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칼럼 · 예레미야 23장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맡은 사람은 주인이 아니다
02 위로와 면죄부를 구별해야 한다
03 분별의 기준은 화려함보다 방향이다
04 단정하는 습관에서 묻는 태도로
05 결론 — 먼저 내 말을 말씀 앞에 세우기
우리는 말이 모자란 시대보다 말이 넘치는 시대를 산다. 누군가는 단정적인 어조로 미래를 설명하고, 누군가는 복잡한 사건을 한 문장으로 재단한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은 자주 쓰인다.
그 말은 지친 사람에게 방향을 줄 수 있지만, 잘못 사용되면 질문을 막고 타인의 양심을 누르는 무거운 도구가 된다. 목소리가 크고 문장이 매끄럽다고 해서 그 말의 근원까지 바른 것은 아니다. 신앙의 언어가 익숙할수록 우리는 말의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과 공동체 안에 무엇을 남기는지 살펴야 한다.
예레미야 23장은 바로 이 어려운 분별을 다룬다. 이 장은 흩어 놓는 목자들을 꾸짖고, 하나님이 친히 양 떼를 모으시며 의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긴 논쟁의 중심에는 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본문은 모든 위로를 의심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개를 지운 채 평안만 보증하는 말을 경계한다. 참된 위로와 값싼 안심을 가르는 일은 말의 강도가 아니라 그 말이 이끄는 방향을 보는 데서 시작된다.
01
맡은 사람은 주인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먼저 겨누는 대상은 양 떼를 돌보지 않고 흩어 버린 목자들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기억할 사실은 양 떼가 목자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이다. 지도자는 사람을 맡았을 뿐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돌봄의 자리는 자기 영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될 수 없다. 맡겨진 이의 두려움을 키워 충성을 얻거나, 공동체를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하게 만들거나, 불편한 목소리를 밀어내는 순간 목자의 자리는 주인의 자리로 변질된다.
이 원리는 목회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사람, 작은 모임을 이끄는 사람, 한 사람의 고민을 듣고 조언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경계가 필요하다. 책임이 커질수록 말할 권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의 논리는 반대에 가깝다.
책임이 커질수록 자신의 말이 남길 흔적을 더 세심히 살펴야 한다. 좋은 돌봄은 상대가 나 없이는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도록 돕는 일이다. 권위의 건강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따르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실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02
위로와 면죄부를 구별해야 한다
거짓된 말은 대개 거친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말은 듣기 좋은 평안을 약속했다. 문제는 평안 자체가 아니다. 같은 장에는 참된 왕 아래에서 백성이 안전히 살 것이라는 약속도 있다.
문제는 돌이킴을 거부하는 이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말해 주는 데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을 품는 위로와 잘못을 덮어 주는 면죄부는 서로 닮아 보이지만 목적지가 다르다. 위로는 사람이 진실을 견디며 다시 걸을 힘을 주고, 면죄부는 진실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인다.
교회가 따뜻함을 잃어서는 안 되지만, 따뜻함을 갈등 회피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잘못을 말할 때에는 정죄의 쾌감을 경계해야 하고, 위로할 때에는 책임을 지워 버리는 편리함을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 괜찮은지, 무엇은 바로잡아야 하는지 천천히 물어야 한다.
반대로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상대를 낙인찍는 대신 돌아올 길을 함께 보여 주어야 한다. 참된 말씀은 상처를 헤집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치유를 위해 필요한 진실을 피하지도 않는다.
이 구별은 말하는 내용만큼 말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충고가 필요한 순간에도 먼저 충분히 듣고, 상대가 실제로 겪은 일과 내가 추측한 일을 나누어야 한다. 성급한 위로는 고통을 빨리 끝내려는 화자의 조바심일 수 있고, 성급한 책망은 복잡한 사정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편의일 수 있다.
기다려 주고 다시 묻는 시간은 결론을 늦추지만 사람을 지킨다. 진실한 돌봄은 정답을 서둘러 건네기보다, 상대가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곁을 내어 주는 일이다.
03
분별의 기준은 화려함보다 방향이다

예레미야 23장이 제시하는 대조 가운데 가장 실제적인 것은 말의 열매다. 거짓된 말은 사람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게 하고, 참된 말은 돌이키도록 이끈다. 말한 사람이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특별한 표현을 쓰는지는 듣는 이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말이 교만을 키우는지 겸손을 낳는지, 책임을 흐리는지 정직한 행동을 부르는지는 시간이 지나며 드러난다. 정확해 보이는 예측이나 강렬한 감동만으로 진실을 판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말을 심사하는 데만 쓰여서는 안 된다. 내가 전한 조언과 설교와 글도 같은 질문 앞에 놓아야 한다. 이 말은 상대가 자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감당할 몫을 보게 하는가. 말한 나를 높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더 정직하게 찾게 하는가.
즉각적인 박수와 오래 남는 유익은 같지 않다. 때로는 달콤한 말이 공동체를 오래 병들게 하고, 처음에는 불편했던 한 문장이 관계를 살리는 전환점이 된다. 열매를 본다는 것은 반응이 좋았는지를 세는 일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였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빠르게 퍼지는 말일수록 이 점검은 더 필요하다. 짧은 문장과 인상적인 장면은 맥락을 떼어 낸 채 공유되기 쉽고, 반복되는 동안 사실보다 익숙함이 신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신앙적인 표현을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전달하기보다, 원래 문맥이 무엇인지와 누가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분노만 키우거나 특정 대상을 쉽게 멸시하게 만드는 말이라면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전달하지 않는 선택 역시 공동체의 언어를 돌보는 책임 있는 행동이다.
04
단정하는 습관에서 묻는 태도로

이 장의 마지막에는 경건한 표현조차 조롱과 사칭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날카로운 경고가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붙인다고 말이 더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판단에 하나님의 권위를 덧씌우면 반론과 검토를 막기 쉽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렇게 하실 것이다”라는 문장보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신실할 때가 있다. 이는 확신을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라, 나의 해석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같은 자리에 놓지 말자는 뜻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질문을 불신앙으로 몰지 않는다. 말한 사람도 설명할 책임을 지고, 들은 사람도 분별할 책임을 진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한 사람의 강한 확신보다 말씀의 큰 흐름, 공동체의 지혜, 실제로 맺히는 열매를 함께 살피는 편이 안전하다.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여지를 남기는 것은 무책임이 아니라 정직일 수 있다. “확인 필요”라고 말할 줄 아는 태도는 권위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근거 없는 확언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고, 진실이 들어올 자리를 남긴다.
질문하는 태도에는 시간도 포함된다. 모든 사안에 즉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적어 보고, 결정으로 영향을 받을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중에 결과를 다시 검토할 약속을 세울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분별은 한 번의 선언이 아니라 책임지는 과정이 된다. 틀렸음을 알았을 때 설명하고 고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지도자의 권위는 무오류의 인상보다 신뢰할 만한 정직 위에 서게 된다. 공동체도 침묵으로 동의하는 집단이 아니라 함께 진리를 배우는 몸이 된다.
05
결론 — 먼저 내 말을 말씀 앞에 세우기
예레미야의 경고를 읽으며 가장 쉬운 반응은 오늘의 거짓말쟁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의 귀뿐 아니라 입도 심판대 앞에 세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때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확신을 건넨다.
그러므로 분별은 남을 의심하는 기술이기 전에 내 말의 출처와 목적과 열매를 돌아보는 훈련이어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않았는지, 상대의 회복보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는지 물어야 한다.
참된 말은 사람을 말한 이에게 붙들어 두지 않는다. 맡은 이를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보내고, 값싼 평안 대신 진실한 회복을 향하게 하며, 닫힌 마음을 깨뜨리되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말의 무게는 단호한 어조나 종교적인 수식어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 말이 책임 있는 돌이킴을 낳고, 두려움에 눌린 사람을 바른 안전으로 이끌며, 공동체를 더 정직하게 만드는 데서 드러난다. 오늘 우리가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춰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말이 나의 권위를 세우는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진실의 길을 여는가.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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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