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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음과 남겨짐은 다르다 | 예레미야 24장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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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4장의 무화과를 모

티프로 만든 AI 이미지입니다.

손하람 목사 · 신앙칼럼 · 예레미야 24장

사람은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의미를 만들어 낸다. 조직이 흔들린 뒤에도 내 자리가 유지되면 내 판단이 옳았다고 여기고, 누군가 떠난 뒤 내가 남으면 내가 더 충성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익숙한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은 자신이 실패했거나 버림받았다고 단정하기 쉽다. 눈앞의 위치가 곧 사람의 가치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24장의 두 광주리는 그런 계산을 뒤집는다. 땅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끌려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에 비유된다.

이 반전은 고난을 미화하거나 떠남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붙잡은 자리만으로 은혜의 방향을 판정하지 말라는 경고다.

남아 있음과 하나님이 남겨 두심은 같은 말이 아니다.

자리는 판결문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은 성전 앞에 놓인 두 광주리였다. 하나에는 좋은 무화과가, 다른 하나에는 먹을 수 없을 만큼 나쁜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사람의 눈에는 이미 결론이 난 듯한 장면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광주리에 대한 해석이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이 좋은 무화과에 비유되고, 예루살렘에 남은 이들은 나쁜 무화과에 비유된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반대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땅과 성전 가까이에 남은 사람이 보호받은 사람처럼 보이고, 타국으로 옮겨진 사람은 역사에서 밀려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비슷한 판정을 내린다. 자리를 지킨 사람을 승자라 하고, 직책을 내려놓은 사람을 실패자라 부른다.

공동체 안에 오래 머문 시간을 곧 성숙의 증거로 여기고,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삶에는 섣불리 원인을 붙인다. 하지만 위치는 상황을 보여 줄 뿐 그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문이 아니다.

머무름이 언제나 순종은 아니며, 떠남이 언제나 불순종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배치만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재단하면 우리는 형편을 읽는 대신 자기 확신을 강화하게 된다.

본문은 “어디에 있는가”보다 “누구의 말씀 아래 있는가”를 먼저 묻게 한다.

살아남은 것과 남겨진 것은 다르다

‘남은 자’라는 말에는 본래 희망의 울림이 있다. 큰 흔들림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사람,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씨앗 같은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24장은 단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이름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연과 능력과 계산으로 자리를 보존한 상태와, 은혜로 보존되어 다시 부름받은 상태는 겉으로 비슷해도 중심이 다르다.

전자는 자신이 버텨 냈다는 자부심으로 기울기 쉽고, 후자는 자신이 붙들렸다는 감사에서 시작한다.

이 차이는 공동체가 위기를 지난 뒤 특히 중요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빈자리를 보며 자신을 공로자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끝까지 지켰다”는 말은 수고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표현일 수 있지만, 떠난 사람을 낮추고 남은 사람의 권리를 키우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때 공동체는 은혜의 증인이 아니라 생존자의 소유물이 된다.

반대로 남겨졌다고 믿는 사람은 자리를 특권보다 사명으로 받는다. 자신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다시 섬길 기회를 받았다고 여기기에, 떠난 이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새로 오는 이를 경계 밖에 세우지 않는다.

남은 사람의 첫 질문은 “내 몫이 얼마나 커졌는가”가 아니라 “이 자리를 누구를 위해 지킬 것인가”여야 한다.

좋은 무화과는 우월한 사람이 아니다

본문을 읽으며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좋은 무화과를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들의 표지로 바꾸는 것이다. 예레미야 24장은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공로나 회개를 좋은 판정의 이유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돌보시고,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며,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앞에 놓인다. 좋은 무화과라는 말은 스스로 좋은 성질을 증명했다는 훈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알아보시고 돌보시겠다는 은혜의 선언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장을 “고난을 겪는 사람은 선택받았다”는 공식으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포로 생활 자체가 좋은 것이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상실을 겪는 사람에게 더 큰 뜻이 있으니 감사하라고 서둘러 요구하는 것은 그의 아픔을 설명의 재료로 삼는 일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곧 버림받음의 증거는 아니라는 데까지다.

하나님은 익숙한 기반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사람을 알아보시며, 실패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관계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고통의 이유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이 돌보심의 바깥은 아니라고 믿는 것, 그것이 값싼 낙관과 다른 소망이다.

요구하신 마음을 먼저 주신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지식을 많이 쌓는 일이 아니다. 앞선 장은 가난하고 궁핍한 이의 사정을 바르게 살피는 일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한다.

앎은 머릿속 정보에 머물지 않고 이웃을 대하는 정의와 자비로 드러난다. 그런데 24장에서는 결정적인 주어가 바뀐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요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요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요구에 응답할 능력까지 선물로 주어진다.

이 약속은 회개를 의지력의 경연으로 만들지 않게 한다. 우리는 마음을 고쳐 먹으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마음은 명령 한마디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오래된 두려움과 욕망, 체면과 자기보호는 결심보다 깊다. 그래서 변화는 더 세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데서만 오지 않는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숨기지 않고, 도움을 받아들이며, 작은 순종을 반복하는 동안 주어진 마음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 은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붙드시는 손이 있기에 돌아설 수 있고, 돌아선 사람은 정의와 돌봄이라는 열매로 그 선물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교회도 사람에게 헌신을 요구하기 전에 그가 응답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책임을 맡기면서 배울 시간을 주고,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시 시작할 길도 열어 두며, 지친 사람에게 충성을 증명하라고 다그치기보다 쉴 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기준 없는 친절은 사람을 세우지 못하지만, 공급 없는 요구도 사람을 메마르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마음을 친히 주신다는 약속은 우리의 돌봄에도 순서를 가르친다.

먼저 알아보고, 필요한 것을 건네고, 그다음 함께 걸어야 한다.

심는 일이 마지막에 남는다

예레미야의 소명에는 뽑고 무너뜨리는 일과 세우고 심는 일이 함께 놓여 있다. 24장에서는 그 동사들이 회복의 방향으로 다시 나타난다.

하나님은 포로 된 이들을 세우고 심으며, 헐거나 뽑지 않겠다고 하신다. 심판의 언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마지막 목적은 아니다.

무너짐을 정직하게 통과한 자리에서 다시 세우고 심는 약속이 들린다. 이 순서를 바꾸면 회복은 현실을 부정하는 장식이 되고, 마지막 약속을 잊으면 심판은 절망만 남긴다.

우리의 회복도 대개 심는 일과 닮았다. 씨앗은 당장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땅속의 변화는 한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새 출발을 선언하는 것보다 작은 질서를 오래 지키는 편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듣는 회의, 수고를 특정인에게 몰아주지 않는 역할 배분, 실수의 원인과 대책을 함께 기록하는 습관, 떠난 사람을 소문으로 소비하지 않는 절제가 그런 심음이다.

회복은 과거의 규모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이 심으신다는 약속을 믿는 사람은 열매를 재촉하지 않지만 오늘 심어야 할 씨앗을 미루지도 않는다.

결론 — 붙든 자리보다 붙드시는 손을 보라

예레미야의 두 광주리는 우리의 빠른 분류를 멈추게 한다. 남아 있다고 자동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밀려났다고 버림받은 것도 아니다.

좋은 판정은 사람의 우월함에서 나오지 않으며, 고난 자체가 은혜의 증명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알아보시고, 어떤 마음을 주시며, 어디에서 다시 세우고 심으시는가이다.

그 시선 앞에서는 생존을 공로로 바꾸는 자랑도, 상실을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는 절망도 설 자리를 잃는다.

오늘 내가 붙들고 있는 자리가 나를 설명해 준다고 믿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로 타인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떠나거나 내려놓은 경험 때문에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고백은 “나는 남았다”가 아니라 “나는 붙들렸다”일지 모른다.

그 고백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리를 소유하지 않고 섬기게 하며, 낯선 자리에서도 다시 뿌리내릴 용기를 준다.

남아 있음보다 깊은 은혜는 남겨 주심이고, 익숙한 땅보다 든든한 기반은 우리를 먼저 알아보시는 하나님의 손이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8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