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여호수아 5장 1–15절 · 손하람 목사
이 글의 흐름
01 하나님의 일은 속도보다 언약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02 하나님의 공급 방식이 달라져도 은혜는 멈추지 않습니다
03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왕이신 주님 앞에 신을 벗어야 합니다
0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앞두면 먼저 손에 무엇을 쥘지 생각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료를 모으고, 사람을 찾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당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많아질수록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기 쉽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명령 아래 서 있는가.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주님의 뜻인가. 주님을 내 계획에 모셔 오려는가, 아니면 내가 주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는 여리고 앞에 서 있습니다. 뒤에는 광야가 있고 앞에는 견고한 성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요단을 건넜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멈추시고 백성을 마른 땅으로 지나게 하신 놀라운 은혜도 경험했습니다.
이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속도를 내야 할 때입니다. 대적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곧장 공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군사를 점검하고 성벽을 살피며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5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곧바로 여리고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멈추게 하십니다.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 세우십니다.
이 순서가 놀랍습니다. 전쟁이 코앞인데 예배가 먼저입니다. 성벽을 넘어야 하는데 마음을 살피는 일이 먼저입니다. 칼을 들어야 하는데 신을 벗는 일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기술부터 가르치지 않으시고, 누가 주인이신지를 다시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어도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만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의 자원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여호수아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저 사람보다 제 판단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제가 세운 계획이 성공하도록 힘을 보태 주시겠습니까?”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갈등이 생기면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고 확신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찾아 내 입장을 강화하고, 기도를 내 결정을 승인받는 절차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언어는 많아지지만 실제로는 내가 총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줍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가를 묻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는가. 상대가 신을 벗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신을 벗었는가.
주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여호수아가 받은 첫 명령은 성벽을 공격하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참된 승리는 밖에 있는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내 안의 주인 자리가 바뀌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은 속도보다 언약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급 방식이 달라져도 은혜는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왕이신 주님 앞에 신을 벗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일터의 모든 결정이 조급한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칼을 들기 전에 신을 벗고, 말을 앞세우기 전에 말씀을 듣고, 이기려 하기 전에 주님의 뜻 안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01
하나님의 일은 속도보다 언약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본문 첫 절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을 보여 줍니다. 요단 서쪽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강물을 마르게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습니다. 대적의 사기가 꺾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을 따르면 전투할 수 있는 남자들이 한동안 움직이기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본문은 백성이 진중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렸다고 기록합니다. 가장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전략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의 기민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난 새 세대였습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군대이기 전에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강한 사람이 빼앗아 소유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으로 맡기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향해 손을 뻗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바로 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기회가 보이면 서두릅니다. 일이 잘 풀릴 조짐이 보이면 기도보다 실행을 앞세웁니다.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승인으로 해석합니다. 반대가 약해지면 지금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유리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문이 열렸다고 모든 문을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것과 해야 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성도는 가능성만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능성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빠른 답에 익숙해질수록 분별의 근육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답이 즉시 나오는 환경에서는 본문 앞에 머무는 시간, 이견을 듣는 시간, 자기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이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별은 속도만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자랍니다.
내 결론을 잠시 보류하고 말씀에 비추어 보는 동안 자랍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논의하며 누구의 목소리가 빠졌는지 살피는 동안 자랍니다. 여리고 앞의 멈춤은 무능한 지연이 아니라 믿음의 준비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길갈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루라도 말씀 앞에 멈추는 자리입니다. 상대를 설득할 문장을 만들기 전에 내 동기를 살피는 자리입니다. 사업의 확장, 직장의 이동, 자녀에 대한 결정, 교회의 사역과 조직을 논할 때 “더 커질 수 있는가”만 묻지 않고 “주님께 더 신실한가”를 묻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가끔 멈추면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라 멈춘 사람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속도가 공동체를 더 깊이 다치게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의 실패와 불순종은 감출 수 없는 역사였습니다. 새 세대라고 해서 과거가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를 영원한 낙인으로 남겨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언약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출발하게 하셨습니다. 은혜는 과거를 미화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잘못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 되지 않도록 새 길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수치를 씻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큰 일을 한다고 과거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이겨도 양심의 정죄는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죄의 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용서의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회개하여 돌아오는 죄인을 과거의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새 출발을 얻는 근거는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회복은 자기 정비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내가 잘해 보겠다”는 의지의 강화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하셨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를 다시 순종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와 명령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종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명령은 구원의 값을 내라는 청구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생명의 길을 걷도록 주시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교회도 이 순서를 놓치면 안 됩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숫자를 늘리려는가, 사람을 살리려는가. 우리 이름을 드러내려는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가.
누군가를 이겨 우리 결정을 관철하려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함께 분별하려는가. 교회의 의사결정은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는 일반 조직과 달리,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직분과 전문성과 절차는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이후 실제로 백성을 이끌고 성을 돌았습니다. 제사장과 군사와 백성이 각자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믿음은 계획을 버리는 무책임이 아니라 계획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주님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의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의견도 말씀에 의해 수정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사람은 손을 놓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손이 누구의 명령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라는 권한이 있다고 모든 판단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말이 자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내가 더 오래 기도했고 성경을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상대의 말을 쉽게 낮추면 안 됩니다. 언약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 고집을 드러내고,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기는 대화보다 진실한 대화를 택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는 어떻습니까. 마감이 급하고 경쟁이 심할수록 사람을 수단으로 보기 쉽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의 작은 왜곡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리고보다 먼저 길갈을 주셨습니다.
성취보다 정체성이 먼저이고, 결과보다 신실함이 먼저입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작은 거짓, 약한 사람에게 떠넘긴 책임, 성과를 위해 무시한 양심을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의 복을 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공을 장식하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까지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두르기 전에 멈추십시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출발하기 위해 멈추라는 것입니다. 오늘 밤이라도 중요한 결정 하나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이 일이 가능합니까?”만 묻지 말고 “주님, 이 일을 통해 누구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누가 살고 누가 밀려납니까? 제 마음에 회개해야 할 욕심은 없습니까?”라고 물으십시오. 그 질문 앞에 오래 머무는 시간이 믿음의 낭비가 아니라 믿음의 준비입니다.
언약을 회복한 백성은 마침내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움직임은 조급한 자기 증명이 아닙니다. 수치가 굴러간 자리에서 은혜에 응답하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기 백성을 다시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은 성벽 앞에서도 자기 힘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둘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수치를 굴려 보내실 뿐 아니라, 새로운 계절에 맞는 양식으로 백성을 먹이십니다.
02
하나님의 공급 방식이 달라져도 은혜는 멈추지 않습니다
할례 후에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건지셨고, 종살이하던 백성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구원의 기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뒤에도 가장 먼저 과거의 구원을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새 땅의 흥분이 옛 은혜를 지우지 못합니다. 새로운 사명을 시작하려는 백성은 먼저 자신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새깁니다.
사람은 상황이 좋아지면 은혜를 쉽게 잊습니다. 힘들 때는 간절히 기도하다가 문제가 풀리면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는 만나 한 조각도 감사했는데 정착한 뒤에는 풍성한 소산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교회도 개척 시절에는 작은 도움 하나를 눈물로 감사하다가 규모가 커지면 건물과 조직과 사람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그런 망각을 막습니다. 오늘의 땅은 어제의 구원을 지우는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을 더 깊이 감사할 자리입니다.
본문은 유월절 다음 날 이스라엘이 그 땅의 소산을 먹었고, 그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고 기록합니다. 사십 년 동안 아침마다 내리던 양식이 더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당황스러움이었을 것입니다. 늘 있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생스러운 방식에도 익숙해지면 그것을 안전으로 붙잡습니다. 광야는 힘들었지만 만나는 예측 가능했습니다. 아침이면 밖에 나가 거두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땅을 경작하고 계절을 기다리며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만나가 그쳤다고 하나님의 공급이 그친 것은 아닙니다. 공급의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약속의 땅에서는 그 땅의 소산으로 먹이셨습니다. 같은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돌보십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익숙한 방식이 사라질 때 하나님도 떠나셨다고 오해합니다. 기도하자마자 답을 얻던 때가 지나고 오래 기다려야 하면 믿음이 약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버티던 계절이 끝나고 내가 책임을 감당해야 하면 은혜가 줄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은혜는 항상 같은 모양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문이 갑자기 열립니다. 어떤 때에는 공부하고 배우고 수고하는 과정을 통해 길이 열립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이 찾아와 도와줍니다. 어떤 때에는 도움을 받던 내가 다른 사람을 돕는 자리로 부름받습니다.
어떤 때에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필요하고, 어떤 때에는 오늘 해야 할 평범한 일을 꾸준히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만 주시는 분도 아니고 소산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를 아시고 때에 맞게 먹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특별한 체험이 계속 반복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일상의 책임으로 번역되는 것도 성숙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받던 사람이 이제 밭을 돌보고 이웃과 소산을 나누며 다음 세대를 먹이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간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받은 응답으로 더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위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곁을 지키고, 배운 사람이 가르치고, 용서받은 사람이 먼저 손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수동적인 소비자로 두지 않으십니다. 은혜를 받아 책임 있게 사랑하는 성도로 세우십니다.
여기에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일상의 수고를 강조하다가 은혜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의 소산도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난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비와 햇빛과 생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일하고 계획하고 책임을 감당해도, 생명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숙은 “이제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수단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아보는 더 깊은 믿음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말하면서 책임을 피해서도 안 됩니다. 밭이 주어졌는데 만나만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고, 풀어야 할 관계를 방치하고,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을 몇 사람에게만 맡긴 채 기적만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급 방식이 바뀌었으면 우리의 순종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어제의 충성이 오늘의 핑계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리는 본질을 위해 익숙한 방식을 내려놓는 것도 순종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잘 작동하던 프로그램이 더는 사람을 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성공 방식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닫힌 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이 낡은 것은 아닙니다.
만나가 그쳤어도 하나님이 그치신 것이 아니듯, 한 방식이 끝났다고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통을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되지만, 전통의 목적과 형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성례와 공동체의 본질을 붙들면서, 사람에게 실제로 다가가는 방식은 겸손히 살펴야 합니다.
기술과 새로운 도구를 무조건 구원자처럼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악마처럼 거부하는 두 극단은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의 성능만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을 위해, 누구를 살리기 위해 쓰는가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5장의 질문과 만납니다. 새 도구가 생겼다고 그것을 주인으로 모시면 안 됩니다.
익숙한 도구가 사라졌다고 하나님까지 잃은 것처럼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도구는 바뀌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방법은 달라져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고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공급 방식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에는 부모가 거의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자라면 묻고 듣고 책임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전 방식만 고집하면 보호가 통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부도 인생의 계절에 따라 서로를 돌보는 방식이 바뀝니다. 한 사람이 약할 때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감당하고, 시간이 지나 역할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은혜는 고정된 역할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알아보고 기꺼이 책임을 조정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일터와 생업에서도 만나의 그침을 경험합니다. 오래 의지하던 일이 끝나거나, 익숙한 기술이 더는 충분하지 않거나, 예상했던 도움이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상실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나가 그친 아침의 빈 들판은 실제로 낯설었을 것입니다.
변화는 두렵고, 배워야 하는 책임은 무겁습니다. 믿음은 그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여전히 먹이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오늘의 밭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가 그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까. 이전에는 분명하던 길이 흐려졌습니까. 기대던 사람이 떠났습니까.
기도의 감격이 예전 같지 않습니까.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먼저 유월절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소산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화려하지 않지만 감당할 수 있는 하루, 곁에 남아 있는 한 사람, 다시 펼칠 수 있는 말씀, 사과할 수 있는 기회, 작은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이 오늘의 양식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의 떡이십니다. 환경과 방식은 변해도 그분의 생명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체험의 강도나 형편의 안정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할 때 교만하지 않고, 방식이 바뀔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만나는 그쳤지만 주님은 계셨습니다. 광야는 끝났지만 은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백성을 더 넓은 책임의 자리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먹고 힘을 얻어 여리고를 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여호수아는 칼을 든 낯선 이를 만납니다. 양식이 준비되었다고 방향이 자동으로 바른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생겼다고 그 능력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공급받은 사람은 다시 주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가장 깊은 자리로 이끕니다.
03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왕이신 주님 앞에 신을 벗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칼을 빼어 든 한 사람을 봅니다. 여호수아는 군사 지도자답게 즉시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전쟁을 앞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빨리 구분해야 합니다.
중립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대답은 여호수아가 기대한 둘 중 하나가 아닙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
이 “아니라”가 여호수아의 질문 자체를 바꿉니다. 여호수아는 세상을 우리 편과 저쪽 편으로 나누고 그 사람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자신이 여호수아가 그어 놓은 선 안에 들어가 판정받을 분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핵심은 그분이 어느 편에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분의 지휘 아래 들어가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진영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진영의 후원자가 아니십니다. 모든 진영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말로는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자주 거꾸로 삽니다. 내 선택을 먼저 확정한 다음 하나님께 지지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관계가 틀어지면 내가 받은 상처만 하나님께 보고하고 내가 준 상처는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이 다르면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기보다 어느 쪽이 믿음 있는 편인지부터 가릅니다. 사회의 문제를 볼 때도 내가 속한 집단의 잘못은 작게 보고 반대편의 잘못은 크게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 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판단을 승인하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도 자녀의 거짓말까지 편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받아 주셨지만, 우리의 교만과 편견과 탐욕을 거룩하다고 불러 주시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는 특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여호수아는 질문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이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전환입니다. 판단하던 사람이 듣는 사람이 됩니다.
지휘하던 사람이 종이 됩니다.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려던 사람이 자기 위치를 바로잡습니다. 믿음은 모든 답을 가진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 듣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분별의 느림은 바로 이 태도와 연결됩니다. 참된 분별은 내가 이미 정한 답을 성경 구절로 꾸미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 앞에 머물며 내 생각이 수정될 가능성을 여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다른 목소리를 들으며 성령께서 내 편견을 드러내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되, 질문하는 나 자신도 말씀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담대하게 다가가 물었지만 대답을 들은 뒤 자기 질문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엎드렸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합니다. 그가 선 곳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었던 장면과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신을 벗는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나타나는 겸손과 경외와 정결의 표지입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보냄받기 전에 신을 벗었고, 여호수아는 여리고로 나아가기 전에 신을 벗었습니다. 두 지도자 모두 사명보다 먼저 임재를 만났습니다. 사람을 이끌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종의 자리를 배웠습니다.
신발은 내가 걸어온 길의 먼지를 묻혀 옵니다. 본문이 이 상징을 직접 해설하지는 않으므로 함부로 의미를 늘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무언가를 더 장착한 것이 아니라 벗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더 많은 무기와 더 강한 말과 더 확실한 증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옳다는 확신, 상대를 이겨야 안심되는 마음,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 신앙을 내 명분으로 이용하려는 욕심입니다.
교회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만 교회의 머리이심을 실제 결정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장로도, 오래된 관행도, 많은 후원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직분자는 서열의 주인이 아니라 질서를 위해 섬기는 조력자이며, 의사결정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함께 기도하고 논의하며 확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차를 약하게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권력이 주님의 이름을 빌리지 못하도록 더 정직한 절차를 세우자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에서 가장 믿음 좋은 사람은 자기 말을 가장 오래 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필요한 순간에 멈추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기 제안이 채택되지 않아도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틀린 사실이 드러났을 때 체면을 지키기보다 바로잡는 사람이 신을 벗는 사람입니다.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어도 약한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다시 묻는 사람이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신을 벗는 일도 구체적입니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니까”, “내가 돈을 버니까”, “내가 더 힘드니까”라는 신발을 벗고 상대의 아픔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의 의도가 좋았다고 주장하기 전에 그 말이 남긴 상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요구하기 전에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권위를 잃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래 있는 바른 권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일터와 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느 집단에도 무비판적으로 충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회사, 세대, 지역, 정치적 입장, 교단이 소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주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쉽게 적으로 만들고 내 편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시대를 삽니다.
말 한마디만 달라도 상대를 한 범주에 넣고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우리가 만든 양자택일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영 논리를 거룩으로 심판하십니다.
여기서 본회퍼가 주는 경고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의 일부가 국가와 지도자를 그리스도의 권위와 뒤섞을 때, 고백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떤 인물과 국가도 그리스도와 같은 권위로 받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역사적 상황을 오늘에 단순히 복사할 수는 없지만 원리는 분명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보다 민족과 국가와 지도자의 이름을 높일 때 신앙은 우상이 됩니다. 반대로 공적 책임을 말하면서도 자기 진영의 증오를 거룩한 열심으로 꾸며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 아래서 우리 편의 죄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 입장도 갖지 말고 중립에 머물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신을 벗은 뒤 실제 사명을 감당합니다.
본회퍼도 추상적 중립에 머물지 않고 책임 있는 순종을 고민했습니다. 문제는 행동의 유무가 아니라 행동의 주인입니다. 성도는 불의를 보고도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라며 피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거짓을 거절하고, 책임 있게 말해야 합니다. 다만 내 분노와 내 집단의 이익을 하나님의 뜻과 자동으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듣고, 행동하는 동안에도 회개하며, 결과를 내 이름의 승리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 만남 뒤에 이어지는 여리고 사건을 인간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반 원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 정복은 특정한 구속사적 심판의 맥락에 있으며 오늘의 전쟁이나 종교적 폭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약의 교회가 싸우는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라 죄와 거짓과 악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칼은 사람을 베는 칼이 아니라, 먼저 내 생각과 동기를 말씀 앞에서 분별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성은 이웃의 존엄이 아니라 교만과 거짓과 미움의 견고한 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용된 군대 대장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죽음과 죄의 권세를 이기신 왕이십니다. 동시에 그 왕은 세상의 정복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소모하여 왕좌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십자가는 힘이 약함을 짓밟는 방식이 아니라, 거룩하신 왕이 죄인의 자리를 담당하신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군대에 선 사람은 더 거칠고 오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진실하고 온유하며 책임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순종하셨다는 복음은 우리의 순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신을 잘 벗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에, 안전하게 내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틀렸다고 인정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쫓겨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이 무너져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양보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자기 승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칼을 들고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해결해야 할 갈등입니까. 반드시 이루고 싶은 계획입니까. 억울함을 밝히고 싶은 관계입니까.
책임져야 할 교회의 일입니까. 칼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먼저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려 물으십시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이 한 문장이 우리의 기도를 바꿉니다. “주님, 제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에서 “주님, 제 뜻을 고쳐 주십시오”로 바뀝니다. “저 사람을 바꾸어 주십시오”에서 “저 사람을 대하는 제 마음부터 다스려 주십시오”로 바뀝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여호수아는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듣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큰 사명을 말하면서 작은 순종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거창한 승리를 기다리지 말고 오늘의 작은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고, 확인되지 않은 말을 멈추고, 불리해도 사실을 말하고, 회의에서 조용한 사람에게 발언할 시간을 주고, 기도 없이 밀어붙이던 결정을 잠시 멈추십시오. 이것이 왕의 지휘 아래 들어가는 실제 순종입니다.
주님 앞에 신을 벗은 사람은 세상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담대해집니다. 내 체면을 지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용기는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믿는 데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참된 총사령관 앞에 엎드린 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낮아질수록 세상의 압력 앞에서는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주님만 왕이시라면 어떤 사람도 절대 권력이 될 수 없고, 어떤 실패도 마지막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결론으로 나아갑시다. 여리고 앞에서 하나님이 먼저 찾으신 것은 더 날카로운 칼이 아니었습니다. 언약을 기억하는 백성, 구원을 감사하는 백성, 왕 앞에 엎드리는 종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0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세 번 멈춥니다. 할례를 위해 멈추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멈추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 엎드리기 위해 멈춥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전진을 늦추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그 멈춤이야말로 바른 전진의 시작이었습니다. 언약 없이 얻은 속도는 방향을 잃고, 구원의 기억 없이 얻은 풍요는 교만이 되며, 왕 앞에 엎드리지 않은 힘은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첫째, 속도보다 언약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할 수 있다고 곧바로 하지 마십시오. 상황이 유리하다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말씀 앞에 머물고, 함께 기도하고, 동기를 살피십시오.
과거의 잘못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미화하지 않으시지만 회개하는 백성의 수치를 영원한 이름으로 남겨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둘째, 공급 방식이 달라져도 은혜는 멈추지 않습니다. 만나가 그쳤다고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소산으로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익숙한 도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책임이 시작될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제와 같은 감동이 없다고 믿음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유월절의 은혜, 곧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오늘 주어진 평범한 양식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책임 있는 사랑으로 살아 내십시오.
셋째,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내가 주님의 다스림 아래 서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아니라”고 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만든 진영의 도구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적 입장까지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상대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벗어야 합니다. 내 판단과 체면과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오늘 밤 한 가지를 실천합시다. 해결하고 싶은 문제 하나를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결과만 말하지 말고, 먼저 내 마음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놓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내 말에 상처 입은 이는 없는지, 진실보다 체면을 지키려는 부분은 없는지 물으십시오.
가능하다면 결정을 하루 미루고 말씀을 다시 읽으십시오. 함께 책임질 사람의 의견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분명히 깨달은 작은 순종 하나를 미루지 마십시오.
교회가 이렇게 살면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됩니다. 의견이 없어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왕이신 그리스도 아래 내려놓을 줄 아는 공동체가 됩니다. 힘 있는 사람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씀 아래서 듣고 회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빠른 성과를 위해 사람을 소모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늦더라도 사람을 살리며 함께 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에 보여 줄 거룩한 질서입니다.
우리가 신을 벗는다고 세상의 성벽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고 견뎌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앞서 가시는지는 분명해집니다. 승리의 책임을 내가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과를 만들기 위해 진실을 희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주님이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는 그 은혜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그러므로 칼을 들기 전에 신을 벗으십시오. 말하기 전에 들으십시오. 이기려 하기 전에 주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익숙한 만나가 그쳤을 때도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수치가 여러분의 마지막 이름이라고 믿지 말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왕이신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 편이 되어 제 뜻을 이루어 달라고만 구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뜻 안에 서게 하시고, 종에게 하실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 기도를 드리는 가정은 다시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교회는 자기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세상의 진영 논리에 붙들리지 않고 사랑과 진실과 공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수아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히 일어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칼보다 먼저 신을 벗고, 승리보다 먼저 거룩을 구하며, 모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왕이심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손하람 목사 · 분당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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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9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