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본문 · 사사기 9:7-15
2026년 9월 15일 주일
들어가며 — 우리는 누구나 그늘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그늘을 찾습니다.
햇볕이 뜨거울 때에는 잠시라도 몸을 식힐 곳을 찾고, 마음이 지칠 때에는 내 이야기를 안전하게 맡길 사람을 찾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사람은 자기를 보호해 줄 관계와 질서를 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내게 오십시오. 내가 안전하게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불안할수록 단호한 목소리가 믿음직하게 들리고, 혼란할수록 빠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유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단호한 목소리와 참된 그늘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요담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과 손을 잡고 자기 형제들을 죽인 뒤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고통받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야심을 위해 형제를 제거했고, 세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 일에 가담했습니다.
살아남은 요담은 그리심산에서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왕이 되라는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왕이 되겠다고 나서며 자기 그늘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나와 큰 나무까지 태울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가시나무가 그늘을 약속한다는 데 이 이야기의 서늘함이 있습니다.
그늘을 넉넉히 내어 줄 수 없는 존재가 가장 큰 그늘을 장담합니다. 열매가 없는 존재가 다른 나무들의 충성을 요구합니다. 보호할 능력은 없으면서 복종하지 않으면 불을 내겠다고 합니다. 약속은 그늘인데 실제로 준비된 것은 불입니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낡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지도자 몇 사람만을 비판하는 재료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권력은 높은 직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말을 먼저 꺼낼 수 있는 힘
· 정보를 더 많이 가진 힘
· 경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힘
· 다수가 되어 분위기를 정하는 힘
· 신앙 경력이 길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영향을 미치는 힘
부모에게도 권한이 있고, 교사와 봉사자에게도 권한이 있으며, 오래 믿은 성도에게도 권한이 있습니다. 심지어 상처받은 사람에게도 상대를 죄책감에 묶어 두는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누가 가시나무인가"만 묻지 말고 "내 안에 가시나무의 마음은 없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불안을 잠재워 줄 것처럼 말하는 강한 사람입니까, 내 욕망을 정당화해 주는 집단입니까, 아니면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첫째, 열매 맺는 나무는 자리를 얻기보다 맡은 소명을 지킵니다

요담의 이야기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이 되기를 거절한 세 나무입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무능해서 물러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귀한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에 거절합니다. 감람나무에는 기름이 있고, 무화과나무에는 단 열매가 있으며, 포도나무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유익을 버리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흔들리는 자리를 택하지 않습니다. 요담의 우화는 가치 있는 삶과 높은 자리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영향력이 커져야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할 때가 있고, 공동체에는 지도력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모든 직책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자리를 받는 것과 자리를 얻기 위해 열매를 이용하는 것이 뒤바뀌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사람의 칭찬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맡았는데, 어느 순간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명은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중심은 이미 자리로 옮겨 갑니다.
세 나무의 거절은 책임 회피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내게 맡겨진 열매를 버리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과 모든 일을 내가 장악하는 것은 다릅니다. 맡은 몫에 충실한 것과 다른 사람의 몫까지 빼앗는 것도 다릅니다. 성숙은 언제나 더 많은 권한을 갖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은사가 자랄 자리를 내어 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에는 보이지 않는 열매가 많습니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일,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공간을 정돈하는 일, 내 공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매가 공동체를 살립니다.
반대로 큰 말을 하고 많은 결정을 내리면서도 가까운 사람을 지치게 한다면, 우리는 직책의 크기와 열매의 크기를 혼동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백과 삶 사이의 틈
사사기 8장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여 줍니다.
기드온은 백성이 자신과 아들과 손자가 다스리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백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이은 삶에는 왕처럼 행동한 흔적이 나타났고, 그의 집에 세운 종교적 상징은 결국 올무가 되었습니다.
말로는 왕의 자리를 거절했지만 삶으로는 왕의 모양을 남긴 것입니다. 그 틈에서 아비멜렉의 야심이 자랐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좋은 고백도 매일의 삶에서 지켜 내지 않으면 변질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우리도 말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내 이름이 빠진 것을 서운해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교회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방식이 유지되는 것을 교회의 유익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가정을 사랑해서"라고 하면서 가족이 내 기대대로 움직이게 하려 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바른 신앙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질문하는 사람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몰 수 있습니다.
고백과 삶 사이의 작은 틈을 방치하면, 그 틈은 다음 사람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것은 자리를 원하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열매보다 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 마음, 섬김보다 인정받음을 더 기뻐한 마음, 다른 사람의 성장을 내 영향력의 감소처럼 느낀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맡았는지 다시 보게 하소서.
사람들 위에서 흔들리기보다
오늘 내 자리에서 열매 맺게 하소서.
내가 가진 좋은 것이 권력의 재료가 될 때
이 적용은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말이 느린 사람의 생각을 대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회의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새로 온 사람의 질문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도움을 주면서 상대의 선택권까지 소유하려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지식이 많은 사람이 말씀을 위로의 양식이 아니라 우월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이 다른 사람 위에 서는 이유가 되는 순간, 좋은 열매는 권력의 재료로 변합니다.
반대로 복음은 우리가 가진 것을 다시 열매로 돌려놓습니다.
· 지식이 있다면 가르치되, 상대를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 경험이 있다면 안내하되, 다른 사람의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 물질이 있다면 나누되, 감사와 충성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 직책이 있다면 결정하되, 이유를 설명하고 결과에 책임집니다
· 말할 힘이 있다면, 침묵당한 사람의 말을 들리게 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의 삶입니다. 자리를 차지하여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흘려보내며 존재의 목적을 살아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권을 얻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섬김과 자기 내어 줌의 길에서 드러났습니다.
참 왕은 진리를 말하지만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참 왕은 질서를 세우지만 그 질서의 중심에 자기 영광을 두지 않습니다. 참 왕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권한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권한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위로 올라가 나를 크게 만드는 방향에서, 아래로 흘러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가시나무의 권위는 그늘을 말하지만 결국 불을 냅니다

가시나무는 나무들에게 자기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담의 우화가 드러내는 역설은 가시나무의 그늘이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실재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약속을 믿지 않으면 불이 나와 태울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것이 가짜 권위의 전형입니다. 줄 수 없는 안전을 장담하고, 질문을 배신으로 취급하며, 충성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겁을 줍니다.
가짜 그늘은 처음부터 흉악한 얼굴로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편리함으로 옵니다
· "우리 편이면 안전하다"는 소속감으로 옵니다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따르라"는 속도로 옵니다
사람들은 지쳐 있을 때 그 제안을 반깁니다. 결정의 책임을 넘기면 잠시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세겜 사람들도 아비멜렉 한 사람이 다스리는 편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결탁하여 얻은 편리함은 오래 보호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 불은 결탁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타오릅니다.
사사기 9장은 아비멜렉과 세겜의 관계가 서로를 살리는 언약이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는 거래였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한편이었지만 그 중심에 진실과 공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의심과 배신이 생기고, 폭력은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합니다.
악으로 맺은 연합은 공동의 선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순간 서로를 태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함이 곧 평안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교회 공동체에도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평안을 갈등이 없는 상태로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합은 침묵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며, 평안은 공의와 따로 살 수 없습니다.
질문을 막고 불편한 사실을 덮어 둔 채 "좋게 넘어가자"고 말하면 잠시 조용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의 비용을 누가 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힘이 적은 사람이 계속 양보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공동체의 체면을 위해 침묵한다면
그것은 평안이 아니라 미뤄 둔 불입니다.
건강한 권위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결정의 이유를 설명하고, 잘못된 결과에 책임지며, 반대 의견이 존재할 공간을 남깁니다. 모든 의견을 다 따를 수는 없지만, 어떤 의견도 말할 수 없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나무의 언어는 정반대입니다. "내 그늘 아니면 불"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합니다. 내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면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질문하면 충성심이 없다고 하고, 속도를 늦추자고 하면 믿음이 없다고 하며, 검증을 요구하면 사역을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언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 공동체의 유익을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와 책임이 자랍니까, 아니면 두려움과 침묵이 자랍니까? 약한 사람이 보호받습니까, 아니면 더 쉽게 희생됩니까?
잠언 16장은 보좌가 공의로 굳게 선다고 가르칩니다. 권한이 크다는 사실 자체가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공의가 그 권한을 지탱해야 합니다. 또한 잠언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성을 빼앗는 사람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성읍을 정복할 수 있었지만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이 살아 있는 한 자기 자리가 불안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사람을 제거하여 안전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제거하여 얻은 안전은 더 큰 불안을 낳습니다. 힘으로 침묵시킨 관계에는 신뢰가 아니라 보복의 가능성만 남습니다.
혀도 불이 될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우리 안의 말로도 나타납니다. 시편 52편은 혀가 실제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사실을 말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말이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실을 왜 말하는지, 누구에게 말하는지, 그 말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책임 있는 절차로 가는지, 아니면 상대를 고립시키고 내 편을 모으는 불이 되는지 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기도해 달라"는 이름으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퍼뜨릴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알아야 한다"는 말로 불필요한 수치를 유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 피해와 부당함을 단순한 험담으로 취급하여 말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 극단 모두 위험합니다. 진실을 퍼뜨리는 쾌감과 진실을 덮는 편안함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범위 안에서, 회복과 보호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가시나무의 불은 거짓말로만 번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잃은 사실로도 번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먼저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되 그 사람 전체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여 말하고, 내가 받은 영향과 상대의 의도를 함부로 섞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은 즉시 자기 변호를 시작하기보다 무엇이 아팠는지 되묻습니다.
잘못이 확인되면 책임을 분명히 하되, 회개와 변화가 실제로 나타날 때 다시 참여할 길도 마련합니다. 용서가 곧 이전과 똑같은 관계로 돌아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안전한 경계와 역할 조정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절차가 느리고 번거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늘 빠릅니다. 한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하면 복잡한 사정을 들을 필요가 없고, 한 사람을 절대적 지도자로 세우면 함께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공동체는 효율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시간이 들고, 진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하며, 신뢰를 다시 세우는 데에는 반복되는 책임이 필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의 책임
여기서 우리는 세겜 사람들의 책임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가시나무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왕으로 세우는 데 참여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폭력을 눈감았고, 다른 사람의 피 위에 세운 질서에서 안전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줍니다.
· 나는 부당한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내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 침묵하면 자리를 지킬 수 있어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공동체의 악은 강한 한 사람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 이익 때문에 박수치는 사람, 귀찮아서 확인하지 않는 사람, "원래 그런 곳"이라며 체념하는 사람의 선택도 구조를 만듭니다.
그렇다고 두려움 속에 있던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의 형편과 위험은 다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진실에 서고,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면 믿을 만한 사람과 책임 있는 절차를 찾으며, 최소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는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인간 권위도 절대 권력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양심의 주인이 아니고, 교회 지도자도 성도의 구원자가 아니며, 국가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교회도 국가를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한은 맡겨진 범위 안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가짜 그늘 아래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질문하면 버려질 것 같고, 다른 의견을 말하면 관계가 끊어질 것 같고,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밀려날 것처럼 느껴집니까?
사람의 부당한 요구와 하나님의 뜻을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조종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가시나무의 그늘을 강요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사명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 일하실 공간을 닫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낮추면서 동시에 자유롭게 합니다.
셋째, 참 왕의 다스림은 형제를 태우지 않고 자신을 내어 줍니다

사사기 9장의 아비멜렉은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보여 주는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발판으로 자기를 높였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아비멜렉의 권력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폭력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는 순종 가운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두 왕의 길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세상의 강한 왕 이미지에 예수님의 이름만 붙이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십자가를 통과한 왕권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지만 사람을 조종하지 않으셨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지만 죄인을 살리기 위해 대가를 자신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자기 보존을 위해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권위가 아니라, 약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권위입니다.
교회가 왕권만 말하고 진리와 자기희생을 잃으면 권력주의가 됩니다. 반대로 사랑만 말하고 거룩한 질서와 책임을 포기하면 약한 사람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진리와 긍휼과 다스림이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권한 가진 사람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이 복음은 먼저 권한을 가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가"보다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가"를 묻게 합니다. "내 자리가 지켜지는가"보다 "맡겨진 사람이 살아나는가"를 묻게 합니다. "내 결정이 관철되었는가"보다 "그 결정이 공의와 사랑을 함께 세우는가"를 묻게 합니다.
참된 권위는 자기를 증명하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심을 믿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들을 수 있고, 실수를 인정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권한을 가진 성도의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해 주십시오"보다 → "내가 주님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 "내 계획이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보다 → "내 계획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지 보게 해 주십시오"
· "반대하는 사람을 잠잠하게 해 주십시오"보다 → "그의 말 속에서 내가 들어야 할 진실을 분별하게 해 주십시오"
· "내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보다 → "이 자리를 통해 맡겨진 사람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복음은 또한 권한 아래 있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사람을 우상처럼 붙들지 않아도 됩니다. 존경할 수 있지만 절대화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지만 양심을 포기하지 않으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구원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최종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이 아니라, 결함이 없고 죽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실망을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신앙 전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뿌리내린 감람나무

시편 52편은 포악한 사람이 자기 힘과 재물을 의지하며 남을 무너뜨려 자기를 세우는 길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뿌리내린 푸른 감람나무의 길을 대조합니다.
사사기 9장의 감람나무와 함께 생각하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참된 성도는 다른 나무 위에 올라 흔들리며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가시나무 같은 사람은 자리가 흔들리면 존재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협으로 느끼며, 자기 없이도 일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린 사람은 자리가 곧 정체성이 아님을 압니다. 직책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박수를 받지 못해도 사랑받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이 앞서도 자기 몫의 열매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정은 다른 사람을 누르는 데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데서 옵니다.
기도가 제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이런 기도를 제도로 번역해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에는 설명과 기록이 있어야 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한 사람에게 정보와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되지 않도록 서로 점검해야 합니다. 실수나 부당함을 말할 안전한 통로가 있어야 하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동시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을 정죄하지 않도록 사실 확인과 공정한 절차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연약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되 자녀의 인생을 대신 소유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는 서로 권면하되 상대의 양심을 조종하지 않습니다. 사과할 때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로 끝내지 않고, 내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듣습니다.
직장과 사회에서도 성도는 다른 방식으로 권한을 사용해야 합니다. 지시할 위치에 있다면 결과만 요구하지 말고 필요한 자원과 시간을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 정보를 사적 우위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예배당 안에서만 고백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권한을 책임으로 바꾸는 기준입니다.
가시나무를 비판하다 가시나무가 되지 않도록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의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비판하면서 내가 또 다른 가시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권력 남용을 고발하는 말이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고 내가 도덕적 우위에 서기 위한 불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사실을 과장하거나, 회개할 가능성을 처음부터 닫거나, 상대의 실패를 즐긴다면 우리는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정의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기 성찰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나는 전혀 다르다"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고, "나도 은혜 없이는 같은 길로 갈 수 있다"는 자리에서 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책망은 파괴의 쾌감이 아니라 회복의 책임이 됩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사사기 9장은 아비멜렉과 세겜의 악이 끝까지 숨겨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피 흘림을 기억하시고,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경고이고, 억울한 사람에게 위로입니다. 심판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책임 있는 절차를 따르되, 미움이 우리 영혼의 왕이 되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분들께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당한 권위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더 잘 참으라"는 요구로 듣지 마십시오.
불 가운데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언제나 믿음은 아닙니다.
안전을 구하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필요한 거리를 두며, 책임 있는 기관과 절차를 찾는 것은 불순종이 아닙니다. 용서는 피해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고, 화해는 확인 가능한 변화 없이 이전 관계로 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참 왕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공동체의 체면을 위해 침묵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상처가 우리를 영원히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맙시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의 권력이 내 남은 인생까지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잘못보다 크시고, 무너진 신뢰보다 깊은 곳에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회복은 서두를 수 없고 흔적이 남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가시나무 아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작은 그늘이 됩니다
참 왕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는 성공의 크기보다 열매의 성격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만 묻지 않고 그 안에서 약한 사람이 안전한지 묻습니다. 얼마나 빠르게 결정했는가만 보지 않고 과정이 정직했는지 묻습니다. 갈등이 없는지를 자랑하지 않고, 갈등을 진실과 사랑으로 다룰 수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작은 그늘이 됩니다. 거창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 오늘 한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듣는 것이 그늘입니다
· 실수를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그늘입니다
· 소문을 멈추고 필요한 책임의 자리로 안내하는 것이 그늘입니다
· 결정의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물을 기회를 주는 것이 그늘입니다
· 도움을 주되 상대를 빚진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그늘입니다
· 내 권리를 조금 내려놓아 다른 사람이 숨 쉴 자리를 만드는 것이 그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드는 그늘이 완전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지치고, 잘못 판단하며, 선한 의도로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공동체입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끝났다고 선언하는 대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피해를 바로잡고, 다시 배우며, 필요한 경우 역할을 바꿉니다. 은혜는 책임을 없애지 않고, 책임을 감당할 새 길을 엽니다.
맺으며 — 어느 그늘 아래 서 있습니까
사사기 9장의 나무들은 우리 앞에 두 길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자기에게 맡겨진 열매를 지키며 하나님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줄 수 없는 그늘을 약속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불을 내겠다고 위협하는 길입니다.
전자는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생명을 남깁니다. 후자는 빠르고 강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자기도, 자기를 세운 사람도 태웁니다.
우리는 가시나무를 분별해야 합니다. 큰 목소리를 참된 권위로 착각하지 말고, 빠른 결정을 지혜로 오해하지 말며, 질문 없는 조용함을 평안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공의 없는 연합, 설명 없는 명령, 책임 없는 영향력, 회개 없는 용서를 경계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안의 가시나무도 보아야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 내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마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아주 구체적으로 한 가지씩 실천합시다.
·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한 명의 의견을 더 듣고, 결정의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 말할 힘이 있는 사람은 말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먼저 질문하십시오
· 누군가의 약점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소문이 아니라 보호와 회복의 절차로 가져가십시오
· 상처받은 사람은 혼자 견디지 말고 안전한 도움을 찾으십시오
· 잘못한 사람은 의도를 변명하기 전에 영향을 듣고 구체적으로 사과하십시오
· 직책이 없는 사람도 공동체의 악을 선이라 부르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진실과 사랑에 서십시오
우리 교회가 사람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서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함께 서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쫓겨나지 않고, 약한 사람이 희생되지 않으며, 지도자가 점검을 은혜로 받고, 잘못을 인정한 사람이 책임을 다하며 다시 걸을 길을 얻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나무의 그늘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 은혜에 뿌리내립시다. 높은 자리를 향해 흔들리기보다 맡겨진 자리에서 좋은 열매를 맺읍시다. 불로 사람을 움직이기보다 진실과 사랑으로 사람을 세웁시다.
형제를 죽여 왕이 된 아비멜렉의 길을 버리고,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릅시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누군가에게 쉼과 용기와 생명을 건네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16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