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나눔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본문 이미지

아침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기도도 했고 할 일도 적어 두었다. 그런데 오후 두 시쯤이 되면 이상한 마음이 찾아온다. 시계를 자꾸 본다. 창밖을 내다본다. 하던 일이 갑자기 무의미해 보이고, 지금 있는 자리가 싫어지고, 다른 곳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게으른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데, 마음이 자리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을 열거한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5-6). 밤에 오는 것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밝을 때, 환한 대낮에 닥쳐오는 것도 있다. 초기 교회가 읽던 헬라어 구약(70인역)은 이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한낮의 마귀"라고 옮겼다. 그리고 4세기 사막의 수도사들은 자기들이 매일 겪는 한 가지 마음의 병에 바로 이 이름을 붙였다. 아케디아다.


해가 멈춘 것 같은 시간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본문 이미지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약 345-399)는 사막에서 수도사들의 마음을 오래 관찰한 사람이다. 그는 수도사를 괴롭히는 여덟 가지 생각을 정리했는데, 탐식, 음란, 돈 사랑,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허영, 교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여섯째인 아케디아를 그는 "한낮의 마귀"라 부르면서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했다. 『프락티코스』 12장에 그 증상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다.

먼저 시간이 이상해진다. 해가 멈춘 것 같고 하루가 오십 시간처럼 길다. 그래서 수도사는 자꾸 창밖을 보고, 방에서 나가 해가 얼마나 기울었는지 살피고, 누가 찾아오지 않나 사방을 둘러본다. 그다음에는 지금 있는 곳과 지금 하는 일이 싫어진다. 형제들 사이에 사랑이 없고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그 기억이 거기에 보태진다. 그러고 나면 더 쉽고 편한 곳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아케디아는 아주 경건한 말로 속삭인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섬길 수 있지 않느냐고. 마지막으로 옛 가족과 이전 생활의 기억,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긴지, 이 삶이 얼마나 고된지를 보여 준다.

천육백 년 전 사막 독방의 기록인데 낯설지 않다. 시계를 보는 것, 창밖을 보는 것, 지금 자리가 싫은 것, 다른 곳을 꿈꾸는 것,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 순서까지 비슷하다. 에바그리오스가 한 가지를 덧붙인다. 이 마귀 뒤에는 다른 마귀가 곧바로 따라오지 않으며, 싸움이 끝나면 영혼에 평화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낮을 견딘 사람에게는 저녁이 온다.


경건한 구실을 달고 오는 권태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본문 이미지

에바그리오스의 가르침을 서방에 전한 요한 카시아누스는 『제도집』 10권에서 아케디아를 "마음의 권태와 괴로움"이라고 풀면서 한 가지 중요한 관찰을 남겼다. 이 병은 게으름의 얼굴만 하고 오지 않는다. 열심의 얼굴을 하고도 온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케디아에 사로잡힌 수도사는 자기가 이곳에서는 아무에게도 유익이 못 된다고 탄식하고, 먼 곳의 수도원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병자를 방문해야 한다, 형제들을 대접해야 한다, 친척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의지할 데 없는 경건한 여인을 돌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독방에서 쓸모없이 앉아 있는 것보다 그런 경건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 모든 것을 아케디아가 사람을 자리에서 끌어내는 "구실"이라고 보았다.

이 대목이 뼈아픈 것은, 우리가 흔히 영적 침체의 반대가 바쁜 봉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막 교부들은 지금 맡은 자리가 견디기 싫어서 더 거룩해 보이는 다른 일로 도망치는 것 역시 같은 병의 증상이라고 보았다.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싫어서 모임을 하나 더 만들고, 한 사람을 꾸준히 돌보는 것이 지루해서 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은 멀리서 보면 열심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자리를 뜨는 일일 수 있다. 한 한국 연구자는 목회자의 탈진을 다룬 논문에서 "거룩한 자기 착취"라는 표현을 썼다(하재성, 2015). 바쁨이 늘 믿음의 증거는 아니다.


사막 교부들의 두 가지 처방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본문 이미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에바그리오스는 『프락티코스』 27장과 28장에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아케디아에 눌릴 때 눈물로 영혼을 둘로 나누어 한쪽이 다른 쪽을 격려하게 하고, 좋은 소망을 심고, 시편 한 구절을 노래하라고 했다. 그가 든 구절은 시편 42편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시편 기자는 자기 마음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 마음을 향해 말한다. 권태가 속삭이는 말을 그대로 듣고 있는 대신, 내 영혼을 불러 세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시험이 올 때에는 그럴듯한 구실이 있어도 방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견디라고 했다. 도망치면 마음은 무력해지고 비겁해지고 또 도망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여기에 손노동을 더했다. 그는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 3:12)는 바울의 말을 들어, 손으로 하는 일이 마음의 권태를 막는다고 가르쳤다. 그가 이집트 장로들에게서 들었다고 전하는 말이 있다. 일하는 수도사는 마귀 하나의 공격을 받지만 게으른 수도사는 무수한 영에게 시달린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마음에 말을 걸고, 자리를 지키고, 손을 움직여라. 큰 결단이나 극적인 체험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세 가지다. 한낮의 마귀는 큰 죄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조금씩 뜨게 해서 결국 아무 데도 없게 만든다. 그러니 처방도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시간을 더 견디는 것, 시편 한 절을 소리 내어 읽는 것, 미뤄 둔 설거지를 하는 것이 영적 싸움일 수 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먼저 떡을 주셨다

한낮에 찾아오는 권태 | 시편 91편과 사막 교부가 말한 아케디아 본문 이미지

여기서 한 가지 분별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의 처방은 자리가 싫어서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모두 아케디아는 아니다. 어떤 마음은 권태가 아니라 탈진이다. 그 경우 "버티라"는 말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가 그렇다. 갈멜산의 큰 승리 직후, 그는 이세벨의 위협을 듣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하지 않으셨다. 먼저 재우셨고, 천사를 보내 "일어나서 먹으라"(5절) 하셨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주셨고, 다시 눕게 하셨다. 그리고 또 깨워 먹이시며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7절) 하셨다. 책망도 설교도 그다음이었다. 호렙산의 세미한 소리는 두 번 먹고 두 번 잔 뒤에야 들렸다.

사막 교부들 자신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초기 수도 문헌에서 아케디아의 처방은 기도를 늘리라는 조언과 줄이라는 조언, 방에 머물라는 조언과 밖으로 나가라는 조언이 함께 나온다는 연구가 있다(Crislip, 2005). 한 가지 처방이 모든 사람에게 맞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육의 죄는 피함으로 이기고 영의 죄는 맞섬으로 이긴다고 구별했다. 지금 내 마음이 피해야 할 것인지 맞서야 할 것인지, 권태인지 탈진인지를 먼저 묻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지혜를 제대로 쓰는 길이다. 열심이 유별했던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큰 열심이 아니라 떡 한 덩이와 잠이었다.


오후 두 시의 작은 약속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오후에 찾아오는 그 마음에 "나는 지금 아케디아를 겪고 있다"고 이름을 붙여 보라. 사막 교부들이 한낮의 마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것이 밖에서 온 손님이지 내 본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붙은 권태는 절반쯤 힘을 잃는다.

둘째,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끝내는 것이다. 지금 자리를 뜨고 싶고 다른 일을 벌이고 싶을 때, 그 결정을 저녁으로 미루고 손앞의 작은 일 하나를 마무리해 보라. 시편 한 장을 읽거나, 답장 하나를 쓰거나, 책상을 치우는 것이면 된다. 큰 결정은 한낮이 지난 뒤에 내려도 늦지 않다. 에바그리오스가 약속한 평화는 그 한낮을 통과한 사람에게 온다.

셋째, 혼자 두지 않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아케디아가 홀로 사는 사람에게 특히 위험하다고 했다. 권태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을 고립시키는데, 고립될수록 권태는 깊어진다. 그러니 마음이 한낮에 갇힌 것 같을 때 한 사람에게 연락하라. 그리고 반대로, 주변에 요즘 자리를 자꾸 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설교 대신 떡을 들고 찾아가라. 그가 겪는 것이 권태라면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처방이고, 탈진이라면 먹이고 재우는 것이 처방이다. 어느 쪽이든 찾아가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시편 91편은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노래한다. 한낮의 마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존자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후 두 시는 지나간다. 해는 결국 기운다.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내 영혼에게 말을 거는 것, 그것이 오늘 내게 맡겨진 믿음이다.

주님, 환한 대낮에 마음이 자리를 뜨려 할 때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권태에는 견딜 힘을, 탈진에는 쉴 자리를 주시고,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한낮을 지나 저녁에 이르면 주께서 약속하신 평화를 맛보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요즘 내가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은 권태에 가깝습니까, 탈진에 가깝습니까? 그 둘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습니까?

내가 "더 거룩한 일"이라는 이름으로 피하고 있는 지루하고 작은 자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그 자리에서 한 가지만 끝낸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참고 자료

성경: 개역개정 시 91:1-16, 시 42:5, 왕상 19:1-18, 살후 3:6-13

에바그리오스, 『프락티코스』 6·12·27·28장. Luke Dysinger 영역(evagriusponticus.net)을 읽고 요약했습니다. 본문의 증상 서술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풀어 쓴 것입니다.

요한 카시아누스, 『제도집』 10권 1-3장, 14장, 23장. Gibson 영역(NPNF 2nd series vol. 11)을 읽고 요약했습니다.

Andrew Crislip, "The Sin of Sloth or the Illness of the Demons? The Demon of Acedia in Early Christian Monasticism," Harvard Theological Review 98(2), 2005, 143-169. 초기 수도 문헌의 처방이 서로 다르다는 지적은 이 논문의 논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하재성, "목회자의 우울증과 탈진: '거룩한' 자기 착취의 성과," 복음과 상담 23(1), 2015. 초록과 제목만 확인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별은 『신학대전』 II-II 35문 1항을 참고했습니다.

※ 이 글의 이미지는 AI로 제작한 삽화입니다. 실제 교회 공간이나 특정 장소, 실제 인물을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