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칼럼 · 예레미야 18장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실패보다 그다음 손길을 보라
02 경고는 문이 닫혔다는 소리가 아니다
03 가장 위험한 말은 ‘소용없다’이다
04 다시 빚음은 원상 복구가 아니다
05 손에 맡긴다는 것
06 결론 — 오늘은 아직 빚어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실패를 발견하면 너무 빨리 결론부터 내린다. 한 번 어긋난 관계, 되풀이된 습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역을 보며 “이제는 틀렸다”고 말한다. 반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덮어 두면서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절망과 낙관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오늘 해야 할 응답을 미룬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예레미야 18장의 토기장이 이야기는 이 두 태도 사이에 선다. 그릇은 실제로 터졌지만 아직 진흙이고, 토기장이의 손은 그 진흙을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희망은 값싼 위로가 아니며 경고도 닫힌 판결이 아니다. 아직 굳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을 진지하게 만드는 은혜다.
01
실패보다 그다음 손길을 보라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 일하는 모습을 본다. 여기서 예언자가 먼저 한 일은 설명이나 행동이 아니라 관찰이었다. 녹로 위의 그릇이 망가졌을 때 토기장이는 흙을 내던지지 않고 다른 그릇으로 빚는다. 본문은 그릇이 왜 터졌는지를 길게 해명하지 않는다.
진흙의 결함인지, 작업 과정의 문제인지 원인을 단정하는 대신 그다음에 토기장이가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준다. 실패의 원인을 정직하게 살피는 일은 필요하지만, 원인만 붙들고 있으면 사람은 죄책감이나 비난 속에 갇히기 쉽다. 신앙은 실패를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실패가 마지막 말을 하게 두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소망의 근거는 진흙의 잠재력이 아니다. 스스로 모양을 회복하는 흙은 없다. 근거는 다시 손을 대는 토기장이에게 있다.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는 물건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은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는 요청을 분명히 놓는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선언은 운명을 체념하라는 통보가 아니라, 지금 응답할 수 있다는 부름이다.
은혜는 책임을 없애는 면허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도록 다시 열어 주신 시간이다. 우리가 붙들 것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도, “조금 지나면 저절로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다시 빚으시는 손 앞에 머무르며 바뀌어야 할 모양을 내어 드리는 일이다.
02
경고는 문이 닫혔다는 소리가 아니다
경고를 들으면 우리는 먼저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예레미야 18장의 흐름에서 경고는 아직 결과가 굳지 않았다는 신호다. 본문은 돌이킴에 따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이 달라지는 원리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변덕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악을 악이라 부르고 돌이킴을 기뻐하시는 한결같은 성품이 실제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고는 상대를 겁주어 복종시키는 말이 아니라, 파국을 피하도록 현실을 미리 밝혀 주는 말이어야 한다.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도 이 차이는 중요하다. 잘못을 말하면서 이미 사람을 포기했다면 그 말은 회복의 권면이 아니라 낙인이 된다. 반대로 사랑을 내세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굳어 가는 시간을 방치하게 된다. 바른 권면에는 두 문장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이 길은 잘못되었다”는 진실과 “그러므로 지금 돌이킬 수 있다”는 초대다. 둘 중 하나만 남으면 진실은 차가워지고 사랑은 흐려진다. 경고를 건네는 사람 역시 자신이 토기장이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모양을 마음대로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앞에 함께 서서 변화의 가능성을 지켜 주는 이웃이다.
03
가장 위험한 말은 ‘소용없다’이다
백성의 대답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권면을 듣고도 자기 계획대로 가겠다고 결정한다. 그 밑바닥에는 “소용없다”는 체념이 놓여 있다. 체념은 겸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태도 같고,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처럼 들린다. 그러나 돌이킬 길이 열려 있는데도 소용없다고 말하면 체념은 곧 거절이 된다. 변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익숙한 욕망과 습관을 그대로 지킬 명분을 얻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소용없다”는 말도 여러 옷을 입는다. 이미 여러 번 시도했다는 경험, 조직은 원래 그렇다는 냉소, 저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평가,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다는 자조가 그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라 해도 미래 전체를 확정할 권한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회개는 거대한 감정이나 완벽한 계획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잘못된 방향을 인정하고, 멈추고, 가능한 한 걸음을 반대로 떼는 데서 시작된다. 사과해야 할 말을 미루지 않고, 감추던 일을 빛으로 가져오며, 반복되는 구조를 혼자 견디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작은 행동이 진흙을 부드럽게 한다. 돌이킴은 과거를 없애는 마술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을 바꾸는 순종이다.
04
다시 빚음은 원상 복구가 아니다

토기장이는 터진 그릇을 처음 설계와 똑같이 복제하지 않고 다른 그릇으로 만든다. 이 대목은 회복을 과거로 돌아가는 일로만 생각하는 습관을 고쳐 준다. 관계가 회복되어도 이전과 같은 거리와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실패한 사역을 다시 세울 때도 예전 규모를 복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닐 수 있다. 어떤 상처 뒤에는 더 분명한 경계가 필요하고, 어떤 중단 뒤에는 역할을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 새로 빚어진다는 것은 잃은 것을 모두 되찾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손상된 재료까지도 새로운 순종의 형태 안에 놓일 수 있다는 소망이다.
그러므로 회복을 성공담으로 서둘러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젖은 진흙은 쉽게 눌리고 흔들린다. 변화가 시작된 사람에게 빠른 증명을 요구하면 그는 다시 체면을 위한 모양을 만들기 쉽다. 공동체가 할 일은 극적인 간증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습관이 자리 잡을 시간을 내어 주는 것이다.
약속을 작게 하고 지키도록 돕고, 넘어졌을 때 처음부터 다시 살피며, 필요한 책임과 보호 장치를 함께 세워야 한다. 기다림은 무책임한 방임이 아니다. 토기장이의 손길을 대신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진흙이 굳어 버리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적극적인 인내다.
05
손에 맡긴다는 것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고백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 손으로 나와 타인의 최종 형태를 결정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실수 하나로 사람의 이름을 정하고, 성과 하나로 사역의 가치를 판정하며, 짧은 장면만 보고 공동체의 미래를 결론짓는다.
때로는 자신을 고치겠다는 열심조차 자기 통제가 되어, 계획대로 변하지 않는 자신을 더 거칠게 다룬다. 그러나 진흙은 자신을 빚지 못하고, 관찰자는 토기장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맡김은 그래서 구체적이다. 말씀 앞에서 변명하지 않는 것, 잘못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 변화의 속도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모두 맡김의 모습이다. 동시에 타인에게는 회개의 열매를 요구하되 그의 인생 전체를 단정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책임과 소망을 함께 붙든다. 책임만 강조해 사람을 굳게 만들지도 않고, 소망만 말해 잘못을 흐리지도 않는다. 손에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모양을 관철하는 대신, 진실한 돌이킴을 통해 어떤 새 모양이 나타날지 기다리는 믿음이다.
06
결론 — 오늘은 아직 빚어지는 시간이다

예레미야의 토기장이 비유는 “언제나 괜찮다”는 위로도, “이미 끝났다”는 협박도 아니다. 터진 것은 터진 것이며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은 오늘 주어진다. 하지만 토기장이의 손이 진흙을 놓지 않았기에 실패가 곧 폐기 판정은 아니다. 이 긴장을 잃지 않을 때 회개는 공포가 아니라 선물이 되고, 권면은 정죄가 아니라 문을 열어 두는 사랑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왜 나는 이런 모양인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어떤 부분을 다시 빚어 주시도록 내어 드릴 것인가”까지 나아가야 한다. 미뤄 둔 사과 한마디, 끊어야 할 작은 습관, 도움을 청할 정직한 고백, 다시 세워야 할 약속 하나가 오늘의 응답일 수 있다. 내일의 완성된 모습을 미리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오늘 굳어 버리지 않으면 된다. 아직 빚어지는 중이라는 사실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다른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다.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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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