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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로 마음이 갈릴 때 | 누가복음 10장 마르다를 다시 읽는 토요일 저녁

준비하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

토요일 저녁은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주보가 아직 인쇄기에 걸려 있고, 찬양 악보는 순서가 바뀌었고, 내일 점심 식단은 누가 몇 명 오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화 한 통을 받는 사이에 해야 할 일이 두 개 더 생깁니다. 그런 저녁에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를 읽으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손님을 맞이한 것도, 음식을 준비한 것도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마르다가 칭찬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 이름을 두 번 불리며 책망 아닌 책망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본문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마르다처럼 일하지 말고 마리아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씀으로 읽히면, 봉사하는 사람은 억울해집니다. 그러나 본문을 천천히 읽고 옛 주석가들의 풀이를 함께 놓고 보면, 예수님이 짚으신 것은 일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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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과 주기도 사이에 놓인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2절까지는 짧습니다. 그러나 앞뒤를 보면 누가가 이 이야기를 어디에 두었는지가 보입니다. 바로 앞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으로 맺으셨습니다. 행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바로 뒤 11장 1절에서는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청하고, 주기도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가서 행하라"와 "이렇게 기도하라"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손과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사이에,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장면이 놓인 것입니다. 이 배치만으로도 누가가 봉사를 깎아내리려고 이 이야기를 적은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섬김과 기도 사이에서 듣는 자리가 빠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개역개정은 "준비하는 일"에 각주를 달아 헬라어로는 "봉사하는"이라는 말임을 밝힙니다. 교회에서 흔히 쓰는 "디아코니아", 곧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마르다가 한 일은 세속의 잡일이 아니라 섬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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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짚으신 것은 봉사가 아니었다

옛 주석가들은 이 점에서 거의 한목소리를 냅니다. 볼트에 정리해 둔 열두 종류의 영어 주석을 읽어 보면, 종교개혁자든 청교도든 감리교 쪽이든 마르다의 동기는 칭찬하고, 잘못은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칼뱅은 누가복음 10장 40절을 풀면서 마르다의 환대는 칭찬받을 만하고 실제로 칭찬을 받는다고 먼저 말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짚으신 두 가지 흠을 듭니다. 하나는 활동이 마땅한 한도를 넘어 불필요하게 많은 수고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서 그리스도께서 집에 오신 유익을 스스로 놓친 것입니다. 칼뱅은 예수님이라면 검소한 식사로 충분히 만족하셨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마치 예언자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차리느라 정작 예언자의 말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비유도 씁니다. 이것은 칼뱅 주석 영역본을 제가 요약한 것이고 직접 인용은 아닙니다.

매튜 헨리는 같은 절에서 더 짧게 가릅니다. 돌봄은 선한 것이고 의무이지만, 그 돌봄에 마음이 짓눌려 괴로워하는 것은 죄이고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봉사가 마음을 집어삼키게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웨슬리와 아담 클라크는 40절의 "분주한지라"에 쓰인 헬라어 낱말을 풀이합니다. 이 낱말은 원래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끌려가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돌볼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클라크는 여기에 한마디를 보탭니다. 마르다의 불안은 주님과 제자들을 알맞게 대접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인색함이나 세속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다를 두둔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주석가들은 마르다의 말투를 봅니다. 마르다는 동생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가서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하고 따졌습니다. 펄핏 주석은 이 장면을 사랑스럽지만 분주한 안주인의 작은 질투가 터져 나온 순간으로 읽습니다. 매튜 풀도 마르다의 두 번째 흠을 동생이 돕지 않는다고 불쾌해하며 주님께 동생을 보내 달라고 청한 데서 찾습니다. 분주함이 마음을 갈라놓으면, 그 갈라진 틈으로 먼저 나오는 것이 가까운 사람을 향한 원망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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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개역개정은 여기에도 각주를 달아, 최근 헬라어 본문에서는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로 읽힌다고 밝힙니다.

이 "한 가지"를 무엇으로 읽느냐를 두고 주석가들이 갈립니다. 한쪽은 아주 소박하게 읽습니다. 요리 한 접시면 충분하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클라크가 이 풀이를 지지합니다. 다른 쪽은 그것을 너무 낮은 뜻이라고 물립니다. 칼뱅은 이 풀이를 빈약하다고 하면서, 신자가 무엇을 하든 모든 행동이 향해야 할 한 가지 목표가 있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마르다의 잘못은 집안일 자체가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 주된 일이 되도록 순서를 뒤바꾼 데 있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이 한 가지 말고는 다 무가치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덧붙입니다.

저는 두 읽기가 서로 배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접시로 족하다는 읽기와 한 목표로 족하다는 읽기는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준비는 적어도 되고, 마음은 하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저녁의 교회로 옮겨 보면, 식단을 한 가지 줄이는 일과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또 하나 갈리는 점은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높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칼뱅은 여기에 비교는 없다고 못 박습니다. 이 본문이 활동하는 삶보다 묵상하는 삶이 높다는 주장에 왜곡되어 쓰여 온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반면 제이미슨과 포셋과 브라운의 주석은 두 가지 좋은 섬김 가운데 더 나은 쪽을 택한 것이라고 읽으면서도, 마리아로만 가득한 교회는 마르다로만 가득한 교회만큼 해로울지 모르며 둘 다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고 씁니다. 케임브리지 주석도 예수님의 부드러운 꾸짖음이 환대의 활동이 아니라 거기 따라붙은 안달과 부산함, 그리고 다른 종류의 탁월함을 비난하고 간섭하는 태도를 겨눈다고 읽습니다. 서로 다른 주석이 한곳에서 만납니다. 앉아 있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보다 높다는 결론은 본문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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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 보여 주는 마르다의 다른 얼굴

누가복음만 읽으면 마르다는 분주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마르다를 다르게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적습니다. 세 사람 가운데 마르다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을 마중 나간 사람도 마르다였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하고 고백한 사람도 마르다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견줄 만한 고백이 이 분주했던 여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더 눈여겨볼 곳은 요한복음 12장 2절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뒤 베다니에서 잔치가 열립니다. 본문은 "마르다는 일을 하고"라고 짧게 적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들은 말씀 때문에 일을 그만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책망이 없습니다. 같은 집, 같은 손님, 같은 일인데 이번에는 염려와 원망의 말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이 자리에서 향유를 붓고, 마르다는 상을 차리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자리에서 한 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누가복음 10장의 가장 좋은 주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원하신 것은 일을 놓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마음이 갈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분주함이 사람을 헐뜯게 할 때

목회 현장에서 이 본문을 읽을 때 저는 마르다의 일보다 마르다의 말에 오래 머뭅니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에는 세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일을 혼자 떠안았다고 느끼는 나, 앉아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생,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척하시는 것 같은 주님. 분주함이 깊어지면 사람은 이 세 방향으로 동시에 끌려갑니다. 나는 억울하고, 동료는 얄밉고, 하나님은 무심해 보입니다.

교회의 봉사는 언제나 사람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일을 맡고, 그 사람의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끌려가고, 어느 순간 그 입에서 "저 사람은 왜 안 하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대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마르다에게서 본 것은, 말이 맞느냐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였습니다. 그 말은 발치에 앉아 본 적 없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들을 자리를 먼저 놓친 사람이 남의 자리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이 다시 들립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베드로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씁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말은 일을 주께 떠넘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은 손에 두되, 일이 마음을 찢어 놓지 못하게 마음을 먼저 주께 두라는 말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옳았습니다. 다만 그는 청을 들고 갔지 자기 마음을 들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발치에 앉는 시간을 먼저 정하기

적용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일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바로잡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봉사 일정표를 짜기 전에 말씀 듣는 시간을 먼저 적어 넣는 것입니다. 토요일 저녁이든 주일 새벽이든, 준비가 다 끝난 뒤에 남는 시간으로 성경을 읽으려 하면 그 시간은 거의 오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자리는 남는 시간에 생기지 않았습니다. 먼저 택한 자리였습니다.

둘째, 준비를 한 가지 줄여 보는 것입니다. 클라크가 읽은 대로 한 접시로 족하다면, 식단 한 가지, 행사 순서 한 가지, 꾸밈 한 가지를 빼는 것은 신앙의 후퇴가 아닙니다. 손님이 예수님이라면 검소한 상으로 충분하다는 칼뱅의 말을 기억할 만합니다. 줄인 그 자리에 들을 여유가 들어옵니다.

셋째, "저 사람은 왜"라는 말이 입에 올라올 때 그것을 신호로 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동료의 게으름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 전에, 내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때는 동료를 찾아가기 전에 발치에 먼저 앉는 것이 순서입니다.

넷째,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앉을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동생에게 바란 것은 자기 옆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씀 앞에 앉아 있다면, 그것을 봉사의 결손으로 세지 않는 눈이 공동체에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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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일하는 마르다를 사랑하신 주님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장면은 대개 꾸짖음보다 안타까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마르다를 주님이 사랑하셨다고 적고, 다시 일하는 마르다를 아무 말 없이 지나갑니다. 일하는 사람을 주님이 책망하신 적은 없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하신 것은 일하느라 들을 자리를 잃고, 그 상실이 원망으로 새어 나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주말, 준비하는 일이 많은 분이라면 한 가지만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몇 분이라도 먼저 앉는 것입니다. 그 몇 분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하는 일은, 같은 일이어도 더 이상 마음을 갈라놓지 못할 것입니다.


참고 자료

· 성경 본문: 개역개정 누가복음 10:25-42, 11:1-4, 요한복음 11:1-27, 12:1-3, 빌립보서 4:6-7, 베드로전서 5:7 (대한성서공회 사이트로 대조). 눅 10:40 "준비하는 일"과 10:42 "한 가지만이라도"의 각주는 개역개정 본문 각주를 따랐습니다.

· 주석 풀이: 칼뱅 복음서 주석, 매튜 헨리 주석, 존 길 주석, 매튜 풀 주석, 웨슬리 성경 주해, 아담 클라크 주석, 바른즈 주해, 케임브리지 학교·대학 성경, 제이미슨·포셋·브라운 주석, 펄핏 주석의 누가복음 10:38-42 해설(영어 공개 텍스트). 이 글의 주석 내용은 모두 요약이며 쪽수가 확정되지 않아 직접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 이 글의 이미지는 AI로 제작한 삽화입니다. 실제 교회 공간을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10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