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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품을 떠나지 않는 고요 (시편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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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본문 · 시편 131:1-3
2026년 10월 9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쁜 것을 성실한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손에서 일이 끊이지 않고, 머릿속에서 계획이 쉬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문제까지 계속 마음에 담고 있으면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잠시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고, 내가 손을 놓는 순간 중요한 일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이 앉아 있어도 마음은 뛰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음 일을 계산하며,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결과를 재촉합니다.

우리의 조급함은 언제나 나쁜 뜻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앞날을 걱정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빈자리를 채우려 합니다. 맡은 일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누군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의 선택까지 대신 책임지려 합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로 시작된 책임감도 경계를 잃으면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가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별하지 못하면, 사랑은 통제가 되고 충성은 소진이 되고 기도는 염려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오늘 읽는 시편 131편은 세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입니다. 표제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던 순례자들이 길 위에서 부르던 노래 모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짧은 길 위에서 부른 이 노래는 분주한 영혼의 깊은 곳을 정확하게 비춥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과 눈과 손을 살핀 뒤, 자기 영혼이 어머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고 권합니다.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 고백이 공동체의 소망으로 넓어집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시편 131편

이 말씀은 아무 책임도 지지 말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큰 꿈을 버리고 작게만 살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감정을 눌러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는 우리가 책임을 바르게 지도록 돕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오늘 맡겨진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결과를 내 손에 넣으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을 도구가 아니라 한 인격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응답을 즉시 얻지 못해도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는 거래에서 관계로 깊어집니다.

바로 앞의 시편 130편도 같은 순례의 노래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130편은 죄를 지켜보시면 누가 서겠느냐고 묻고(3절), 사유하심이 주께 있다고 고백하며(4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히 주를 기다린다고 노래합니다(6절). 성경은 깊은 곳을 건너뛰고 평온한 척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고, 물어야 할 때 묻고, 죄를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게 합니다. 그러고도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품에 머물라고 부릅니다. 부르짖음의 130편 다음에 고요의 131편이 놓인 순서를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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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세 가지를 살피겠습니다. 첫째, 겸손은 내 몫과 하나님의 몫을 구별하는 정직입니다. 둘째, 고요는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 훈련입니다. 셋째, 품에서 배운 평안은 공동체를 살리는 소망이 됩니다.


첫째, 겸손은 내 몫과 하나님의 몫을 구별하는 정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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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먼저 마음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교만은 겉으로 큰소리치는 태도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계속 낮추어 말하면서도 모든 일이 내 판단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표현을 쓰면서도 다른 사람의 속도와 방식을 견디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교만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고, 내가 모든 답을 가져야 하고, 내가 빠지면 일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어 시인은 눈을 말합니다.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마음이 높아지면 눈도 높아집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내 계획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로 평가합니다. 빨리 배우는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더딘 사람은 짐처럼 느낍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여기고, 다른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방해한다고 판단합니다. 높아진 눈은 다른 사람을 작게 만들고, 결국 자기 자신도 끝없는 비교 속에 가둡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손이 벌이는 일을 말합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단순히 '큰 일'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씀은 큰 책임을 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때로 큰 일을 맡기시고 믿음으로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십니다. 문제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일이 내게 맡겨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몫까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인지에 있습니다.

우리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칠 책임이 있지만 자녀의 모든 선택과 믿음의 결말을 대신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준비하고 돌보며 공동체를 섬길 책임이 있지만 모든 성도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사과하고 대화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반응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터에서는 충실히 준비하고 정직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모든 변수와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없는 몫까지 책임지려 합니다. 자녀가 흔들리면 내가 부모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단정합니다. 공동체에 갈등이 생기면 한 사람이 모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한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자신의 존재 가치까지 의심합니다. 누군가 내 조언을 따르지 않으면 더 강하게 설득하고, 그래도 달라지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책임의 경계가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실 자리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시편 131편이 말하는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사실대로 보는 정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한 말이 그 정직을 잘 보여 줍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심고 물 주는 일은 분명한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 구별이 우리를 하찮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도한 자랑과 과도한 자책에서 함께 풀어 줍니다. 일이 잘되었을 때 모든 공로를 독점하지 않게 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모든 실패를 혼자 삼키지 않게 합니다.

시편 127편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이 시 역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있습니다. 수고를 헛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짊어진 수고가 헛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필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교회와 일터에도 나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나의 빈자리를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잠시 쉬는 동안 하나님의 통치가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한다고 진리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고 사명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할 때 다른 이의 은사와 판단이 들어올 자리가 생깁니다.

이 겸손은 관계를 바꿉니다. 모든 답을 가진 척하지 않으니 먼저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방식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니 질문과 반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의 변화가 느려도 그의 속도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일을 나누어 맡기고, 실수한 사람에게 다시 배울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잘못한 것을 변명 없이 사과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장악하려 하지만 겸손은 진실을 견딥니다.

여기서 1절을 무기력의 핑계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큰 일을 힘쓰지 않는다'는 말을 해야 할 일을 피하는 데 쓰면 안 됩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을 외면하거나, 공동체의 불의를 보면서도 내 몫이 아니라고 물러서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명백히 맡겨진 책임을 미루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손을 놓는 태도가 아니라 손의 범위를 바르게 아는 태도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충실히 하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일이 정말 내게 맡겨진 일입니까? 둘째, 이 일을 이루려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선택을 지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결과가 내 뜻과 달라도 정직하고 사랑이 있는 방식으로 계속 걸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은 책임을 약하게 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바른 자리에 놓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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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겸손은 무능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분명히 말씀하시고, 병든 자를 돌보시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정으로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에게서 우리는 책임과 맡김이 서로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첫째 대지의 적용은 이것입니다. 오늘 내 몫을 분명히 하고, 내 몫이 아닌 한 가지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십시오. 해야 할 전화를 하되 상대의 반응까지 조종하려 하지 마십시오. 준비할 일을 충실히 준비하되 성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자녀에게 진실하게 말하되 그의 마음을 억지로 열려 하지 마십시오. 공동체를 섬기되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겸손은 책임을 버리는 축소가 아니라,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제자리로 돌려놓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책임의 경계를 안다고 곧바로 마음이 조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놓았는데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장면이 돌아갑니다. 입으로 맡겼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다시 결과를 움켜쥡니다. 그래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요는 저절로 찾아온 기분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둘째, 고요는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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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편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는 '젖 뗀 아이'입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이 어머니 품에 있는 젖 뗀 아이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품을 떠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품 안에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품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당장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안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품 자체를 신뢰하며 머뭅니다. 주석가들은 이 아이를 젖을 떼고 난 뒤 어머니가 주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에게 만족하게 된 아이로 읽습니다. 시인은 그런 아이처럼 자기 영혼을 가라앉혔다고 말합니다.

젖 먹는 아이는 품 안에서도 먹을 것을 찾습니다.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웁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간구가 필요합니다. 먹을 것과 건강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불의한 일을 바로잡아 달라고 기도하며, 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시편은 탄식과 간구를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앞의 130편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므로 고요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무감각이 아닙니다.

젖 뗀 아이의 그림이 보여 주는 성숙은 다른 데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즉시 얻지 못해도 관계 전체를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응답이 늦어도 품에서 달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실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때에도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무엇을 받았는가"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가"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원을 처리해 주는 분으로 쉽게 줄여 버립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기도하고 해결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란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합니다. 오래 섬겼는데 인정받지 못하면 순종의 의미까지 부정합니다. 계획한 문이 닫히면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처럼 낙심합니다. 그때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품보다 그 품에서 얻고 싶은 것에 더 가까이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젖을 뗀다는 것은 아픈 과정입니다. 익숙한 공급 방식이 멈추면 아이는 울고 보챕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고요를 타고난 차분한 성격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그렇게 되도록 다루었습니다. 평온은 우연히 떨어진 기분이 아니라 붙들던 요구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놓는 훈련의 열매입니다. 시편 62편도 같은 훈련을 말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우리에게도 떼어 내야 할 익숙한 요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수고한 만큼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기도한 내용이 내가 정한 시간 안에 응답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상대가 인정해야만 관계가 회복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계획이 바뀌지 않아야 평안할 수 있다는 요구도 있습니다. 이런 바람 자체가 언제나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사람을 벌주고 관계를 끊는다면 바람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영혼을 고요하게 한다는 것은 감정을 억지로 눌러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고백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공동체에 요청해야 합니다. 시편 62편 8절은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30편의 깊은 부르짖음 없이 131편의 고요를 흉내 내면 평안은 진실을 덮는 가면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정돈된 문장만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탄식과 질문도 받으십니다.

그러나 감정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과 감정에게 최종 판결권을 주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지금 버려진 것처럼 느낍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느낌만으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짓지는 않습니다. "응답이 늦어 답답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그 답답함 때문에 하나님을 불성실하다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결과가 두렵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두려움이 내 모든 선택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고요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고요를 배우는 몇 가지 길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영혼을 고요하게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조급한 결론을 늦출 수 있습니다. 오늘 이해되지 않는 일을 오늘 안에 모두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남겨 두고 분명히 아는 말씀을 붙드십시오. 둘째, 해결하려는 말보다 듣는 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말이 느리다고 대신 결론 내리지 말고, 침묵 속에서 그의 생각이 자랄 자리를 남겨 주십시오.

셋째,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없는 것만 세면 영혼은 계속 보챕니다. 그러나 오늘 숨 쉬고 예배드리는 은혜, 용서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 곁에서 기도해 주는 사람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기억하면 마음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고통이 전부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기억입니다.

넷째, 몸의 속도를 낮출 필요도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알림을 끄고 말씀 앞에 앉으십시오. 대답을 만들어 내기보다 한 구절을 천천히 되새기십시오. 기도할 말이 많지 않다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머무십시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말씀이 그 자리를 가리킵니다. 다만 침묵 자체를 신비한 기술로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고요는 막연한 공백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머무는 고요입니다.

다섯째, 도움을 받아야 할 때는 도움을 받으십시오. 고요를 모든 고통의 만능 처방처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래 지속되는 불안과 깊은 낙심,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 전문적인 돌봄이 필요한 문제를 단지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는 말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 공동체는 필요한 의료적·법적·전문적 도움을 연결하고 한 사람이 홀로 견디지 않도록 곁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적절한 도움을 거절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한 믿음은 응답을 포기한 믿음이 아닙니다. 응답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바라는 믿음입니다. 선물이 늦어져도 선물 주시는 분을 떠나지 않는 믿음입니다. 상황이 정리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머무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자족은 '배웠다'고 합니다. 시편 130편에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기다리되, 131편에서는 그 기다림 속에서도 품을 잃지 않습니다.

복음이 확증하는 품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 품을 확증합니다. 우리는 우리 감정의 평온함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완벽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셨기 때문에 우리는 품에 머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사 66:13).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못해 견디시는 분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자기 백성으로 품으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안은 상황의 완성도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관계의 확실성에 기대어 있습니다.

복음이 주는 고요는 자기 최면과 다릅니다. 자기 최면은 괜찮지 않은 현실을 괜찮다고 되풀이하며 마음을 설득하려 하지만, 복음은 현실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고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며 인간의 한계를 한계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죄보다 큰 용서가 있고, 상실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있고, 우리의 한계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사실을 외면해서 얻는 얇은 안정이 아니라 더 큰 사실에 기대는 단단한 안식입니다.

이 차이는 실패한 날에 특히 드러납니다. 계획한 일을 끝내지 못했거나, 좋은 의도로 건넨 말이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했거나, 오랫동안 기도한 관계가 여전히 어렵다면 우리는 자신을 몰아붙이기 쉽습니다. 물론 돌아보고 사과하며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자기 처벌은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순종하는 것이지만, 자기 처벌은 끝없이 자신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품을 신뢰하는 사람은 잘못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용서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또한 품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편의에 맞는 분으로 상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지만 우리의 욕망을 모두 승인하시지는 않습니다. 때로 말씀은 우리가 놓지 않으려는 것을 내려놓게 하고, 익숙한 습관을 돌이키게 하고, 피하고 싶은 책임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그 책망조차 관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끄시는 사랑 안에서 옵니다. 안전한 품은 아무 방향도 요구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진실을 들어도 버려지지 않는 곳입니다.

이 고요를 하루의 리듬 속에서 연습해 보십시오. 아침에는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구분해 적어 볼 수 있습니다. 낮에는 마음이 급해질 때 즉시 결론을 내리기보다 한 번 멈추어 사실과 추측을 나누어 보십시오. 저녁에는 이루지 못한 일만 세지 말고, 오늘 받은 도움과 내가 놓쳐 사과해야 할 일을 함께 돌아보십시오. 마지막에는 끝내지 못한 일을 내일로 넘기며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도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하셨습니다. 하루를 완벽하게 닫지 못해도 하나님은 졸지 않으십니다.

혹시 지금 젖을 떼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익숙했던 일이 멈추고, 기대했던 인정이 오지 않으며, 기도의 응답이 다른 모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울고 있다면 믿음이 없다고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젖떼기에는 울음과 실랑이가 있습니다. 다만 울면서도 품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하고, 말씀을 붙들고,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오늘 다 고요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영혼은 반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가운데 평온해집니다.

둘째 대지의 적용은 한 가지 요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모든 사람의 인정일 수 있고, 계획의 성공일 수 있고, 가족의 즉각적인 변화나 기도의 일정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께 이름 붙여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되 주님의 몫을 빼앗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평온을 개인적인 위안으로만 간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갑자기 "이스라엘아"라고 부릅니다.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다룬 사람이 이제 공동체에게 소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요는 혼자 조용해지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평안은 곁에 있는 사람을 재촉하지 않고 공동체가 숨 쉴 자리를 만드는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셋째, 품에서 배운 평안은 공동체를 살리는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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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입니다.

1절과 2절은 '내 마음', '내 눈', '내 영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3절은 이스라엘 전체를 부릅니다. 가장 개인적인 고백이 가장 넓은 권면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조급함을 다루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평안하라고 말하면 그 말은 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먼저 고요하게 한 사람의 권면에는 기다려 줄 여백이 있습니다. 같은 권면이 130편 7절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파수꾼의 기다림도 혼자의 기다림이 아니라 백성이 함께하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평안을 빼앗기도 합니다. 지도자의 불안이 모두의 긴급함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결과를 서두르면 모든 사람이 그의 속도에 맞추어 달려야 합니다. 충분히 듣지 않은 채 결론을 내리고, 질문하는 사람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아픈 이에게 빨리 괜찮아지라고 재촉합니다. 겉으로 조용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불편한 말을 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이 없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침묵이 신뢰에서 나온 것인지 말해도 소용없다는 체념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고요는 문제를 덮는 침묵이 아닙니다. 시편 130편의 부르짖음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평안은 탄식을 금지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과 질문을 말해도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에서 자랍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빨리 설명하지 않고 들어 주며, 지금 답할 수 없는 것은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필요한 도움을 함께 찾을 때 공동체는 품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불안을 다루지 못하면 자녀의 모든 선택을 긴급한 문제로 만듭니다. 대화는 질문이 아니라 확인과 명령이 되고 자녀가 생각할 침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품에서 배운 평안은 자녀를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기다립니다. 분명한 기준을 말하되 그의 말을 끝까지 듣습니다. 잘못을 바로잡되 존재 전체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모든 결말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할 때 자녀는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 존중받습니다.

교회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사는 답을 가진 사람이지만 모든 순간에 답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끌어내고, 함께 본문을 읽고, 다른 사람이 자기 언어로 생각을 표현할 시간을 줍니다. 침묵을 견딘다는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급한 결론으로 사람의 생각을 닫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성경의 중심을 분명히 정리하되, 과정 속에서 경청과 표현과 책임 있는 질문을 배우게 합니다. 이렇게 고요는 배움의 공간을 넓힙니다.

교회의 의사 결정에도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든 결정을 한 사람의 확신과 속도에 맡기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되었다가 곧 소진됩니다. 다른 이들은 책임의 주체가 아니라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평안한 공동체는 역할을 나누고, 반대 의견을 듣고, 결정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계획이 바뀌면 체면보다 사실을 앞세우고, 잘못되었을 때 책임자를 희생양으로 삼기보다 과정 전체를 돌아봅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검토와 준비는 충실히 합니다.

이런 공동체의 평안은 느림 자체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위급한 상황에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안전이 위협받는 사람을 돕는 일을 미루면서 더 기도해 보자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가 분명한데도 조용함을 유지하자며 피해자의 입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고요는 행동을 포기하는 상태가 아니라 조급함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는 상태입니다. 해야 할 때는 분명히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는 멈추고, 어느 경우에도 사랑과 진실을 잃지 않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의 소망은 유능한 지도자 한 사람, 완벽한 계획, 충분한 자원에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귀하고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소망은 아닙니다. 사람과 제도는 변하고, 계획은 수정되며, 자원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바라는 공동체는 변화 속에서도 정체를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기억하기 때문에 성공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실패를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영원한 소망은 막연한 미래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회의에서 한 사람의 말을 더 듣는 것, 오늘 가정에서 조언하기 전에 질문하는 것, 오늘 맡은 일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오늘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영원까지 하나님을 바란다는 고백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주인으로 대하는 작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개인의 고요가 공동체의 소망이 되려면 간증의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는지 자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흔들리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붙드셨는지 증언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아무 염려도 없다"고 말하기보다 "여전히 두렵지만 품을 떠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직한 간증은 아픈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직 울고 있는 사람도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줍니다.

또한 공동체는 사람에게 실제로 쉴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쉼을 설교하면서 모든 봉사의 빈자리를 죄책감으로 채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충성을 말하면서 한 사람에게 역할이 영구히 고정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책임을 순환하고, 배우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지친 이가 잠시 물러나 돌봄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 쉬는 동안 공동체가 함께 짐을 나누는 구조가 있을 때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이 공허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전을 완전히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간 공동체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실수하고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가 주신 몸으로 귀하게 섬겨야 합니다. 서로가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함께 구원자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얹지 말고, 각자의 은사와 한계를 존중하며, 넘어진 사람을 다시 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부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쉼은 현실에서 달아나는 쉼이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쉼입니다. 곧 아무 책임도 없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바르게 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우리의 소망을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두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안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소망으로 순종하는 몸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줄어들까 두려워 무리한 성과를 요구하지 말고,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모든 것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는 열매가 더디더라도 말씀을 정직하게 가르치고, 약한 이를 돌보고, 질문을 환영하고, 맡은 일을 충실히 이어 가야 합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우상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에 바른 과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 대지의 실천을 제안합니다. 이번 주 한 번의 대화에서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한 가지 일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그의 방식을 존중해 보십시오. 공동체 안에서 지쳐 보이는 사람에게 더 헌신하라고 말하기 전에 쉴 수 있도록 무엇을 도울지 물어보십시오.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이 가장 빨리 성과를 내는가"와 함께 "누구의 목소리가 빠졌는가, 이 과정이 사람을 살리는가"를 질문하십시오. 이렇게 품에서 배운 고요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질서가 됩니다.


맺으며

설교 | 품을 떠나지 않는 고요 (시편 131:1-3) 본문 이미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1편의 시인을 다시 바라봅시다.

그는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눈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살피며,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자기 손에 넣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합니다. 마침내 그는 어머니 품의 젖 뗀 아이처럼 머뭅니다.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서만 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품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도한다고 모든 문제가 오늘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족의 변화가 더디고, 공동체의 앞날이 선명하지 않고, 수고의 결과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다시 높아지고, 눈은 비교하고, 손은 하나님 몫까지 붙들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한 번 듣고 끝나는 교훈이 아니라 매일 돌아와야 할 기도입니다.

혹시 모든 일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당신의 성실함은 귀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기신 몫은 분명히 감당하되,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몫은 돌려드리십시오. 도움을 청하고, 일을 나누고, 쉴 때 쉬십시오. 당신이 멈춘다고 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혹시 응답이 늦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원하는 것을 정직하게 구하십시오. 슬픔을 감추지 말고 깊은 곳에서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나 선물이 늦는 동안에도 품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느끼는 평온의 정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으로도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혹시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을 재촉하고 있음을 깨닫는 분이 있습니까? 먼저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우십시오. 상대를 빨리 바꾸어야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의 말을 들을 자리를 만드십시오. 진리를 흐리지 않되 사랑의 속도를 배우십시오. 말해야 할 때 분명히 말하고 기다려야 할 때 함께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런 품을 닮기를 바랍니다. 아픈 질문을 해도 밀려나지 않고, 실수한 사람이 회개하고 다시 배울 수 있고, 지친 이가 쉬어도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불안이 모두의 속도를 결정하지 않고, 여러 지체가 책임을 나누고, 성과보다 진실과 사랑을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끝납니다. '언젠가 형편이 좋아지면'이 아닙니다. 지금부터입니다. 문제가 모두 풀린 다음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오늘부터입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진 뒤가 아니라 소란한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데려오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품을 떠나지 마십시오. 울어도 품에서 우십시오. 질문해도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십시오. 해야 할 일은 성실히 하되 결말을 우상처럼 움켜쥐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재촉하기 전에 자기 영혼을 고요하게 하십시오. 선물보다 주님을 바라보고, 성과보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십시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 배우며 그분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십시오.

우리의 마음과 눈과 손이 제자리를 찾을 때 영혼은 비로소 품을 알아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이 아니라, 맡겨진 일을 사랑으로 감당하면서도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고요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체념이 아니라, 모든 소망을 여호와께 두는 평온입니다. 이 고요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그 평안으로 숨 쉬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지 않게 하소서.
맡기지 않으신 일까지 붙들고 주인 행세하지 않게 하소서.
해야 할 일에는 충실하고 할 수 없는 일은 주께 맡기게 하소서.
제 영혼을 고요하게 하시고
원하는 것을 즉시 얻지 못해도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아멘.


함께 나눌 질문

첫째 질문. 지금 내가 "이것만은 반드시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이름 붙여 말씀드린다면 어떤 문장이 될까요?

둘째 질문. 시편 131편 1절의 마음·눈·손 가운데 요즘 내게 가장 분주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겠습니까?

셋째 질문. 우리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내가 누군가를 재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번 주 한 번의 대화에서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