 찬송과 탄식이 함께 있습니다.
둘째, 서로를 돌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5-26).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약속은 개인의 위안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삶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아플 때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고, 누군가 회복될 때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고통 중인 사람에게 원인을 단정하거나 믿음의 크기를 평가하지 마십시오. 먼저 들으십시오. 식사를 챙기고, 병원 길에 동행하고, 이름을 기억해 기도하고, 답이 없어도 곁에 있어 주십시오.
셋째, 일상의 작은 순종을 다시 시작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은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합니다. 물을 긷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동작입니다. 한 번의 감동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읽고, 오늘 기도하고, 오늘 한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나가 하루치였듯 은혜도 오늘의 걸음에 맞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미래의 불안 때문에 오늘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모든 일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갇힐 때는 "오늘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한 걸음은 무엇인가"를 물으십시오.
넷째, 약한 사람을 중심에 세웁니다. 스바냐의 하나님은 저는 자와 쫓겨난 자와 수욕받던 자를 모으시는 분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상처 입은 이들을 외면한다면 노래와 삶이 갈라집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만 보지 말고 조용히 견디는 사람을 살피십시오. 말이 빠른 사람의 의견만 듣지 말고 표현이 더딘 사람을 기다리십시오. 도움을 받는 사람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지체로 존중하십시오.
다섯째, 기쁨을 훈련합니다. 기쁨은 모든 일이 잘되었다는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반복해 기억하는 영적 습관입니다. 이사야 12장이 옛 출애굽의 구원을 다시 노래하듯,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위기 앞에서 오래된 은혜의 노래를 꺼냅니다. 감사할 작은 것을 기록하고, 공동체가 경험한 은혜를 나누고, 과거에 건져 주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기쁨을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울고 있는 성도에게 웃으라고 재촉하는 것은 본문의 순서를 거스릅니다. 열매는 줄기를 흔든다고 빨리 맺히지 않습니다. 뿌리에 물을 주고 햇빛을 받게 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는 슬픔을 빨리 끝내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슬픔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봉사는 쉽게 지치고 비교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보이지 않는 자리도 충실히 섬길 수 있습니다. 작은 청소, 한 통의 안부 전화, 이름 없이 드리는 도움, 다음 세대를 위한 꾸준한 기도가 귀해집니다.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값이 아니라 그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화해를 향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기뻐하셨다면 우리는 원망을 영원히 붙잡고 살 수 없습니다. 물론 깊은 상처의 관계에서는 안전과 경계가 필요하고, 모든 관계가 즉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악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피해자에게 성급한 화해를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가능한 자리에서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인정하고, 보복의 욕망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를 향한 한 걸음을 시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손은 주먹만 쥐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여덟째, 다음 세대에게 다른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줍니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늘 실망한 감독자로만 배우면 신앙은 숨 막히는 평가가 됩니다. 거룩함을 분명히 가르치되, 회개하는 자를 달려가 맞으시는 아버지와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실수했을 때 정직하게 사과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정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완벽함을 연기하는 어른보다 은혜로 회복되는 어른이 복음을 더 진실하게 전합니다.
아홉째,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봅니다. 피곤을 무시하고 계속 일하는 것을 충성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잠을 자고, 쉬고, 도움을 구하고, 필요하면 전문적인 돌봄을 받는 것은 믿음 없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쓰러질 때까지 이용하다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한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내가 멈춰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 완성을 기다리며 오늘을 삽니다. 스바냐의 마지막은 흩어진 이들을 모으고 수치를 칭찬과 명성으로 바꾸시겠다는 약속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아직 모든 눈물이 닦인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탄식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 이 소망 때문에 우리는 오늘 작은 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늘어진 손을 억지 의지로만 들어 올리려 하지 마십시오. 먼저 여러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하시는 능력을 기억하고, 잠잠히 사랑하시는 품에 머물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복음 안에서 받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가능한 한 가지 순종을 시작하십시오. 한 사람에게 연락하고, 미뤄 둔 사과를 준비하고, 짧게라도 기도하고, 지친 이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큰 기쁨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세상에 길을 냅니다.
이 순종은 혼자 영웅이 되려는 결심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개인들을 따로 구원하신 뒤 각자의 길로 보내지 않고 한 백성으로 모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회복에는 반드시 "함께"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혼자서는 끊기 쉬운 기도의 끈을 소그룹과 예배 공동체가 이어 주고,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여러 어깨가 나누어 집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붙들어 준 사람이 내일은 붙들림을 받고, 오늘 위로받은 사람이 훗날 같은 아픔을 지나는 이를 위로합니다. 이것이 은혜가 공동체 안에서 순환하는 모습입니다.
맺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멀리서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겨우 참아 주는 냉정한 주인이 아니라, 잠잠히 사랑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무기력한 위안 속에 가두지 않고, 늘어진 손을 다시 들게 하여 예배와 돌봄과 순종의 자리로 보냅니다.
혹시 오늘 "하나님은 나에게 실망하셨을 뿐"이라는 생각에 눌려 있습니까?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보다 큰 그리스도의 은혜도 작게 만들지 마십시오.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용서받은 자를 구원의 노래와 인자하심으로 두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의 정체성을 실패에서 받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녀 됨에서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이를 문밖에 세워 두지 않으십니다.
혹시 아직 노래할 힘이 없습니까?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밤을 지나는 사람에게 왜 노래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분이 아니라, 그 밤에 노래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공동체의 노래를 빌리십시오. 옆의 성도가 대신 믿어 주고 대신 기도하게 하십시오. 교회는 강한 사람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을 나누어 지는 몸입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고요 속에서 충분히 쉬십시오. 때가 되면 은혜가 여러분의 입술을 다시 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조금 힘이 있는 성도는 그 힘을 약한 이를 일으키는 데 사용하십시오. 판단보다 경청을, 충고보다 동행을, 과시보다 섬김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이 쫓겨난 자를 모으시고 수욕받던 자를 돌보신다면, 우리도 교회와 삶의 가장자리로 가야 합니다.
이제 마음에 한 문장씩 새깁시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나의 가운데에 계신다." 내가 흔들려도 그분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없어도 그분은 구원하십니다. "그가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내가 설명할 말을 잃어도 그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나는 사람의 박수로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로마서 8장 39절의 말씀대로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믿는 것이 교만이 아닐까 염려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믿는 데서 생기지 않고, 그 사랑 없이도 내가 충분하다고 여기는 데서 생깁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열매가 맺히면 주신 분께 감사하고, 부족함이 드러나면 숨지 않고 배우고, 다른 사람이 빛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세 가지를 실천해 봅시다. 아침에는 "주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십시오. 낮에는 만나는 한 사람을 평가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로 바라보십시오. 밤에는 잘한 일과 부족했던 일을 모두 주님께 내어놓고, 감사 한 가지와 회개 한 가지를 정직하게 말씀드리십시오. 이 작은 리듬은 우리를 자기 증명의 피로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호흡으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근거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맺으신 신실한 언약입니다. 그래서 좋은 날에는 자만하지 않고 힘든 날에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웃음만 받는 분이 아니라 눈물도 받으시며, 완성된 믿음만 받는 분이 아니라 떨리는 믿음도 붙드십니다.
우리의 노래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래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믿읍시다. 그 사랑 안에서 두려움 대신 신뢰를, 숨음 대신 회개를, 무기력 대신 작은 순종을 선택합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뻐하십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의 늘어진 손을 다시 들게 하고, 우리의 집과 교회와 일터에 따뜻한 순종의 노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 제가 주님의 얼굴을 늘 실망한 얼굴로만 그려 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믿고, 숨기던 것을 정직하게 아뢰게 하십시오.
잠잠히 사랑하시는 그 품에서 쉬게 하시고
늘어진 손을 다시 들어 한 사람의 짐 한 모퉁이를 함께 들게 하십시오.
우리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오늘의 순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십시오. 아멘.
함께 나눌 질문
첫째 질문.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상상하고 있습니까? 실망한 얼굴, 무심한 얼굴, 기뻐하시는 얼굴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깝고, 그것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둘째 질문. 용서받았다는 것은 믿지만 기뻐하신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이번 주 스바냐 3장 17절을 소리 내어 읽으면 어떤 마음이 올라옵니까?
셋째 질문.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서 지금 손이 늘어져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번 주 그의 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나를 나눠 봅시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8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