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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다 거두지 않는 믿음 (신명기 24: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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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신명기 24장 14–22절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하나님은 우리의 권리가 이웃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02 속량받은 기억은 움켜쥔 손을 펴고 남길 줄 아는 사람을 만듭니다

03 다 거두지 않는 교회는 약한 사람이 존엄을 잃지 않고 함께 일어서는 하나님의 밭이 됩니다

04 결론

사랑하는 한신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대개 성실한 사람을 칭찬할 때 “끝까지 다 했다”고 말합니다. 맡은 일을 남김없이 마쳤고,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흘린 것 하나 없이 알뜰하게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빈틈이 없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회사에서는 낭비를 줄이고 수익을 높이라고 합니다.

가정에서는 혹시 모를 내일을 위해 더 단단히 쌓아 두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도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내가 놓친 몫은 없는지, 다른 사람이 내 것을 가져가지는 않는지, 오늘 조금 덜 챙기면 내일 내가 부족해지지는 않는지 살핍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 24장은 아주 이상한 명령을 들려줍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 한 묶음을 잊어버렸다면 다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감람나무를 떤 뒤에는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라고 합니다. 포도원의 포도를 딴 뒤에는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다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수로 남은 것까지 다시 계산하여 회수하지 말고,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을 밭에 남겨 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를 대충 지으라는 말씀도 아니고, 계획 없이 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장에서 품꾼의 삯을 그날 주라고 하십니다. 빚을 주고받을 때도 책임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재판은 공정해야 하고,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 거두지 말라는 명령은 무책임의 허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책임의 방향을 바꾸는 명령입니다. 내 몫을 최대화하는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이 살아갈 자리를 남겨 두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는 밭보다 더 많은 ‘모퉁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에도 모퉁이가 있고, 식탁에도 모퉁이가 있고, 예산에도 모퉁이가 있고, 마음에도 모퉁이가 있습니다. 내 일정표를 빈틈없이 채우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말을 들을 시간이 남지 않습니다. 내 식탁을 익숙한 사람으로만 채우면 낯선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 예산을 우리끼리 편안해지는 일에만 모두 사용하면 지역의 아픔을 향해 내밀 손이 남지 않습니다. 내 판단을 확신으로 가득 채우면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들을 여백이 없어집니다. 다 거두는 삶은 풍성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는 숨 쉴 곳을 잃습니다.

신명기 24장의 명령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감정적인 권고보다 더 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밭 한가운데에 자비의 구조를 심으십니다. 추수하는 사람이 그날 마음이 따뜻하면 조금 주고, 마음이 상하면 주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밭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열려 있도록 하십니다. 소유주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약자의 몫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자비는 순간의 동정심을 넘어 삶의 질서가 되는 자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곧바로 오늘의 특정 제도나 정책 하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세부 정책을 그대로 적어 주는 행정 문서가 아닙니다. 같은 성경 원리를 붙드는 성도들도 현실의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핑계로 본문의 분명한 요구까지 지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약자의 품삯을 미루지 않고, 채무자의 존엄을 짓밟지 않고, 낯선 이와 돌봄 없는 사람을 위해 실제 몫을 남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방법에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방향은 흐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권리가 이웃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둘째, 속량받은 기억은 움켜쥔 손을 펴고 남길 줄 아는 사람을 만듭니다.

셋째, 다 거두지 않는 교회는 약한 사람이 존엄을 잃지 않고 함께 일어서는 하나님의 밭이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더 얻을지만 묻는 사람에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남길지를 묻는 사람으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01

하나님은 우리의 권리가 이웃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신명기 24장을 천천히 읽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일상에 얼마나 가까이 오시는지 놀라게 됩니다. 본문에는 맷돌이 나오고, 빚의 담보가 나오고, 겉옷이 나오고, 품삯이 나오고, 밭과 감람나무와 포도원이 나옵니다. 예배당 안의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무엇을 빌렸는지, 채권자가 어느 선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노동의 대가를 언제 지급해야 하는지, 추수 뒤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거래의 방식과 일의 속도와 약속을 지키는 시간을 보시는 분입니다.

본문 앞부분은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라고 밝힙니다. 맷돌은 단순한 물건 하나가 아닙니다. 날마다 곡식을 갈아 양식을 마련하는 생계의 도구입니다.

빚을 준 사람에게 담보를 받을 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행사한다고 해서 상대가 오늘 먹고살 수단까지 빼앗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채권자의 권리보다 채무자의 생명을 먼저 보게 하십니다. 받을 것이 있어도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담보를 받을 때 상대의 집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밖에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빚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집과 사생활과 인격까지 채권자에게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사람의 존엄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경계가 있고, 선택이 있고, 보호받아야 할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원하는 것을 집어 오는 장면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밖에서 기다리게 하심으로, 힘이 있는 사람의 발걸음에 선을 그으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겉옷을 담보로 내놓았다면 해가 질 때 돌려주라고도 하십니다. 낮에는 옷이고 밤에는 몸을 덮는 이불이 되는 그 한 벌을 밤새 붙잡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담보라고 주장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이 추위 속에 떨게 된다면 돌려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는 차가운 계산을 넘어섭니다.

계약의 문구만 묻지 않고, 이 결정 뒤에 한 사람이 오늘 밤 어떻게 눕게 될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정의에는 체온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따뜻하게 잘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14절과 15절은 품꾼의 삯을 당일에 주고 해가 진 뒤까지 미루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가난하여 그 품삯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고용주는 며칠 늦어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부를 정리할 사정이 있고, 돈이 들어오는 날짜가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품꾼에게 그 하루는 단순한 날짜가 아닙니다. 그날의 양식이고, 기다리는 가족의 필요이며, 내일 다시 일터로 나갈 힘입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작은 지연이 힘없는 사람에게는 생존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품꾼이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렵고도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서류가 복잡하고 관계가 불리하여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 호소도 하나님께 닿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고용주의 찬송과 동시에 지급되지 않은 품삯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체와 미룸을 죄라고 부르십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좋은 마음을 보이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약속한 것을 제때 건네는 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큰 악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로 자신을 쉽게 안심시킵니다. 남의 것을 노골적으로 빼앗지 않았고, 누군가를 거리로 내몰지 않았고,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더 섬세하게 묻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경계를 넘지는 않았습니까?

내게는 편리한 지연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가진 권리와 지위와 정보가 상대의 말할 기회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접 빼앗지 않았어도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늦추거나, 마땅히 존중해야 할 선을 넘는 방식으로 사람을 작게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권위가 있지만 자녀의 마음을 함부로 뒤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가까워도 상대의 모든 생각을 즉시 설명하라고 압박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함께 살았다는 이유로 존중을 생략하면 관계는 메말라 갑니다. 교회에서도 직분과 책임이 있다고 해서 봉사자의 시간과 수고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위한 일이니까”라는 말로 휴식과 가정과 몸의 한계를 빼앗는다면, 거룩한 이름 아래 생계를 위한 맷돌과 밤을 위한 겉옷을 붙잡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도 이 말씀은 구체적입니다. 약속한 대가를 정확하고 제때 지급하는 것, 계약에 쓰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는 것, 상대가 거절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 실수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더라도 인격을 모욕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의 장부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19장이 보여 주듯 거룩은 성소에만 머물지 않고 밭과 시장과 재판과 저울까지 갑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후렴은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판단 앞에 하나님이 서 계심을 일깨웁니다.

이 원리를 오해하여 모든 책임과 계약을 없애자는 말로 만들면 안 됩니다. 본문은 빚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담보와 노동 관계 자체를 없애지 않습니다. 공정함에는 약속을 지키는 일도 포함됩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의 지속 가능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효율과 권리가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계약을 지키되 생명을 파괴하지 말고, 책임을 묻되 존엄을 빼앗지 말고, 질서를 세우되 약한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옳다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옳은 일을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자기 권리를 앞세워 우리를 짓밟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죄인을 멀리하실 정당한 이유가 있으셨지만, 오히려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가난과 연약함을 멀리서 평가하지 않고 몸을 입고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자기 생명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사람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말로 사람을 잃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기억하며, 내 권리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되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제 첫째 대지에서 둘째 대지로 넘어가며 한 가지를 붙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무조건 비우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왜 손을 펴야 하는지 먼저 기억하게 하십니다. 자비는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의 영웅적 행동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였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서 건져 내셨는지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같은 문장을 두 번 되풀이합니다. 애굽에서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02

속량받은 기억은 움켜쥔 손을 펴고 남길 줄 아는 사람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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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나그네와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22절도 추수의 남김을 명령한 뒤 다시 “너는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면서 이스라엘의 과거를 불러오십니다. 너희도 언제나 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언제나 자유인이 아니었고, 언제나 선택권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종이었습니다. 일의 양을 정할 수 없었고, 수고의 열매를 자기 것으로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줄 세상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음성을 들으시고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밭을 얻고 추수하게 된 일은 자기 능력만의 결과가 아닙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자유를 얻었고, 땅 없던 사람이 기업을 받았고, 부르짖던 사람이 소산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손에 든 곡식은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 기억을 잊으면 밭은 쉽게 자기 자랑이 됩니다. “내가 씨를 뿌렸고, 내가 땀을 흘렸고, 내가 위험을 감수했으니 전부 내 것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수고가 실제였다는 것은 맞습니다. 농부의 노동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수고를 가능하게 한 땅과 비와 햇빛과 생명과 공동체의 질서까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자기 절대화를 막습니다. 내가 일했지만 하나님이 주셨고, 내가 거두지만 이 열매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몫도 있다는 고백으로 이끕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머릿속에 정보를 보관하라는 뜻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기억은 현재의 행동을 바꾸는 기억입니다. 애굽을 기억한 사람은 오늘의 나그네를 다르게 봅니다. 과거의 무력함을 기억한 사람은 오늘 힘없는 사람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품삯을 기다리던 심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대가를 미루지 않습니다. 도움을 받아 살아난 사람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억이 손끝에 도달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기억이 됩니다.

신명기 26장은 이 원리를 예배와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자기 조상이 방랑하는 사람이었고, 애굽에서 학대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인도하여 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소산을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눈 일을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구원의 고백과 약자를 위한 나눔이 한 예배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입술로 말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배와 정의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가 은혜를 기억하게 하고, 기억된 은혜가 이웃을 위한 몫을 만듭니다.

우리는 매주 십자가의 복음을 듣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속량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우리가 의를 만들 수 없어서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어 주셨고, 우리가 값을 갚을 수 없어서 주님이 자기 몸을 내어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복음이 단지 죽은 뒤 천국에 가는 표가 되고 오늘의 돈과 시간과 관계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억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제를 통해 구원을 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겨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는 언제나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종이었던 우리를 속량하셨기에 우리는 남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주셨기에 우리는 나눌 수 있습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은 그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 순서가 무너지면 나눔은 자기 의가 되거나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이 됩니다. 내가 도왔으니 감사하라고 요구하고, 내가 주었으니 내 방식에 따르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도 받은 사람임을 알기에 상대를 빚진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는 다 거두고 싶어 합니까? 많은 경우 탐욕만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입니다. 남겨 두면 내가 모자랄까 두렵습니다.

지금 챙기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내가 손해 본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래서 통장도, 일정도, 관계도, 명예도 빈틈없이 붙잡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기억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오직 네 움켜쥔 손이었느냐고 묻습니다. 막힌 길을 여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분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남긴다는 것은 내일을 무시하는 낭비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공급자가 나 자신만이 아니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다 확보해야만 살 수 있다는 공포에 맞서는 순종입니다. 농부는 밭의 모퉁이를 남기면서 하나님이 다음 계절에도 신실하실 것을 믿습니다.

성도는 자기 시간의 일부를 이웃에게 내어 주면서 하나님이 자기 삶을 붙드실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자원의 일부를 바깥의 필요를 위해 열어 두면서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남김은 단지 경제 윤리가 아니라 섭리 신앙입니다.

물론 남김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계획하게 다 주어 가족과 공동체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성경적 사랑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방식이 의존을 강화하거나 위험을 키울 수도 있으므로 잘 살펴야 합니다. 개인정보와 사정을 함부로 퍼뜨리지 않고, 필요한 경우 전문적인 도움과 공적 제도를 연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완벽한 방법을 찾는 동안 오늘 품삯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오늘 밤 덮을 옷이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의 모퉁이를 정할 수 있습니다. 수입을 받으면 남은 돈으로만 돕겠다고 미루지 않고 먼저 나눔의 몫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일정표를 짤 때 예기치 않은 돌봄을 위한 시간을 조금 남길 수 있습니다. 식탁에 한 사람 더 앉을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습니다.

대화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지 않고 상대가 말할 여백을 남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결정을 내릴 때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들만이 아니라 참석하기 어렵고 표현하기 서툰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물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선언보다 이런 구체적인 모퉁이가 사람을 살립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말에 머물지 않고 행동과 선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는다면 몸이 움직이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은혜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내 밭의 모양을 바꾸었습니까? 내 장부와 일정과 식탁에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생겼습니까? 다 거두지 않는 선택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여기서 둘째 대지에서 셋째 대지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남기라고 하신 곡식은 밭에서 썩도록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와서 줍고, 일하고, 먹고, 다시 살아가도록 남겨진 것입니다.

남김은 막연한 선의가 아니라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부르는 문입니다. 그리고 룻기 2장은 이 명령이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열매 맺는지를 보여 줍니다. 율법의 모퉁이가 한 이방 과부에게 생명의 길이 됩니다.


03

다 거두지 않는 교회는 약한 사람이 존엄을 잃지 않고 함께 일어서는 하나님의 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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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장에서 룻은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나갑니다. 그는 낯선 땅에 온 이방 여인이었고, 남편을 잃은 과부였으며, 시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여러 겹의 취약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앉아 누군가의 동정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밭으로 갑니다. 그가 이삭을 주울 수 있었던 것은 신명기와 레위기의 명령이 밭에 자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날 룻의 손에 잡히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농부가 모퉁이를 남길 때 말씀이 곡식이 되었고, 한 과부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울 때 말씀이 식사가 되었습니다. 교리가 구조가 되고, 구조가 생명을 살렸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아름답게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환대를 말한다면 처음 온 사람이 실제로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돌봄을 말한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길이 안전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말한다면 그들이 질문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할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보아스는 율법의 최소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룻이 안전하게 일하도록 보호했고, 물을 마시게 했고, 식탁에 초대했고, 일꾼들에게 곡식을 일부러 더 흘려 주라고 했습니다. 그는 룻을 구경거리나 자기 선행의 증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룻이 자기 손으로 줍고, 일하고, 나오미에게 가져갈 수 있게 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존엄과 능동성을 지켜 주었습니다. 참된 돌봄은 상대를 영원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목소리와 선택과 역할을 되찾도록 곁을 내어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돕는다는 이유로 상대를 작게 만듭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허락 없이 공개하고, 도움을 준 사람의 이름은 크게 남기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의 수치는 오래 남깁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보다 우리가 주고 싶은 것을 줍니다. 빨리 변화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우리의 선의에 감사하는 방식까지 정해 줍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밭은 다릅니다. 안전을 먼저 마련하고,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꾸짖지 말라고 일꾼들에게 명하고, 룻이 일할 공간을 지켜 줍니다. 자비는 상대를 내 이야기의 조연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게 돕는 것입니다.

돌봄과 배려는 단지 마음속의 선한 생각이 아니라 먼저 관심을 갖고 함께 있어 주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회복과 성장을 돕는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이 점은 오늘 교회에 매우 실제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이 귀하지만, 때로는 약속한 시간에 찾아가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힘내세요”라는 말도 귀하지만, 때로는 복잡한 서류를 함께 살피고 필요한 기관을 연결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언제든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문턱이 왜 높은지 점검하고 실제로 들어올 수 있게 바꾸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복지 기관으로만 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의 고유한 중심은 복음의 선포와 예배와 성례와 목양에 있습니다. 사회적 선행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복음 선포가 이웃의 실제 고통에 무관심한 말로 축소되어서도 안 됩니다. 일반은총과 문화명령의 가르침이 강조하듯, 교회는 어떤 정치적 프로젝트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성도들이 각자의 소명에서 정직과 인간 존엄과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형성해야 합니다. 복음의 특수성과 이웃 사랑의 책임을 서로 갈라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회복을 연구한 톰 레이너는 쇠퇴하는 교회가 내부의 편안함과 자기 필요에만 집중하고, 살아나는 교회는 바깥의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원과 태도를 바꾸었다고 관찰합니다. 그의 모든 통계나 사례를 우리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향은 본문과 만납니다. 밭의 모든 것을 안쪽 사람들만을 위해 거두는 공동체는 점점 닫힙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웃을 위해 남기는 교회는 복음의 생명을 몸으로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한신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안의 ‘밭 모퉁이’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예산에 있어야 합니다. 내부의 유지와 필요를 충실히 감당하면서도 지역과 선교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몫이 실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공간에도 있어야 합니다.

익숙한 사람들만 편하게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낯선 사람과 이동이 불편한 사람도 존중받을 길을 살펴야 합니다. 시간에도 있어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빈틈없이 돌리는 데 모든 힘을 써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조차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관계에도 모퉁이가 필요합니다. 친한 사람끼리만 모여 대화가 완성되지 않도록,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자리를 남겨야 합니다. 의견을 나눌 때도 빠르고 익숙한 사람들만 결정하지 않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새로 온 사람이 교회의 언어를 모른다고 무시하지 말고 설명해야 합니다.

실수한 사람이 책임 있게 회개했다면 다시 배울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반대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공동체의 체면을 위해 침묵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자비는 진실을 덮는 일이 아니라 진실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의 직업과 가정도 하나님의 밭입니다. 사업을 하는 성도는 정당한 대가를 제때 주고, 가장 약한 위치의 사람이 안전하게 의견을 말할 통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관리자라면 성과만 아니라 과도한 부담이 누구에게 몰리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소비자라면 지나치게 싼 가격 뒤에 누군가의 부당한 희생이 숨지 않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부모라면 가족 일정에 쉼과 대화의 모퉁이를 남길 수 있습니다. 자녀라면 부모의 돌봄을 당연히 거두어 쓰는 몫처럼 여기지 않고 감사와 섬김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다 거두지 않는다는 것은 무능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망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가져올 수 있지만 가져오지 않고, 말할 수 있지만 상대를 위해 멈추고, 차지할 수 있지만 함께 살기 위해 자리를 내는 것은 약함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 능력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구원하는 힘을 과시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몫까지 거두라고 하지만, 십자가의 질서는 강한 분이 약한 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시는 질서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왔다고 축복했을 때, 놀랍게도 보아스 자신이 그 보호의 통로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룻을 돌보시기를 기도한 뒤 자기 밭의 질서를 바꿉니다. 이것이 기도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려운 사람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시간과 물질과 관계를 그 응답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먹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면 내 식탁의 한 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 외로운 이를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면 내 일정의 모퉁이를 살펴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돌봄을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나 사회봉사 부서만 자비를 담당하고 나머지는 서비스를 받는 구조가 되면 공동체 전체가 성숙하기 어렵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밭의 모퉁이를 남겨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물질을 나누고, 누군가는 시간을 내고, 누군가는 전문 지식을 연결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들어 주고, 누군가는 접근하기 어려운 절차를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은사와 자리를 통해 하나의 넓은 밭을 만드십니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의 한계도 존중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필요를 떠안아 소진되는 것은 건강한 남김이 아닙니다. 밭 모퉁이는 공동체가 함께 만드는 것이지 한 사람의 밭을 끝없이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가능한 책임을 함께 감당하고, 돕는 사람도 쉬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역할을 나누고, 안전 수칙을 세우고, 필요한 전문성을 존중하고, 지속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자비는 감정이 폭발했다가 곧 사라지는 행사가 아니라 추수 때마다 반복되는 질서입니다.

다 거두지 않는 교회는 세상 앞에서 다른 풍경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남김을 실패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남겨진 자리에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은 효율이 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느린 사람과 약한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는 속도를 배웁니다. 세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으로 봅니다. 이 차이가 교회의 공적 증언입니다. 거창한 구호보다 품삯을 제때 주는 정직, 허락 없이 사정을 퍼뜨리지 않는 존중, 한 사람을 위해 남겨 둔 자리에서 복음의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세상의 모든 가난과 불의가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지금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한된 자원과 복잡한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은 모퉁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룻이 주운 이삭은 세계의 모든 굶주림을 끝내지 못했지만 그날 룻과 나오미를 살렸습니다. 보아스의 밭 하나가 모든 밭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 밭에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때로 한 사람이 안전하게 일하고 한 가정이 다시 식사하는 자리에서 표지처럼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적용은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첫째, 미루고 있는 정당한 몫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돈만 아니라 감사와 인정과 사과도 포함됩니다. 마땅히 건네야 할 것을 오늘 건네십시오.

둘째, 침범하고 있는 경계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책임자라는 이유로, 도와준다는 이유로 상대의 집과 마음에 함부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셋째, 이번 주에 남길 모퉁이 하나를 정합시다. 시간 한 칸, 식탁 한 자리, 예산의 한 몫, 경청의 한 구간을 누군가를 위해 열어 두십시오.

그리고 넷째, 도움을 베풀 때 상대의 존엄을 지키십시오. 먼저 묻고, 동의를 구하고, 비밀을 보호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빼앗지 말며, 다시 설 수 있도록 동행하십시오. 다섯째, 혼자 영웅이 되려 하지 말고 공동체와 연결하십시오.

필요가 크다면 교회의 적절한 담당자와 전문 기관에 안전하게 이어 주십시오. 여섯째, 이 모든 일을 자기 의가 아니라 복음의 감사로 하십시오. “나는 돕는 사람이고 너는 도움받는 사람”이라는 벽을 세우지 말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0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신명기 24장은 우리에게 다 거두지 않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권리가 이웃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받을 권리가 있어도 생계의 맷돌을 빼앗지 말고, 담보를 잡아도 사람의 집과 존엄을 침범하지 말고, 품삯을 줄 때는 기다리는 사람의 오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큰 예배의 언어만이 아니라 제때 건네는 대가와 지켜 주는 경계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이었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손을 펴는 힘은 죄책감이나 체면이 아니라 속량의 기억에서 나옵니다. 우리도 자유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의로워진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자기 힘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온 사람입니다. 이 기억이 살아 있으면 내 밭의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을 위한 몫을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약한 사람이 존엄을 잃지 않고 함께 일어서는 밭으로 부르십니다. 룻은 남겨진 이삭을 주워 자기 손으로 일했고, 보아스는 그가 안전하게 일하고 넉넉히 거둘 수 있도록 밭의 질서를 바꾸었습니다. 오늘 교회도 말씀을 구조로 만들어야 합니다.

환대가 자리로, 돌봄이 시간으로, 정의가 제때 지급되는 약속으로, 사랑이 안전한 경계와 지속적인 동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기도한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의 통로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까지 너무 다 거두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내 몫, 내 시간, 내 권리, 내 말, 내 인정, 내 안전을 남김없이 확보하려다가 가까운 사람의 숨 쉴 자리를 없애지는 않았습니까? 누군가의 수고를 당연하게 받았고, 마땅히 건넬 감사와 대가를 미루지는 않았습니까?

도움을 준다는 이름으로 상대의 선택을 빼앗거나, 공동체의 편안함을 위해 낯선 사람을 보이지 않게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그러나 이 말씀을 또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만 받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먼저 자기 전부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의 자리를 남겨 두신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담당하시고, 부활로 새 삶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해질까 두려워 움켜쥐는 손을 조금씩 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신실하시고, 우리의 공급자가 살아 계시며, 우리의 미래가 그분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 가지를 정하십시오. 돌려주어야 할 겉옷이 무엇인지, 지급해야 할 품삯이 무엇인지, 남겨 둘 밭 모퉁이가 어디인지 정하십시오. 미루었던 대가를 건네고, 사과할 사람에게 사과하고, 지친 사람의 말을 들을 시간을 비우고, 낯선 사람에게 식탁의 자리를 내어 주십시오.

교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필요를 발견하면 조용히 연결하고 지속할 방법을 찾으십시오. 믿음은 마음속의 좋은 뜻이 아니라 오늘 밭의 모양을 바꾸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다 거두지 않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터가 사람의 생명과 존엄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끼리 편안하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복음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이웃을 위한 모퉁이를 넉넉히 남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남겨진 자리에서 지친 사람이 숨을 쉬고, 낯선 사람이 환영받고, 일한 사람이 정당한 몫을 받고, 도움받은 사람이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종이었던 우리를 속량하신 은혜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 권리를 주장하다 사람을 잃지 않게 하시고, 내 몫을 다 거두려다 이웃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장부와 일정과 식탁과 교회에 사랑의 모퉁이를 남기게 하옵소서. 도움을 베풀 때 상대의 존엄을 지키게 하시고, 말로만 기도하지 않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한신교회 성도 여러분, 다 거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누군가가 살아날 몫을 남기십시오. 모든 것을 움켜쥔 손보다 은혜를 기억하여 펼친 손이 더 복된 손입니다.

그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도 한 사람을 먹이시고, 한 가정을 일으키시고, 한 공동체를 복음의 밭으로 세우실 줄 믿습니다. 다 거두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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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