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칼럼 · 예레미야 24장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눈에 보이는 자리는 최종 판결문이 아니다
02 좋은 무화과라는 이름은 공로의 훈장이 아니다
03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상실 뒤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04 뽑힌 시간에도 심으시는 손은 일하고 있다
05 공동체는 상실한 사람을 결과로만 부르지 말아야 한다
06 결론
우리는 자리를 잃으면 사랑도 잃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익숙한 역할에서 물러나거나 오래 붙들던 계획이 무너지면, 눈앞의 상실을 자기 존재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받아들인다. 남아 있는 사람은 선택받았고 떠난 사람은 밀려났다는 식의 해석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삶의 장소와 형편이 하나님의 마음을 곧바로 보여 주는 성적표가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24장의 두 무화과 광주리는 이 익숙한 해석을 뒤집는다. 나라의 중심에 남은 이들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이 좋은 무화과에 비유된다. 그러나 이 장은 고난을 미화하지도, 포로 된 이들이 남은 이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중심은 그들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돌아보시고, 다시 세우고 심으시며,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있다.
상실의 장면보다 더 깊은 곳에서 다른 판정이 시작된다.
01
눈에 보이는 자리는 최종 판결문이 아니다
사람은 위치로 의미를 읽는다. 조직 안에 남으면 인정받은 것 같고, 밖으로 밀려나면 실패한 것 같다. 일이 순조로우면 바른 길이라 여기고, 길이 막히면 선택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판단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 자리를 잃는 일은 실제로 아프고, 권한과 관계와 일상의 리듬까지 함께 흔들기 때문이다. 신앙은 그 아픔을 없는 일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위치가 곧 하나님의 최종 시선은 아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사실은 안전의 보증이 아니었고, 낯선 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도 버림의 증거가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붙들었을 법한 지리적 우열을 본문은 단숨에 해체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누구의 말씀을 듣고 어느 방향으로 서느냐였다.
그래서 형편을 해석할 때에는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문이 닫혔다고 해서 내 삶 전체에 부정표가 붙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리를 지켰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옳았다는 뜻도 아니다.
오늘의 배치는 과정의 한 장면일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붙든 허상을 드러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믿음은 상실을 성공이라고 우기는 태도가 아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다음 문장을 남겨 두는 겸손이다.
02
좋은 무화과라는 이름은 공로의 훈장이 아니다
본문의 반전은 쉽게 새로운 우월감으로 변질될 수 있다. 끌려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라면 그들에게 특별한 자격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공로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보시고 돌보시겠다는 주도권을 앞세운다. 좋은 이름은 스스로 증명해 얻은 훈장보다 은혜로 주어진 새로운 호명에 가깝다.
이 점은 상실을 겪는 사람에게 조용한 위로가 된다. 다시 사랑받기 위해 먼저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완벽한 교훈으로 정리하고, 아픔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정돈된 사람만 알아보시는 분이 아니다. 깨진 그릇이라 불리던 이들의 무리도 다시 좋게 보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직위에 대한 판정과 사람에 대한 돌봄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이 은혜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습관을 멈추게 한다. 우리는 누가 좋은 광주리에 속했고 누가 나쁜 광주리에 속했는지 손쉽게 판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본문의 반전 자체가 인간의 분류표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준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내가 좋은 편이라고 안심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위치만으로 그의 마지막을 단정하지 않는 일이다.
03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상실 뒤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레미야 24장의 가장 깊은 약속은 귀환이나 지위 회복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고,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바깥의 장소가 바뀌는 것보다 안의 방향이 새로워지는 일이 약속의 중심이다. 무너진 삶을 이전 모습 그대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회복이다.
우리는 상실 뒤에 가장 먼저 원상 복귀를 구한다. 잃은 자리를 되찾고, 이전의 평가를 회복하고, 중단된 계획을 다시 움직이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 소망은 정당하다.
다만 모든 것이 전과 같아지는 것만을 회복이라 부르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더 깊은 일을 놓칠 수 있다. 어떤 회복은 사라진 것을 돌려받는 모양보다 무엇을 의지해 왔는지 깨닫고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모양으로 온다.
여기서 인간의 응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신다는 약속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돌아설 수 없는 이에게 돌아설 길을 여시는 은혜다. 주심이 먼저이고 응답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회개조차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성취가 아니라 선물에 대한 응답이 된다. 지친 사람이 다시 기도하고, 굳은 마음으로도 말씀 앞에 머물며, 작은 순종을 시작하는 까닭은 이미 그를 향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04
뽑힌 시간에도 심으시는 손은 일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소명에는 뽑고 무너뜨리는 동사와 세우고 심는 동사가 함께 있었다. 24장에서는 그 가운데 회복의 동사가 다시 들린다. 하나님은 포로들을 세우고 헐지 않으며 심고 뽑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심판이 마지막 말처럼 들리던 책에서 ‘심는다’는 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파괴의 시간이 하나님의 목적 전부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모든 상실을 곧바로 더 큰 성공의 준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고난 그 자체가 복의 증거는 아니며, 잃은 만큼 반드시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계산도 본문의 약속이 아니다. 그런 말은 아픈 사람에게 슬퍼할 시간마저 빼앗는다. 성경의 소망은 손실을 빠르게 보상하는 공식이 아니라, 폐허 속에서도 하나님이 관계를 끊지 않으시고 새 삶을 심으실 수 있다는 신뢰다.
심는 일은 대개 느리고 보이지 않는다. 씨앗은 한동안 흙 아래에 있고, 그 시간만 놓고 보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삶의 회복도 그렇다.
이전보다 정직하게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일, 타인의 실패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일, 작아진 자리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하는 일이 새 뿌리일 수 있다. 박수와 직함은 없지만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습관이 자라고 있다면, 심으시는 손은 이미 일하고 있는 셈이다.
05
공동체는 상실한 사람을 결과로만 부르지 말아야 한다
이 본문은 개인의 위로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언어를 돌아보게 한다. 교회와 조직은 종종 현재의 성과로 사람을 호명한다. 일이 잘될 때에는 필요한 사람이라 부르고, 역할이 끝나면 관심도 함께 거둔다.
그러면 사람은 자리를 잃은 슬픔에 더해 존재가 지워지는 아픔까지 감당해야 한다. 돌봄을 말하면서도 기능을 돌보았을 뿐 사람을 돌보지 않은 셈이다.
예레미야 23장은 양 떼를 돌보지 않고 흩은 목자들을 꾸짖으며, 하나님이 친히 모으시고 다시 목자들을 세우실 것을 말한다. 맡은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돌보는 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공동체는 누군가의 역할이 달라졌을 때에도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서둘러 복귀를 요구하거나 상실을 신앙 훈련이라는 말로 덮지 않고, 슬픔을 말할 자리를 내어 준다. 조언보다 곁을, 평가보다 경청을 먼저 건넨다.
또한 새 자리를 마련할 때에도 과거의 효율만 묻지 않는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뿐 아니라 지금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살핀다. 작은 책임부터 다시 맡을 수 있게 하고, 결과가 더딜 때에도 관계를 거두지 않는다. 공동체가 이렇게 사람을 대할 때 ‘세우고 심는다’는 약속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태도로 번역된다.
06
결론
상실은 분명 상실이다. 익숙한 땅에서 떠나는 일을 가볍게 말할 수 없고, 닫힌 문 앞에서 억지 감사를 요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상실이 곧 버려짐이라는 결론도 서둘러 내릴 필요는 없다.
예레미야 24장의 포로들은 가장 멀리 밀려난 듯 보였지만 하나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알아보시고, 세우고 심으며,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겠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을 행운이라 바꾸어 부르는 낙관이 아니다. 현재의 자리를 최종 판결로 만들지 않는 믿음, 타인의 실패를 그의 존재 가치로 번역하지 않는 절제, 회복을 원상 복귀보다 깊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잃은 직함보다 남아 있는 이름을 기억하고, 사라진 계획보다 새로 자라는 마음을 살피는 일이다.
오늘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라면 모든 의미를 당장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 한 가지는 붙들 수 있다. 자리가 사라져도 관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뽑힌 듯한 시간에도 심으시는 손은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상실은 아픈 현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마지막 이름은 아니다.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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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11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