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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지키는 일이 곧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 창조 시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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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가 「우리의 공동의 집을 돌봄 —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책임 있는 형제적 응답」을 공개했다.

바티칸 뉴스와 OSV 뉴스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이어진 성찰을 모은 이 문서는 교황 레오 14세의 인가를 받아 나왔고, 분량은 2만 9천 단어가 넘는다고 한다. 교리성성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교황에게 보고한 뒤 발표를 인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찬미받으소서」 이후 교회가 말해 온 생태 이야기를, 이번에는 더 또렷한 신학 말로 다시 붙잡은 작업이다.

발표 시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9월 1일 창조 돌봄을 위한 세계 기도일부터 10월 4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축일까지 이어지는 '창조 시즌'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다.


윤리 문제이면서 동시에 신학 문제다

문서가 거듭 말하는 한 줄은 짧다. 생태 문제는 윤리 문제이면서 동시에 신학 문제다. 우리가 창조세계를 다루는 방식이 곧 창조주와의 관계를 드러내고, 그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순서를 뒤집는다. 보통 우리는 신앙을 먼저 정리하고 그 결과로 생활을 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서는 생활 쪽에서 신앙을 읽는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버리는지가 이미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환경 훼손을 두고 표현을 한층 정밀하게 잡자고 제안한다. '생태적 죄'를 넘어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죄'로 부르자는 것이다.

자연을 해치는 일은 이웃,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과 아직 오지 않은 세대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돌봄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죄를 개인 양심에만 가두지 않고, 관계가 틀어진 자리로 읽으려는 시도다.

이름을 바꾸는 일이 왜 중요한가. '생태적 죄'라고 부르면 환경 분야의 문제로 분류되고, 관심 있는 사람이 맡을 일이 된다. 그러나 '창조주에 대한 죄'라고 부르면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되고, 회개의 대상이 된다. 분류가 달라지면 누가 책임지는지도 달라진다.

바티칸 뉴스 요약이 전하듯, 지구의 '찢어지는 울음'은 가난한 이들의 울음과 비극적으로 이어져 있다.

기후 문제를 먼 미래의 일로 두는 사람은
대개 그 피해를 먼저 겪지 않는 자리에 있다.


삼위일체의 흔적에서 안식일의 원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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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흐름도 그 신학을 따른다.

앞부분에서는 공동의 집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 빙겐의 힐데가르트,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빌려, 피조물에 남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말한다. 생태 신학이 최근에 생긴 유행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 안에 이미 있었다는 점을 보이려는 배치로 읽힌다.

이어서 인간의 자리를 다룬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차별로 위계를 세울 자격이 없고, 땅과 사람이 함께 숨 쉬는 안식일 원리를 배워야 한다.

안식일을 창조 돌봄의 원리로 읽는 대목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본문을 다시 보게 한다. 땅도 쉬어야 한다는 규정은 생산성의 예외가 아니라 창조 질서의 일부였다. 쉬지 않고 거두는 방식이 결국 땅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뒷부분에서는 하나님, 자신, 창조, 이웃,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관계 안에서 돌봄의 실천을 제안한다. 약탈적 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고유한 책임을 지워 버리는 극단을 함께 경계한다.

두 극단을 나란히 경계한 것이 눈에 띈다. 한쪽에는 자연을 자원으로만 보는 태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지구의 문제 그 자체로 보는 태도가 있다. 앞의 태도는 착취를 낳지만, 뒤의 태도는 책임을 지울 주체를 없애 버린다. 문서는 인간을 창조의 청지기이자 종으로 보는 길을 가리키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레오 14세가 이어받은 '자리 잡힌 인간중심'이라는 표현이 그 길의 이름이다.

성찬을 '생태의 학교'로 부르는 대목은, 예배가 세상을 다루는 태도를 훈련하는 자리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성찬이 생태의 학교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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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현을 조금 더 풀어 볼 만하다.

성찬상에 올라오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물건이 아니다. 땅에서 자란 곡식과 포도다. 누군가 심고 거두고 빻고 구운 것이며, 그 과정에는 흙과 비와 사람의 노동이 들어 있다. 우리는 매번 그것을 받아 들고 감사를 드린다.

그러니 성찬은 이미 창조와 노동과 감사를 한 상에 모아 놓은 자리다. 받은 것을 받은 것으로 알고, 나누어 먹고, 남기지 않는 훈련이 거기서 일어난다.

예배당에서 감사히 받은 것을
문밖에서 함부로 쓰는 일은
한 사람 안에서 오래 버티기 어렵다.

기술과 제도의 해법만으로는 부족하고 문화와 영성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호소도 이 지점과 이어진다. 분리수거 방법을 하나 더 익히는 것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무엇을 넉넉하다고 느끼고 무엇을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그 감각이 바뀌어야 한다.


같은 무렵, 한국 총회의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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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무렵 한국교회도 '총회의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국민일보 2026년 9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예장통합 제111회 총회에서 신임 총회장으로 추대된 권위영 목사가 도림교회 개회예배에서 기후위기와 저출생, 내부 분열을 거대한 영적 위기로 짚었다. 그리고 "생명을 선택하라는 창조 신학적 명령"에 응답하자고 말했다.

세 가지를 나란히 놓은 것이 의미 있다. 기후위기와 저출생과 내부 분열은 보통 다른 부서가 맡는 일로 다뤄진다. 그런데 셋을 하나의 영적 위기로 묶으면 질문이 같아진다. 우리는 생명이 이어지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가.

교파와 예배 전통은 달라도, 창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신앙 고백의 현안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티칸의 긴 문서와 한국 총회의 짧은 한 문장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큰 구호보다 가까운 실천

창조 시즌이 아직 남아 있는 지금, 교회가 할 일은 큰 구호보다 가까운 실천일 수 있다.

소비를 한 번 더 살피고, 땅과 가난한 이웃의 신음을 예배의 기도 제목으로 올리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지 묻는 일이다. 안식일의 숨결을 회복하는 일도 여기에 속한다.

작은 교회에서 이번 주에 해 볼 수 있는 것을 꼽아 보면 이 정도다. 주일 기도문에 땅과 기후를 위한 한 줄을 넣는 것. 교회 행사에서 일회용품을 줄이고 그 이유를 짧게 알리는 것. 교회학교에서 안식일을 생산성의 반대가 아니라 창조 질서로 가르치는 것. 그리고 교회의 결정을 내릴 때 "이것이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기는가"를 한 번 묻는 것.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쌓여야 강단의 말이 믿을 만해진다.

국제신학위원회가 기억시키듯, 창조를 지키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 방식은 강단의 말만이 아니라,
일상의 손과 발에서 드러난다.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2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