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빌립보서 2장 25–30절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복음은 사람을 기능보다 관계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02 믿음은 아픔을 실패의 증거로 단정하지 않고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집니다
03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는 지친 동역자를 존귀히 여기며 다시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0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부터 말하는 데 익숙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교회에서는 어느 부서를 맡았는지, 얼마나 오래 봉사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일이 잘될 때에는 이런 소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꼭 필요하다고 하던 사람이 일을 쉬는 순간 주변의 관심에서도 함께 멀어집니다. 역할을 내려놓았을 뿐인데 존재까지 작아진 것처럼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는 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사람이고, 필요한 것을 전하며 곁에서 섬긴 사람입니다. 먼 길을 감당했고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강한 일꾼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그는 심하게 병들었고 죽음에 가까이 갔습니다. 소식이 고향 교회에 전해졌고,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성도들이 염려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섬기러 갔던 사람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고장 난 일꾼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임무를 다 채우지 못한 사람처럼 평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여러 관계의 이름을 붙입니다.
형제이며 함께 일한 사람이며 함께 싸운 사람이고, 교회가 보낸 사자이며 필요를 채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그런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합니다. 병든 몸은 그의 이름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멈춘 사역도 그의 존엄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본문 앞에서 교회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됩니다. 교회는 힘 있는 사람들만 모여 쉬지 않고 과업을 수행하는 조직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함께 수고하다 지친 사람을 기쁨으로 맞으며, 약해진 몸까지 품는 공동체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크게 말하느냐보다 누가 아플 때 어떻게 대하느냐가 교회의 실제 신학을 보여 줍니다. 은혜는 건강한 사람에게만 주는 훈장이 아닙니다. 은혜는 병들고 지치고 멈춘 사람을 여전히 우리 사람이라고 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복음은 사람을 기능보다 관계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둘째, 믿음은 아픔을 실패의 증거로 단정하지 않고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집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는 지친 동역자를 존귀히 여기며 다시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오래 수고한 분은 정죄가 아니라 위로를 얻고, 누군가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긴 분은 감사의 눈을 회복하며, 우리 공동체 전체가 사람을 소모하지 않고 살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01
복음은 사람을 기능보다 관계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한 단어로 줄이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한 심부름꾼도, 후원금을 전달한 사람도, 필요한 일을 대신한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은 먼저 그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하기 전에 누구와 연결된 사람인지를 밝힙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첫 이름은 사역자가 아니라 형제입니다. 그의 가치는 임무의 완성도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에 있습니다.
형제라는 이름은 감상적인 호칭이 아닙니다. 같은 아버지의 은혜 아래 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도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이고 에바브로디도도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사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교회가 파송한 일꾼이지만, 십자가 아래에서는 둘 다 받은 사람입니다. 이 관계를 잊으면 직분은 서열이 되고 사역은 사람의 값을 정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이름을 먼저 기억하면 직분은 서로를 살리는 섬김이 됩니다.
이어지는 이름은 함께 일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한 하급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사역은 한 사람의 영웅적 업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은사를 나누어 감당하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보이는 수고와 뒤에서 받치는 수고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길을 떠난 사람, 필요한 것을 준비한 사람과 기다리며 기도한 사람이 함께 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의 서명 아래 완성되는 사업이 아닙니다.
바울은 또 함께 싸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사역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복음을 섬기는 길에는 피로가 있고 오해가 있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싸운다는 말은 동역자를 도구로 전쟁터에 내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우는 서로의 등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발걸음을 늦추고, 상처를 입으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싸움의 명분을 내세워 부상자를 버리는 군대는 이미 싸움의 목적을 잃은 군대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또한 빌립보 교회가 보낸 사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랑을 몸으로 전달하려고 갔습니다. 교회의 마음이 한 사람의 발걸음에 실렸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개인적인 열심인 동시에 공동체가 함께 져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파송은 보내고 잊는 일이 아닙니다. 보낸 사람의 건강과 형편을 살피고, 돌아올 자리를 지키며, 필요하면 계획을 조정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단순한 겸손의 예로만 축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종의 길을 실제로 걸으셨고, 그 객관적인 구원의 은혜가 성도의 겸손을 낳습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께 사랑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복음이 먼저이고 섬김은 그 열매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헌신은 쉽게 자기 구원의 방식이 됩니다. 나는 계속 일해야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쉬면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해야 하나님과 공동체가 나를 인정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역은 기쁨의 응답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시험장이 됩니다.
칭찬을 받으면 잠시 살아나지만, 알아주지 않으면 깊이 무너집니다. 복음은 이런 무거운 장부를 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자기 사람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하기 전에도 사랑받고, 쉬는 동안에도 형제자매이며, 실패한 뒤에도 회개의 길을 가진 사람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추상적인 교리 앞에 세워 두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질문으로 데려갑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내 길에 끌고 오는가, 아니면 그분과 함께 걷는가”라고 묻게 합니다. 오늘 우리도 물어야 합니다.
나는 교회 사람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일을 잘하는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 까다로운 사람, 이제 쓸모가 적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신 사람을 내가 기능으로 축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에서도 사람을 기능으로 부르기 쉽습니다. 배우자를 돈을 벌어 오는 사람이나 집안일을 맡는 사람으로 보고, 부모를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람으로 여기며, 자녀를 기대를 완성하는 사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 기능이 흔들릴 때 관계까지 흔들립니다.
몸이 아파 수입이 줄거나, 나이가 들어 돌봄이 필요하거나, 자녀가 기대와 다른 길을 걸으면 실망이 사랑을 덮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정은 먼저 서로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는 나의 계획을 완성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이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주가 가능한 사람을 반주로만 부르고,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을 운전으로만 기억하며, 교사를 반을 맡아 줄 인원으로만 계산하면 그가 지칠 때 대체 인력만 찾게 됩니다. 물론 역할은 필요하고 책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먼저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 한 순서를 지키는 것보다 한 영혼을 지키는 일이 작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은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소모된 신뢰와 상처 입은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8장은 모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홀로 재판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세의 의도는 선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왔고 그는 성실히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그 방식이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모세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백성도 함께 지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적이 잘못된 구조를 자동으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한 사람에게 모으는 방식은 그 사람을 높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를 소모하고 다른 사람의 성장을 막습니다.
이드로의 해법은 사람을 더 세우고 일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핵심적인 중보와 가르침에 집중하고, 경건과 진실과 청렴을 갖춘 사람들이 책임을 나누게 했습니다. 위임은 책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일을 나누면 한 사람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도자는 자기 영향력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기뻐합니다. 동역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내 자리가 위협받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해지는 은혜입니다.
이 원리는 평신도에게도 동일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는 충성처럼 보이는 두려움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당장 대신할 사람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다음 사람을 가르치고 권한을 나누어야 합니다. 맡은 일을 문서로 남기고, 작은 부분부터 함께 해 보고, 실수를 견디며, 질문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계속 중심에 남는 것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나 없이도 공동체가 말씀 안에서 걸어가도록 돕는 것이 성숙한 섬김입니다.
반대로 일을 맡은 사람이 책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형제라는 이름은 무책임의 면허가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실제로 수고했고 위험을 감당했습니다. 복음은 기능주의를 거절하지만 신실함을 지우지 않습니다.
다만 신실함의 뿌리를 바로 둡니다. 사람의 박수와 자기 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과를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며,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 함께 섬기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가 맡은 일 말고 그 사람 자체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요즘 마음은 어떤지, 몸은 괜찮은지,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무거운지 물어 본 적이 있습니까.
감사할 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일반적인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십시오. 당신이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준 일이 고마웠다고, 보이지 않는 시간에 준비한 것을 알고 있다고, 당신이 일을 못 하는 날에도 여전히 우리 공동체의 귀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복음은 우리를 기능의 감옥에서 꺼내 관계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형제자매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지만, 일과 싸움이 우리의 첫 이름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붙들 때 아픈 동역자를 부담으로 보지 않고 돌아온 가족으로 맞을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그 동역자가 실제로 심각하게 아팠다는 사실 앞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02
믿음은 아픔을 실패의 증거로 단정하지 않고 서로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집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었습니다. 바울은 그 병이 가벼웠다고 꾸미지 않습니다. 죽음에 가까울 만큼 심했다고 전합니다. 복음의 사명을 감당했고 사도 곁에서 섬겼던 사람에게도 병이 찾아왔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충성된 성도도 아플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사람도 치료가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사역 중에 병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시편 103편의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고백을 오늘 당장 모든 질병이 낫는다는 보증서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자체가 디모데와 드로비모와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의 지속되는 연약함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유를 구해야 합니다.
의료적 도움을 받고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낫는 속도로 믿음의 크기를 재거나, 치료가 더딘 사람에게 숨은 죄를 찾아내라고 압박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병이 지금 낫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마지막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병을 신앙의 성적표로 만들면 아픈 사람은 두 번 고통받습니다. 몸이 힘든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왜 믿음으로 이기지 못하느냐는 시선까지 견뎌야 합니다. 통증을 말하면 부정적인 고백을 한다고 책망받고, 쉬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명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아픔을 숨깁니다. 밝은 얼굴로 버티다가 더 깊이 무너집니다. 교회가 치유를 말하면서 정작 아픈 사람이 안전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의 치유 언어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숨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긍휼은 강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이 아닙니다. 약해진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 103편은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신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한한 존재인 척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피곤할 수 있고, 잠이 필요하고, 몸의 한계가 있으며, 상처 뒤에는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창조주께서 아십니다.
이 말씀은 게으름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한함을 핑계로 책임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체념이 아니라 창조주 앞의 겸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며, 내가 멈추어도 하나님 나라가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주님은 일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필요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구원자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이 됩니다. 우리는 충성된 종이지 세상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아프다는 소식을 빌립보 성도들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음 아파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상호 염려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멀리 보낸 사람을 잊지 않았고 그의 소식을 듣고 걱정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도 자기 고통 속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바울 역시 그의 회복과 귀환을 통해 성도들의 근심이 덜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세 방향의 염려가 서로를 향해 흐릅니다. 이것이 몸 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아픈 사람도 남을 걱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부담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배려를 칭찬하되 모든 환자에게 같은 정서적 노동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심하게 아픈 사람은 자기 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듭니다.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환자가 우리 걱정을 덜어 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 없이 치료받고 쉴 수 있도록 안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회복하는 일이 지금의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 번아웃을 막으려면 영성 훈련과 위로가 필요하고, 사역을 단순화하며 상호 돌봄의 구조를 세워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번아웃을 개인의 열정 부족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겸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은 계속 더해지는데 오래된 일은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며, 도움을 요청하면 헌신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구조에서는 누구라도 지칩니다. 개인의 기도만 강조하면서 구조의 무게를 바꾸지 않는 것은 돌봄이 아닙니다.
성장주의의 문제도 같은 지점에 닿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의 종이 아니라 조직의 최고경영자와 콘텐츠 생산자로 평가될 때,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무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평신도 역시 여러 직분을 겸하다 지치면 충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교회가 성장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는 순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지표를 만드는 자원이 됩니다. 더 많은 일, 더 빠른 결과, 더 큰 행사가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면 멈춤은 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주님은 사람을 성과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높임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낮아지심은 단순한 자기 축소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능동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셨고 모든 영광이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끝없는 자기 소모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권한을 내려놓아 다른 사람을 살리고, 약한 지체가 버려지지 않도록 공동체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생과 소모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잠을 줄이고, 교사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며, 성도가 아픈 이웃 곁에 앉는 것은 귀한 희생입니다.
그러나 희생은 자유로운 사랑에서 나오고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며 생명을 향합니다. 소모는 거절할 수 없는 압박에서 나오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며 사람을 다 쓴 뒤 교체합니다. 희생을 칭찬한다는 명목으로 소모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섬겼다는 사실도 조심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의 헌신을 존귀하게 여기지만 모든 사역자가 병들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습니다. 위험을 감당한 사랑은 감사의 대상이지 반복 강요의 근거가 아닙니다.
누군가 한 번 무리해서 빈틈을 메웠다면 다음에는 그 빈틈을 구조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같은 사람의 희생을 당연한 운영 방식으로 만들면 우리는 그의 충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8장의 위임 원리는 여기서 실제적인 지혜가 됩니다. 사역 목록을 펼쳐 놓고 누가 몇 가지를 맡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름은 많지만 실제 일은 몇 사람에게 몰려 있지 않은지, 늘 부탁을 받아 주는 사람에게만 다시 연락하지 않는지, 새 일 하나를 시작할 때 무엇을 끝낼지도 함께 정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책임을 나누는 일은 효율만을 위한 행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몸과 가정과 기도 생활을 보호하는 목회입니다.
교사를 위로할 때에도 거창한 행사보다 개별적인 감사가 분명히 전달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작은 메시지와 직접 건네는 감사가 보이지 않는 수고를 기억하게 하고, 받은 위로가 다시 섬길 힘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중요합니다.
우리는 큰 집회를 준비하면서 정작 그 집회를 위해 늦게까지 정리한 사람의 이름을 모를 수 있습니다. 많은 예산을 행사에 사용하면서 지친 교사가 잠시 쉴 수 있도록 대신 반을 맡을 사람은 준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돌봄은 말의 온도와 함께 일정과 인력과 예산의 모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아픈 가족에게 조언보다 먼저 공간을 주십시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따지기 전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십시오. 병원에 함께 갈지, 식사를 준비할지, 조용히 쉬도록 집안일을 나눌지 구체적으로 확인하십시오.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하지 말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돌봄은 약한 사람의 선택권까지 빼앗는 통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가까이 가되 존엄을 지킵니다.
일터에서도 동료의 한계를 조롱하지 마십시오. 일을 맡길 때 감당 가능한 범위를 묻고, 늘 빠르게 처리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일이 계속 쌓이지 않는지 살피십시오. 휴가 중인 사람에게 관행적으로 연락하고, 아픈 사람의 빈자리를 그의 무책임으로 해석하며, 회복 직후 밀린 일을 한꺼번에 돌려주는 문화는 사람을 다시 아프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과만 정직하게 내는 사람을 넘어, 함께 일하는 사람의 인간다운 리듬을 지켜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분별해야 합니다. 기도는 치료를 대신하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몸의 질병에는 적절한 의료적 진료가 필요하고, 깊은 우울과 불안과 외상에는 전문 상담과 안전한 지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언어로 모든 증상을 단순화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해결하지 못해도 믿을 만한 도움과 연결하고 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치신다는 믿음 때문에 수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 선한 수단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믿으며 책임 있게 행동합니다.
동시에 아픈 사람 자신에게도 말씀드립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공동체를 배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맡은 일을 내려놓아야 할 때에는 가능한 범위에서 상황을 알리고 인계를 돕되, 몸이 무너질 때까지 책임을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첫 이름은 일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그 진리를 충분히 보여 주지 못했다면, 먼저 주님의 긍휼을 붙드십시오.
회복의 모양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고, 어떤 이는 긴 치료와 조정이 필요합니다. 이전과 같은 역할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회복을 오직 과거의 생산성 회복으로 정의하면 사람은 영원히 미완성 환자로 남습니다.
몸의 조건이 달라져도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은혜를 나누는 지체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게 하는 공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체가 연결된 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먼지 됨을 아십니다. 그 사실은 우리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판결이 아니라 긍휼의 문을 여는 진리입니다. 아픔은 우리의 전부가 아니고, 멈춤은 우리의 마지막 이름도 아닙니다.
믿음은 아픔이 없다고 말하는 힘이 아니라 아픔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공동체가 실제로 곁을 내어 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제 바울은 회복되어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를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03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는 지친 동역자를 존귀히 여기며 다시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맞으라고 권합니다. 돌아온 이유를 캐묻고 임무 보고부터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더 오래 버티지 못했느냐고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기쁨으로 맞으라고 합니다. 귀환하는 사람이 공동체의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문을 열고 얼굴을 보고, 살아 돌아온 사실을 감사하며, 그의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돌아온 사람은 쉽게 환영합니다. 좋은 결과와 간증을 가지고 오면 박수칩니다. 그러나 병들어 돌아온 사람, 계획을 마치지 못한 사람, 더 이상 이전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맞을 때 공동체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복음의 환영은 성과에 대한 시상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은혜를 서로에게 보이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주께 돌아왔을 때 제출한 것은 완벽한 실적표가 아니라 빈손이었습니다.
기쁨으로 맞는다는 것은 아픔을 낭만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고 서둘러 의미를 붙이지 마십시오. 고통의 이유를 다 안다고 말하지 말고, 잃어버린 시간과 계획을 애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기쁨은 슬픔을 지우는 밝은 표정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전입니다. 울면서도 함께 있을 수 있고, 회복을 감사하면서도 아직 남은 통증을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참으로 기쁜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도 합니다. 존귀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좋게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과 자리와 자원을 통해 가치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고를 공개적으로 감사하고, 휴식이 필요할 때 실제 일정을 조정하며, 돌아온 뒤에 적절한 역할을 함께 찾는 것입니다. 존중은 추상적인 칭찬이 아니라 상대의 몸과 형편을 고려한 결정으로 나타납니다.
교사를 위로할 때 개인별 감사 메시지를 준비하고 받지 못한 사람에게 다시 전달하는 일은 작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도 누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앞에 서는 사람은 쉽게 기억되지만 보조교사와 새 교사, 결석한 사람은 명단 밖으로 밀릴 수 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한 뒤 끝내지 말고 실제 이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존귀는 큰 역할에 따라 배분되는 명예가 아니라 한 사람도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수고입니다.
우리가 지친 사람을 존귀히 여기려면 성공의 기준도 바꾸어야 합니다. 출석과 건물과 재정만 세는 공동체는 결국 그 지표를 만드는 사람을 소모합니다. 대신 몇 사람이 이름으로 불렸는지, 병상과 장례의 자리를 얼마나 지켰는지, 교회 밖으로 사랑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세느냐가 무엇을 귀히 여기는지를 드러냅니다. 보고서에 행사 횟수만 있고 돌봄의 시간은 없다면,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공동체는 다른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의에서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번 행사가 몇 명을 모았는가만 묻지 말고, 준비 과정에서 누가 과도하게 지쳤는가를 물으십시오. 예산을 얼마나 절감했는가만 묻지 말고, 그 절감이 누구의 무급 노동 위에 세워졌는지 살피십시오.
사역이 빠르게 진행되었는가만 묻지 말고, 새로 참여한 사람이 배우고 질문할 여유가 있었는지 확인하십시오. 효율은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사람을 지우는 순간 우상이 됩니다.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높아지신 분이 바로 낮아지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귀는 세상의 명예 체계를 그대로 복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더 많이 이긴 사람, 더 빠르게 올라간 사람,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높입니다.
십자가의 공동체는 사랑 때문에 자기를 내어 준 사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신실했던 사람, 아픈 중에도 공동체를 품었던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다시 요구하기 위해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짐을 지기 위해 존귀히 여깁니다.
여기에는 지도자의 회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에게 일이 계속 몰리는 것을 알면서도 편해서 방치했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은 늘 잘하니까”라는 칭찬이 사실상 구조적 무관심이었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믿음이 약하다고 말했고, 쉬고 돌아온 사람에게 예전만큼 열심이 없다고 평가했다면 사과해야 합니다. 권위는 잘못을 숨기는 방패가 아니라 먼저 책임지는 섬김입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지도자는 체면보다 사람의 회복을 택합니다.
지친 동역자 자신도 존귀를 성과 보상의 다른 이름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감사를 요구할 수 있고 정당한 돌봄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많이 희생했으니 모든 결정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수고가 권력이 됩니다.
존귀는 한 사람을 우상화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수고를 바르게 인정하고, 모든 은혜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며, 받은 명예를 다시 사랑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존귀히 여기는 실천은 가까운 사람의 수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식사가 저절로 차려지지 않았고, 아이의 일정이 저절로 관리되지 않았으며, 생활비가 저절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생각과 시간과 몸을 사용했습니다.
역할 분담표를 다시 보고 한 사람에게 정신적 부담까지 몰려 있지 않은지 살피십시오. 감사한다고 말한 뒤 같은 부담을 그대로 두지 말고 실제 일을 나누십시오.
교회에서는 쉼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교사와 찬양대원과 봉사자가 일정 기간 쉬어도 미안해하지 않도록 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체자를 미리 세우고, 인수인계 자료를 준비하며, 한 사람이 여러 핵심 역할을 동시에 맡지 않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새 사역을 시작하려면 끝낼 사역을 함께 정하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모든 좋은 일을 다 하는 것이 신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맡기신 핵심에 집중하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쉼 뒤의 복귀도 세심해야 합니다. 곧바로 이전의 전체 책임을 돌려주기보다 당사자와 상의하여 작은 범위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몸의 상태와 가정의 형편을 존중하고, 다시 어려워질 때 말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십시오.
복귀를 시험 기간처럼 만들지 말고 동행의 과정으로 받아들이십시오. 회복은 직선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좋은 날과 힘든 날이 함께 올 수 있음을 알고 판단을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존귀히 여김은 재정과 처우에도 닿습니다. 사역은 거룩하니 보상 없이 견뎌야 한다는 말로 정당한 필요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누군가의 시간과 전문성과 지속적인 노동을 요청한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책임 있게 지원해야 합니다.
자원이 부족할 때에는 솔직히 설명하고 요구하는 일의 양을 줄여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헌신을 더 요구하는 방식이 반복되면 가장 순종적인 사람부터 소진됩니다. 가난한 공동체도 정직한 약속과 공정한 분담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픈 사람을 사역의 대상에만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도 공동체에 은혜를 줄 수 있습니다. 그의 질문이 우리의 속도를 돌아보게 하고, 그의 한계가 서로 의존하는 법을 가르치며, 그의 기도가 앞에서 일하는 사람을 붙들 수 있습니다.
몸 된 교회에는 스스로 충분한 지체가 없습니다. 손은 눈을 대신할 수 없고 눈은 발을 불필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약함과 은사가 연결될 때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귀환은 실패한 후퇴가 아니라 공동체를 다시 배우게 하는 복음의 사건이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그를 맞으며 자신들이 보낸 사람이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였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며 자기 곁의 도움을 내려놓았고, 교회는 그를 받으며 돌봄의 책임을 되찾았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붙잡아 두는 소유가 아니라 필요한 곳으로 보내고 다시 맞는 자유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돌아와야 할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입니까. 너무 오래 쉬어 미안해서 연락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역 중 상처를 받고 조용히 뒤로 물러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병 때문에 예배와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 가족 돌봄으로 이전처럼 봉사할 수 없는 사람, 실패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먼저 연락하되 부담을 주지 마십시오. “언제 다시 일할 수 있습니까”보다 “어떻게 지내십니까”를 먼저 물으십시오. 돌아오면 맡길 일을 말하기 전에 함께 앉을 자리를 내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활발히 섬기는 사람도 미리 돌보십시오. 완전히 쓰러진 뒤에야 관심을 보이는 것은 늦습니다. 표정이 어두워지고 실수가 잦아지며 기쁨이 사라질 때 정죄보다 질문을 건네십시오.
맡은 일을 줄일 수 있는지, 함께할 사람을 붙일 수 있는지, 일정한 쉼이 필요한지 물으십시오. 돌봄은 위기 뒤의 응급조치만이 아니라 위기를 줄이는 일상의 문화입니다.
이 모든 적용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유용해서 형제자매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무력할 때 찾아오셨고, 종의 길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시고 높아지신 주님은 지금도 자기 몸 된 교회를 돌보십니다. 우리의 존귀는 자기가 만든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자기 사람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을 쓸모없다고 버릴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소모품처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귀히 여기는 교회가 됩시다. 앞에 선 사람만이 아니라 뒤에서 준비한 사람을 기억하고, 오래 일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 배우는 사람을 기다리며, 건강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의 자리를 지킵시다. 쉬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고, 일하는 사람에게 모든 짐을 맡기지 않으며, 돌아온 사람을 기쁨으로 맞읍시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가치의 질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하는 질서가 아니라,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짐을 나누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존중받는 질서입니다.
04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었지만 실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형제였고, 함께 일한 사람이었으며, 함께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보낸 사자였고 사랑을 몸으로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병은 그 이름들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돌려보내며 변명서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맞고 존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첫째, 사람을 기능보다 관계의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교회에서 맡은 일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형제자매입니다.
함께 일하되 소유하지 말고, 함께 싸우되 다친 사람을 버리지 말며, 일을 나누어 더 많은 사람을 세우십시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심을 믿으십시오.
둘째, 아픔을 믿음의 실패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충성된 사람도 병들고 지칠 수 있습니다. 치유를 구하되 낫는 속도로 믿음을 평가하지 말고, 전문적인 도움과 실제적인 쉼을 함께 제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의 희생이 반복되는 구조를 고치십시오.
셋째, 지친 동역자를 기쁨으로 맞고 존귀히 여기십시오. 감사는 구체적인 이름과 말과 일정과 예산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사람에게 즉시 일을 묻지 말고 안부를 물으십시오.
쉬는 사람의 자리를 지키고, 복귀의 속도를 함께 정하며, 보이지 않는 수고를 기억하십시오. 존귀히 여김은 희생을 더 받아 내기 위한 칭찬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함께 짐을 지겠다는 약속입니다.
혹시 오늘 에바브로디도처럼 지쳐 있습니까. 몸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우며, 이전처럼 일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작아졌다고 느낍니까.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과보다 먼저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귀한 지체입니다.
필요한 도움을 구하십시오. 잠시 멈추어도 괜찮습니다. 회복의 모양이 이전과 달라도 주님의 은혜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혹시 누군가의 수고를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까. 오늘 한 사람에게 연락하십시오. 역할을 부탁하기 전에 안부를 묻고, 일반적인 칭찬보다 구체적인 감사를 전하십시오.
가능하다면 그의 짐 하나를 실제로 나누십시오. 회의 하나를 줄이고, 일정을 조정하고, 대체자를 세우며, 쉬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작은 결정 하나가 공동체의 신학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완벽한 돌봄 체계를 만드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놓치고, 늦게 알아차리며, 좋은 뜻으로도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밖에서 평가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로 새 생명의 길을 여셨으며,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 자기 백성을 붙드십니다.
그 은혜 가운데 다시 시작합시다. 일을 잘하는 교회를 넘어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 많은 프로그램을 가진 교회를 넘어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교회, 아픔을 숨기게 하는 교회를 넘어 안전하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교회가 됩시다. 강한 사람의 속도에 모두를 맞추지 않고 약한 지체 곁에서 함께 걷는 교회, 희생을 소비하지 않고 감사와 분담으로 응답하는 교회가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픈 동역자를 존귀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아플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존귀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의 구원자가 아니지만 서로를 붙드시는 주님의 손길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짐을 나누고,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는 이를 기쁨으로 맞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모습을 통하여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높아지신 주님의 통치가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일터 가운데 드러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공감과 댓글로 함께 나눠 주세요.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