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탁에서 나오는 질문
아이의 질문은 예고 없이 옵니다. 공과 시간에 준비한 내용을 다 마치고 정리하려는 순간, 저녁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든 채로, 불을 끄고 나오려는 잠자리 머리맡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세요?" "기도했는데 왜 안 들어주세요?" "할머니는 지금 뭐 하고 계세요?"
그 순간 어른은 두 가지 마음 사이에 놓입니다. 하나는 제대로 답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틀린 말을 할까 봐, 혹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이야기하자"로 넘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글은 그 두 마음 사이에 서 있는 교회학교 교사와 신앙 부모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정답 목록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받았을 때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도 되는지, 그 순서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성경은 아이의 질문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구약을 읽다 보면 같은 구절이 되풀이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 하거든."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출 12:26-27). 장자를 구별하는 규례에도 같은 말이 붙습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출 13:14). 신명기 6장은 쉐마 바로 뒤에 이 장면을 둡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신 6:20-21). 요단을 건넌 뒤 열두 돌을 세울 때도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수 4:6).

여기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 성경은 아이가 질문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질문이 나오지 않게 막는 교육이 아니라, 질문이 나올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두는 교육입니다. 유월절 식탁의 낯선 음식, 강가에 쌓아 둔 돌무더기가 다 아이의 입에서 "이게 뭐예요?"가 나오게 하는 장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전통을 지금도 지킵니다. 유월절 저녁 식사에서 가장 어린 아이가 "오늘 밤은 왜 다른 밤과 다른가요?"라고 묻는 것으로 출애굽 이야기가 시작되고, 미쉬나는 아이가 스스로 묻지 못하면 아버지가 질문하는 법부터 가르치라고 합니다(미쉬나 페사힘 10:4). 질문이 없으면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대답의 형식이 정의가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규례가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모세는 규례의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이 돌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요단 물이 끊어졌단다"로 답합니다. 우리가 겪은 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들려주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답의 첫 번째 모양입니다.
질문 뒤에 있는 마음부터 듣기
아이의 질문은 겉으로는 정보를 묻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천국은 어디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그 아이가 알고 싶은 것은 천국의 위치가 아닐 것입니다. 할머니가 지금 괜찮은지, 나는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는지가 그 질문 안에 있습니다. 뉴스에서 전쟁 장면을 본 아이가 "하나님은 뭐 하고 계세요?"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신학 토론이 아니라 무서움과 안타까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좋은 첫 반응은 답이 아니라 되묻기입니다. "그 생각이 언제 들었어?" "어떤 마음이 들어서 물어본 거야?" 이렇게 한 번 되물으면 아이는 자기 질문을 조금 더 풀어서 말하게 되고, 어른은 무엇에 답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5-26)고 되물으십니다. 욥이 하나님께 쏟아 낸 질문에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질문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질문을 받은 이가 질문으로 되돌려 주는 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묻는 사람을 대화 안으로 더 깊이 초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되묻기 전에 한마디를 먼저 두면 좋습니다. "좋은 질문이다." 이 한마디가 아이에게 알려 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집에서 이런 질문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은 이유
교사와 부모가 아이의 질문 앞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말하지 못해서 생기는 손해가 더 큽니다. 미국 풀러신학교 청소년연구소가 청소년부 졸업생 약 500명을 몇 해에 걸쳐 추적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 고등학생의 70% 이상이 신앙에 대해 진지한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고 답했지만, 그 가운데 절반이 안 되는 학생만 어른이나 친구에게 그 의심을 털어놓았습니다.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의심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생보다 신앙이 더 성숙한 쪽으로 자랐다는 것입니다. 연구를 이끈 카라 파월은 이 결과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신앙에 독이 되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침묵이다." 그리고 어른이 아이의 질문을 막으면 아이는 교회와 가정이 질문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배울 뿐 아니라, 하나님도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배운다고 덧붙입니다.
성경 자체가 모르는 영역을 남겨 둡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전 13:12)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어른이 "그건 나도 다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정직하게 보여 주는 일입니다.
다만 "모르겠어"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파월이 제안하는 표현을 빌리면 "좋은 질문이야. 나도 다 모르겠는데, 그래도 내가 아는 건 이거야"가 됩니다.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하고, 아는 부분과 믿는 부분은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왜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셨어요?"라는 물음에 "그건 나도 다 설명 못 해. 그런데 하나님이 네 기도를 못 들으신 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리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자주 나오는 질문 셋과 대답의 실마리
아이들의 질문은 대개 몇 갈래로 모입니다. 그중 자주 듣게 되는 세 가지를 놓고, 어디서 출발하면 좋을지 실마리만 적어 봅니다. 완성된 답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세요?" 이 질문은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믿느냐는 물음입니다. 시편 139편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시 139:7-8). 어린아이에게는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거기 계셔. 그래서 너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을 쓸 때는 비행기를 타면 만날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자라면서 알도록 조금씩 보태 주면 됩니다.
"기도했는데 왜 안 들어주세요?" 이 질문에는 먼저 무엇을 기도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들어주신다"는 말의 뜻을 함께 넓혀 가는 것이 과제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지만 그 잔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아이 눈높이로 들려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망한 마음을 먼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안 들어주신 것 같아서 속상했구나"가 신학 설명보다 앞에 와야 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돼요?" 이 질문은 가족이나 반려동물의 죽음을 겪은 뒤에 자주 나옵니다. 아이가 알고 싶은 것은 교리의 세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안전한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는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죽음 뒤를 혼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짧게 말해 주고, 나머지는 아이가 다시 물어볼 때까지 기다려도 됩니다. 한 번에 다 말하려고 하면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정보가 쏟아집니다.
교사와 부모가 해 볼 수 있는 작은 습관

공과 시간 마지막 5분을 질문 시간으로 비워 두십시오. 준비한 내용을 다 못 마쳐도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교사가 먼저 "선생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게 궁금했어"라고 자기 질문을 꺼내면 아이들이 묻는 법을 배웁니다. 미쉬나가 말한 대로, 묻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묻는 법부터 가르치는 것입니다.
반에 질문 공책을 하나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 자리에서 답하지 못한 질문을 적어 두고 다음 주에 다시 꺼냅니다. "지난주에 네가 물어본 것 생각해 봤어"라는 말은 아이에게 자기 질문이 어른에게 한 주 내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어떤 답보다 강한 메시지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교회에서 한 질문을 전달받을 통로를 만들어 두면 좋습니다. 교사가 "오늘 이런 질문이 나왔어요"라고 짧게 알려 주면 집에서 그 대화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집에서 나온 질문을 교사에게 알려 주어도 됩니다. 신명기 6장이 그리는 교육은 가정과 공동체가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들려주는 교육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른 자신이 묻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멈춘 어른은 아이의 질문을 반기기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걸리는 구절을 그냥 넘기지 말고 적어 두십시오. 아이에게 "나도 요즘 이게 궁금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아이에게는 가장 안전한 대화 상대입니다.
맺으며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고 썼습니다.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온유함을 붙여 둔 것이 눈에 띕니다. 대답의 내용만큼 대답하는 태도가 묻는 사람에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어른에게서 배우는 것은 답의 문장보다 그 답을 건네던 얼굴과 목소리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질문은 신앙이 흔들리는 신호가 아니라 신앙이 자기 것이 되어 가는 신호입니다. 그 질문을 받아 주는 어른이 곁에 있을 때, 아이는 하나님이 자기 질문도 받아 주시는 분임을 배웁니다. 다음에 식탁에서, 공과방에서 질문이 나오면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좋은 질문이다. 더 이야기해 줄래?"
※ 이 글의 이미지는 AI로 제작한 삽화입니다. 실제 교회 공간을 촬영한 사진이 아닙니다.
참고 자료
성경 본문(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성경읽기로 대조): 출애굽기 12:26-27, 13:14; 신명기 6:20-25, 29:29; 여호수아 4:6-7, 21-24; 욥기 38:1-4; 시편 139:7-10; 마태복음 26:39; 누가복음 10:25-28; 고린도전서 13:12; 베드로전서 3:15.
미쉬나 페사힘 10:4(Sefaria 영역본): 유월절 저녁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고, 아들이 스스로 묻지 못하면 아버지가 가르친다는 규정. 유월절 하가다의 "네 아들" 단락이 출 12:26, 13:8, 13:14, 신 6:20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Encyclopaedia Judaica의 "Haggadah, Passover" 항목(E. D. Goldschmidt, 1978)을 요약한 2차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Kara Powell, Brad M. Griffin, Cheryl Crawford, Sticky Faith: Youth Worker Edition (Zondervan, 2011)의 연구 결과는 풀러청소년연구소(Fuller Youth Institute) 공식 블로그 글 "I Doubt It"(2014), "Why doubt needs to have a place in your youth ministry this year"(2016), "How to talk to young people about doubt"(2019)에 실린 요약으로 확인했습니다. 책의 쪽수는 확인하지 못해 직접 인용 대신 요약으로 썼습니다. "신앙에 독이 되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침묵이다"라는 문장은 위 블로그 글들에 반복해 나오는 파월의 표현을 옮긴 것입니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10. 11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