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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만 거두는 믿음 | 출애굽기 16장 만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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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생긴 뒤로 우리는 내일 먹을 것을 오늘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은 줄지 않았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안심이 되는지, 얼마나 모아 두어야 충분한지 물으면 대답은 늘 "조금 더"다. 더 많이 쌓아 둘수록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쌓인 것이 늘수록 잃을까 두려운 것도 함께 는다.

출애굽기 16장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양식을 주시되, 창고에 쌓을 수 없는 방식으로 주셨다. 하루치만 거두게 하셨고, 남긴 것은 다음 날 아침이면 상했다. 한 달 치를 한꺼번에 주실 수도 있었을 하나님이 굳이 이렇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절). 만나는 배를 채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배우는 일이었다.


고기 가마 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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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은 배고픔에서 시작했지만 기억에서 자라났다.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3절)이라고 말한다. 종살이의 고통은 희미해지고 가마 곁의 온기만 또렷해졌다.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현재가 불안할 때 마음이 흔히 택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이 원망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12절) 하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떡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원망에 대한 응답이 책망이 아니라 양식이었다는 사실은 곱씹을 만하다. 하나님은 굶주린 사람에게 먼저 설교하지 않으시고 먼저 먹이신다. 다만 먹이시는 방식 안에 가르침을 담으셨다.

아침에 이슬이 마른 뒤 땅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14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히브리어로 그 물음이 만나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부터가 질문인 양식이다. 익숙한 떡이 아니라 낯선 것으로 먹이셨기에, 그들은 먹을 때마다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다시 물어야 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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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는 규칙은 단순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16절).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장막에 있는 식구 수대로 거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흥미롭다.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17절) 오멜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18절).

이 구절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거두는 능력이 달랐어도 장막 안에서 나누니 결국 모두가 필요한 만큼을 가졌다는 설명이 자연스럽다. 힘센 사람이 더 거두고 노인과 아이가 덜 거두었어도, 한 장막 안에서 함께 되어 보면 모자람도 넘침도 없었다는 것이다. 광야의 식탁은 각자의 손 크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로 계산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를 권한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 바울이 바란 것은 "균등하게 하려 함"(13-14절)이었다. 만나의 원리가 광야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의 재정 원리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내 바구니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저장할 것이 아니라 흘려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남겨 둔 것에서 냄새가 났다

모세는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19절)고 전했다. 그러나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20절). 남겨 둔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내일도 내릴지 어떻게 아는가. 혹시 끊기면 어쩌는가. 오늘 거둔 것을 조금 남겨 두는 것이 무슨 큰 잘못인가.

그런데 본문은 그 작은 비축을 불순종이라 부른다(20절). 내일 양식을 오늘 쌓아 두는 일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이 내일도 주실 분을 믿지 못하겠다는 몸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말하면서 손은 내일 몫을 움켜쥐고 있다면, 손이 하는 말이 진짜 신앙이다. 만나는 그 손을 펴게 하는 훈련이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 본문은 저축이나 계획을 정죄하는 말씀이 아니다. 요셉은 흉년을 대비해 곡식을 쌓았고 잠언은 개미의 준비성을 칭찬한다. 만나의 규칙은 광야라는 특별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방식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저축의 유무가 아니라 저축의 자리다. 쌓아 둔 것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와 있지 않은가, 쌓인 것이 줄어들 때 믿음도 함께 줄어들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도 같은 결을 지닌다. 한 달 치가 아니라 오늘 치를 구하는 기도는, 내일도 같은 분께 다시 나아가겠다는 약속이다.


안식일은 금지가 아니라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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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에는 예외가 하나 있었다. 여섯째 날에는 갑절을 거두고, 그날 남긴 것은 아침까지 두어도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24절). 같은 만나인데 다섯 날은 상하고 여섯째 날은 상하지 않았다. 양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명령이 달랐다. 만나는 저절로 상하거나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양식이었다.

그래도 일곱째 날에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27절). 하루를 쉬라는 말이 손해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반응은 이렇다.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29절). 안식일을 "준다"고 하신다. 지켜야 할 의무로 먼저 말씀하지 않으시고 받은 선물로 말씀하신다. 쉬어도 굶지 않도록 하나님이 전날 미리 채워 두셨다는 것이다.

구약학자 고든 웬함은 이 대목을 두고,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 이미 만나를 통해 안식일의 원리와 그 중요성을 배우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의 문장보다 식탁의 경험이 먼저였다는 말이다. 쉬는 날 아침에 상하지 않은 만나를 먹으면서 그들은 몸으로 알았을 것이다. 멈추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멈춘 동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막 2:27)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광야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쉬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게으른 사람보다 두려운 사람이 많다. 손을 놓으면 뒤처질 것 같고, 내가 멈추면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을 것 같다. 일곱째 날에 들에 나간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두려움으로 나간 걸음은 결국 빈 바구니로 돌아왔다. 안식은 할 일이 없을 때 쉬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남아 있는데도 하나님을 믿고 손을 놓는 것이다.


항아리에 담긴 하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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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 뜻밖의 명령으로 끝난다. 만나 한 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33절)는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상하던 양식을 대대로 보관하라니, 모순처럼 보인다. 그런데 보관하는 목적이 분명하다.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32절)이다. 쌓아 두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기억해 두는 것은 명령되었다.

신명기는 이 기억의 의미를 풀어 준다. 하나님이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신 8:3)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고한다. 가나안에서 배부르고 집을 짓고 소유가 풍부해질 때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 말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항아리 속 만나는 풍족한 날을 위한 기억 장치였다. 냉장고가 가득한 날에도 우리가 하루치를 받아먹는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만나의 믿음은 무엇일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루치를 감사하는 것이다. 한 달 치가 확보되어야 감사하겠다는 마음은 광야에서라면 매일 굶는 마음이다. 오늘 받은 것을 오늘 감사하는 연습이 먼저다. 둘째, 남는 것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내 바구니에 남은 것이 저절로 상하지는 않지만, 나누지 않고 쌓이기만 한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바울이 만나 본문을 연보에 적용한 이유가 여기 있다. 셋째, 멈추는 날을 지키는 것이다. 주일에 손을 놓는 것은 생산성의 손실이 아니라 누가 먹이시는지를 확인하는 고백이다.

만나는 사십 년 동안 내렸고 가나안 땅 접경에서 그쳤다(35절). 임시 양식이었다. 그러나 그 임시 양식이 가르친 것은 영구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만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5)라고 하셨다.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받아먹던 백성의 이야기는,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사는 교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루치만 거두는 믿음은 적게 가지는 믿음이 아니라, 내일도 같은 분께 받겠다는 믿음이다.

주님, 오늘 받은 것을 오늘 감사하게 하시고 내일 몫을 움켜쥔 손을 펴게 하옵소서. 남는 것은 흘려보내고, 멈추어야 할 날에는 주님을 믿고 멈추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요즘 내가 "조금만 더 있으면 안심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마음은 광야에서 만나를 남겨 두던 손과 얼마나 닮아 있습니까?

내 바구니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쉬지 못하고 있는 하루는 언제입니까?


참고 자료

성경: 개역개정 출 16:1-36, 신 8:2-18, 마 6:11, 막 2:27, 요 6:31-35, 고후 8:13-15

고든 웬함, 『모세오경』(성서유니온), 출애굽기 16장 해설 부분. 본문의 안식일 관련 설명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요약입니다.

※ 이 글의 이미지는 AI로 제작한 삽화입니다. 실제 교회 공간이나 특정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