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마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면 성도들의 얼굴은 대개 둘로 갈린다.
한쪽은 불안하다. 성경 밖에 또 다른 예수 이야기가 있다니, 우리가 믿어 온 것이 흔들리는 건 아닌가 걱정한다. 다른 쪽은 묘한 기대를 품는다. 교회가 감추어 온 진짜 이야기가 따로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다. 유튜브와 인터넷은 이 두 마음을 쉽게 키운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런 질문 앞에서 입을 다물거나 "이단 문서니 볼 필요 없다"는 말로 끝내곤 했다.
이 글은 도마복음을 옹호하거나 깎아내리려는 글이 아니다. 지금 확인되는 사실을 정리하고, 정경을 읽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려는 글이다. 계기는 오늘 밤을 지나 내일 열리는 한 학술 모임의 질문이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여는 제7회 성서학 콜로키움이 10월 12일(월)에 시작한다. 큰 제목은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고, 첫 강의가 "도마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그함마디 문헌에 대한 이해의 틀에서"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유태엽 교수가 맡는다. 이어서 19일에는 한신대 종교와과학센터 이현주 박사가, 11월 2일에는 더럼대학교 스튜어트 윅스 교수가 강의한다. 줌으로 진행하는 저녁 강의다. 나는 이 강의를 아직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은 강의 내용을 전하는 글이 아니라, 공지가 던진 질문을 붙잡고 쓴 글이다.

도마복음은 무엇인가

사실부터 정리해 보자. 1945년 12월 이집트 나그함마디 부근에서 땅에 묻혀 있던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안에는 콥트어로 쓴 파피루스 코덱스가 들어 있었고, 쉰두 편 안팎의 문헌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흔히 '나그함마디 문서'라고 부르는 자료다. 도마복음은 그 가운데 코덱스 II에 실린 문헌이고, 지금까지 알려진 온전한 본문이 여기에 있다. 이 코덱스는 4세기 중엽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한다.
도마복음은 우리가 아는 복음서와 모양이 다르다. 예수의 탄생과 사역과 수난을 이야기로 엮은 글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114개를 모은 어록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이야기의 줄거리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정경의 복음서들과 같은 종류의 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스어 단편도 있다.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나온 파피루스 세 점(P.Oxy. 1, 654, 655)에 도마복음의 일부가 그리스어로 남아 있다. 나그함마디 발견 뒤에야 이 단편들이 같은 문헌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기록 연대는 2세기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더 이른 시기를 주장하는 학자도, 더 늦은 시기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영지주의 문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넓은 초기 기독교 전승의 일부로 볼 것인가도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지는 주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 문서를 다룰 때 지켜야 할 첫 번째 정직이다.
공지는 이 문헌들이 이집트에 자리 잡은 초기 기독교의 독특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소개한다. 초기 교회는 지역마다 환경이 달랐고, 그에 따라 여러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도마복음은 그 다양성의 한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많은 기록 가운데서 교회가 한 일

누가복음은 시작부터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예수에 관한 기록과 전승이 여럿이었다는 말이다. 누가는 그 가운데 하나를 쓰면서,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써 보낸다고 밝힌다(눅 1:3). 초대교회는 진공 속에서 성경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정경이 어떻게 모양을 갖추었는지도 한 번의 회의나 결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이정표를 말하자면, 367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타나시우스가 부활절 서신(제39서신)에서 오늘 우리가 쓰는 27권과 같은 신약 목록을 제시했다. 이것이 정확히 그 27권을 밝힌 가장 이른 사례로 평가된다. 다만 이 서신은 그가 관할하던 교회들에게 보낸 글이었고, 모든 교회를 즉시 구속하는 결정은 아니었다. 이후 393년 히포와 397년 카르타고에서 북아프리카 교회들이 비슷한 목록을 확인했다. 이 회의들도 지역 회의였고, 많은 학자는 이것을 새 규칙을 만든 사건이라기보다 이미 퍼져 있던 합의를 확인한 일로 본다.
정리하면 이렇다. 정경은 다른 목소리가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여러 목소리가 있었고, 교회가 오랜 시간 예배와 가르침과 삶 속에서 어떤 글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언하는지 분별한 끝에 받아들인 결과다. 그러니 외경이나 나그함마디 문헌을 차분히 공부하는 일은 신앙을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경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더 또렷하게 보여 줄 수 있다.

정경이 가운데 놓은 것

정경의 복음서들이 이야기를 굳이 이야기로 전하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자신이 쓴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복음서가 쓰인 목적은 지혜로운 문장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누구인지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경의 복음서들은 예수의 말씀만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좋은 말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고난받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다. 도마복음 앞에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이 글은 그리스도를 어떤 모습으로 증언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바울의 말을 가볍게 옮겨서는 안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 구절을 정경 논쟁의 직접 증거로 쓰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성경'은 당시 교회가 읽던 성경, 곧 구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정경의 범위가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다. 말씀이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확신, 그 확신은 질문을 피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실제로 사람을 세우는 경험에서 나왔다.
겟세마네와 전도서, 같은 질문으로 모이다

두 번째 강의 소개에는 겟세마네가 나온다. 공지에 따르면 이현주 박사의 강의는 제2성전기 유대교 지혜전승 속의 인간 이해를 통해 마태복음을 새롭게 읽으며,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긴장 속에서 마태가 그린 '의로운 인간'을 살핀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나의 뜻"과 "아버지의 뜻" 사이에 선 예수의 기도를 통해 마태 공동체가 이해한 의로운 사람의 의미를 묻는다.
본문은 이렇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두 번째로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성경이 그리는 의인은 혼자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한계 앞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앞에서 본 정경의 중심, 곧 십자가로 가는 그리스도와 맞닿아 있다.
11월 2일 윅스 교수의 전도서 강의 소개는 또 다른 각도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공지는 오늘날 학문적으로 더 이상 인정받지 않는 오래된 해석이 관습으로 자리 잡아 여전히 반복되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더 강한 증거를 내도 더 높은 입증의 부담을 진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전도서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를 우리가 어떻게 읽고 사용하는가의 문제와 이어진다고 덧붙인다.
세 강의가 한 줄로 묶인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을 두고 우리가 익숙하게 품은 생각을 읽고 있는가. 이 질문은 도마복음 같은 낯선 문서를 만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래 읽어 온 본문일수록 우리는 그 본문을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성도가 물어 올 때
목회자에게 이 질문은 서재에 머물지 않는다. 성도들은 교회 밖에서 이미 수많은 해석과 주장을 듣고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금지가 아니라 차분한 안내다. 이런 정도의 대답이면 어떨까.
"그런 문서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배경에서 발견되었고 이런 모양의 글입니다. 교회는 오랜 시간 이런 이유로 지금의 성경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같이 찾아봅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한 말이 떠오른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먼저 헤아리라고 한다. 피하라고 하기 전에 헤아리라고 한다. 베뢰아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간절한 마음과 상고하는 태도가 함께 있다. 질문하는 일과 믿는 일이 서로 적이 아니다.
교회에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이런 것이다. 아래는 강의 내용이 아니라 내 제안이다. 성경공부 한 회기를 정경이 어떻게 모였는지에 쓰고, 그 자리에서 성도들이 인터넷에서 들은 질문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본다. 답을 아는 질문은 답하고, 모르는 질문은 함께 공부할 숙제로 남긴다. 목회자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찾는 사람이 될 때 성도는 오히려 더 편하게 묻는다.
한 가지 더, 이 일에 자료를 고를 때는 한쪽 주장만 담은 영상이나 글보다 학계에서 널리 읽히는 입문서와 대학 출판물을 먼저 권하는 편이 좋다. 어떤 책을 권할지는 교회 형편에 맞게 정하면 된다.
질문이 끝까지 가면
정경에 대한 신뢰는 다른 책을 덮어 두어야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볼 때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이번 가을, 우리 교회의 성경공부가 "무엇이 맞는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함께 묻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한 사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정경이 이야기의 한가운데 놓은 분이다.
함께 읽기
말씀 앞에서 다시 겸손해지기 | 기독교학술원 '바른 성경이해' 포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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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성경번역 사례 | 초벌 번역보다 공동체 검토, 지역 교회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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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제7회 성서학 콜로키움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공지 (nics.or.kr/seminar/post/8247)
아타나시우스 부활절 서신 제39서신(367년) 및 신약 정경 형성 관련 일반 개설
나그함마디 문헌과 도마복음 관련 일반 개설
개역개정 성경 (대한성서공회)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11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