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나눔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본문 이미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갈망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더 인정받고 싶고, 더 가지고 싶고, 더 편하고 싶다. 기도하다가도 "이런 것을 구해도 되나" 하고 멈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믿음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죄지을 일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예수님은 갈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복되다고 하신다. 문제는 갈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주리고 무엇에 목마르냐다. 이 글은 이 한 절을 붙들고,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의 교사 클레멘스가 사람의 갈망을 어떻게 나누어 보았는지를 따라가 보려 한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자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그린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광야의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라고 노래한다. 이사야는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고 외치고, 예수님은 명절 마지막 날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부르신다.

이 말씀들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것이 있다. 사람은 목마른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목마름 자체를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목마름이 없는 사람, 스스로 배부른 사람이 더 위태롭다. 마태복음 5장 6절의 "배부를 것임이요"는 주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약속이다. 갈망을 없애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갈망하는 사람이 채워진다.

그러면 바른 갈망과 그른 갈망은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 한 고대 교사의 도움을 받고 싶다.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본문 이미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흔들리지 않는 사람"

클레멘스(약 150-215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신자들을 가르친 교사였다. 『권고』, 『교사』, 『스트로마타』 같은 책을 남겼고,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라는 설교 한 편도 전해진다. 그는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던 철학의 말로 복음을 풀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 철학에서 온 "아파테이아"라는 말이다.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말 때문에 클레멘스는 오랫동안 오해를 받았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가르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글에는 완전한 사람이 영혼의 모든 동요에서 자유롭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클레멘스가 좋은 감정과 선한 갈망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보았다고 평가해 왔다.

그런데 근래 체코의 한 연구자(Veronika Černušková, 2012)가 바로 이 마태복음 5장 6절을 클레멘스가 어떻게 읽었는지 추적하면서 다른 그림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클레멘스는 갈망을 없애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갈망을 여러 층으로 나누었고, 낮은 갈망에서 높은 갈망으로 자라 가는 길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논문이 정리한 갈망의 층은 넷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본문 이미지

첫째 갈망,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

가장 아래에 있는 것은 자기중심의 욕심이다. 클레멘스는 이것을 열째 계명과 연결해 읽었다고 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열 가지 계명 가운데 유일하게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계명이다.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은 손으로 짓지만 탐심은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완성된다.

야고보서는 이 과정을 정확하게 그린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욕심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죄의 어머니다. 클레멘스가 이 갈망을 아담의 타락과 함께 놓고 읽은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이 갈망의 특징은 근시안이라는 데 있다. 지금, 여기, 내 손에 들어오는 것만 본다.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가지고 나면 곧 또 다른 것이 보인다.

이 갈망에 대해서는 성경도 클레멘스도 분명하다. 떠나야 한다. 다듬어 쓸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갈망을 버리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층이고, 그 말은 이 층에 한해서 옳다.

둘째와 셋째 갈망, 상을 바라는 마음과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

그 위에 두 번째 갈망이 있다. 자기의 참된 유익을 바라는 마음이다. 구원받고 싶고, 천국에 가고 싶고, 하나님께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여기에 든다. 클레멘스는 이것을 죄라고 하지 않았다. 건강한 갈망이다. 다만 아직 어리다고 보았다. 논문에 따르면 클레멘스는 팔복의 약속 가운데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같은 약속은 자주 인용하면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배부를 것임이요" 같은 받는 복의 약속은 드물게 인용했다고 한다. 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거기에 깔려 있다.

세 번째가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망이다. 상이 아니라 의 자체를, 선물이 아니라 주시는 분 자체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편 73편이 이 마음을 가장 잘 노래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는 마음이다. 바울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고 한 것도 같은 갈망이다. 클레멘스는 이런 고결한 갈망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썼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자. 내 기도의 대부분은 어느 층에 있는가. 첫째 층의 기도를 둘째 층의 말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층에서 오래 머물며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은가. 셋째 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는 고백을 조금씩 내 말로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본문 이미지

넷째 갈망,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

그런데 클레멘스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네 번째 갈망을 두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아예 아닌 갈망,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다. 논문은 이 갈망이 정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러니까 클레멘스가 말한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갈망이라고 정리한다.

클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 마지막 장(42장)에서 사도 요한에 관한 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이것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전해 내려온 기록이라고 덧붙인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돌아와 에베소 부근의 교회들을 돌보던 때, 한 도시에서 기백 있는 젊은이를 보고 그곳 감독에게 "이 사람을 교회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삼아 그대에게 맡긴다"고 했다. 감독은 그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으나 그 뒤로는 돌봄을 늦추었다. 젊은이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 결국 산적 떼의 두목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요한이 다시 그 도시에 와서 감독에게 "내가 맡긴 것을 돌려달라"고 했다. 감독은 울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노년의 요한은 옷을 찢고 말을 가져오라 하여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갔다. 산적들의 초소에 붙잡히자 "바로 이 일 때문에 왔다. 너희 두목에게 데려가라"고 했다. 무장한 채 기다리던 두목은 요한을 알아보고는 부끄러워 달아났다. 요한은 나이를 잊고 뒤쫓으며 외쳤다. 왜 아버지에게서 도망하느냐, 나는 무기도 없는 늙은이다, 두려워 말라, 아직 네게 생명의 소망이 있다, 내가 너를 위해 그리스도께 셈을 치르겠다, 필요하다면 네 죽음을 내가 대신 지겠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다. 젊은이는 멈춰 서서 무기를 던지고 떨며 울었다. 요한은 그를 안고 교회로 데려와 함께 기도하고 함께 금식하며 그가 회복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클레멘스가 이 이야기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본보기로 전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요한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늙은 몸으로 산을 달렸다. 자기 갈망이 비워진 자리에 남의 영혼을 향한 갈망이 들어찬 것이다.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 | 마태복음 5장 6절과 클레멘스가 본 네 가지 갈망 본문 이미지

이 네 번째 갈망은 성경에 낯설지 않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뒤에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기도했다. 바울은 동족을 두고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 썼다. 두 사람 다 자기 구원이 아니라 남의 구원을 갈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신(눅 15:20)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요한이 산길을 달린 것은 그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사랑은 갈망의 끝이 아니라 갈망의 집

클레멘스가 말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그러니까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스트로마타』 6권에서 그는 한 반론을 소개한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대답을 풀어 옮기면, 사랑은 갈망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친밀함이라는 것이다. 사랑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밖에서 서성이며 갈망하지 않는다. 갈망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갈망이 집에 도착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목마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목마름을 채우신다. 그리고 채워진 사람은 비로소 자기 그릇을 넘어 다른 사람의 목마름을 보기 시작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초대는 이렇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계 22:17). 자신이 와서 마신 사람이 이제 "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름을 붙여 보는 것이다. 요즘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바람을 하나 적고, 그것이 네 층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솔직하게 표시해 보라. 첫째 층이라면 버릴 일이고, 둘째 층이라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자라게 할 일이다. 갈망은 끊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이다.

둘째, 기도의 끝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한 사람만 붙이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라고 첫째로 권했다. 내 필요를 구하는 기도 끝에 "그리고 그 사람도"라는 한 줄을 더하는 것, 그것이 넷째 갈망을 연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이다.

셋째, 돌봄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요한의 이야기에서 가장 아픈 대목은 감독이 세례를 준 뒤 "돌봄을 늦추었다"는 한 줄이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표를 받았으니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우리 곁에도 교회에 등록했으니, 세례를 받았으니, 직분을 맡았으니 이제 괜찮을 것이라고 여겨 손을 놓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오늘 한 번 더 안부를 묻는 것이 요한이 말을 달린 그 길의 첫걸음이다.

주님, 제 안의 갈망을 없애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라게 하옵소서. 남의 것을 탐내던 마음이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제 복을 구하던 기도가 다른 이의 영혼을 구하는 기도로 자라게 하옵소서. 주 밖에 사모할 이 없는 사람으로, 그래서 한 사람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볼 질문

요즘 내 기도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바람은 네 가지 갈망 가운데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버려야 합니까, 자라게 해야 합니까?

"세례를 받았으니, 직분을 맡았으니 이제 괜찮겠지"라고 여기며 돌봄을 늦춘 사람이 있습니까? 이번 주에 그에게 어떤 안부를 전하겠습니까?

참고 자료

성경: 개역개정 마 5:6, 시 42:1-2, 시 63:1, 시 73:25, 사 55:1, 요 6:35, 요 7:37, 출 20:17, 약 1:14-15, 빌 3:12, 출 32:31-32, 롬 9:3, 눅 15:20, 계 22:17, 딤전 2: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Quis dives salvetur) 42장. William Wilson 영역(ANF vol. 2, earlychristianwritings.com)을 읽고 요약했습니다. 요한의 외침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영역을 풀어 옮긴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6권 9장. ANF 영역을 읽고 요약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과 비평본 절 번호는 대조하지 않았습니다.

Veronika Černušková, "Blahoslavená touha: Čtvrté blahoslavenství u Klementa z Alexandrie," Studia theologica 14(4), 2012, 19-35. 갈망의 네 층 구분은 이 논문의 정리를 따랐으며, 체코어 원문을 요약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직접 인용은 하지 않았습니다. 클레멘스가 선한 갈망을 낮게 보았다는 평가는 이 논문이 소개한 Spanneut(2002), Osborn(2005)의 견해입니다.

※ 이 글의 이미지는 AI로 제작한 삽화입니다. 실제 교회 공간이나 특정 장소, 실제 인물을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10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