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본문 · 마태복음 13:44-46
2026년 9월 21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눈을 뜨자마자 무엇을 먼저 볼지 선택하고,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 선택하며, 한정된 시간을 어디에 쓸지 선택합니다. 어떤 선택은 가볍습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옷을 고르고, 돌아갈 길을 고릅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길 것인지, 내 힘과 시간을 무엇을 위해 내어놓을 것인지에 따라 인생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향해 움직입니다.
입술로는 다른 말을 해도
일정표와 통장과 반복되는 습관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지를 드러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에 비유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고 합니다.
두 비유는 매우 짧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없고, 그 사람이 어디에 살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 안에는 하나님 나라를 만난 사람의 놀라움과 기쁨과 결단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두 비유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밭의 사람은 찾지 않았는데 마주쳤습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다가, 혹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걸려 넘어졌습니다. 반면 진주 장사는 평생 좋은 진주를 찾아다닌 전문가였습니다. 안목이 있었고, 오래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두 이야기를 나란히 두셨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만나는 길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병상에서, 실패 뒤에,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밀려옵니다. 어떤 분은 오래 찾고 묻고 읽은 끝에 만납니다. 신앙을 의심하며 십 년을 헤매다가 마침내 무릎을 꿇습니다. 두 길 모두 참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같은 자리에 도착합니다. 발견했고, 알아보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어떻게 만났느냐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난 사람은 똑같이 가치의 순서를 다시 씁니다.
우리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는 문장을 먼저 읽고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희생하는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까지 모두 빼앗으시는 분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낱말은 포기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그 사람은 억지로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화를 발견한 후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가진 것을 파는 행동은 보화를 얻기 위한 슬픈 벌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내리는 기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을 메마르게 만드는 무거운 의무가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을 발견한 사람이 다른 것의 자리를 새롭게 정하는 사건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욥기 28장은 지혜가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재산과 공로와 종교적 성취로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결코 살 수 없는 것을 은혜로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전에 절대적이라고 여긴 것들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여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주인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자꾸만 무거운 의무로만 느껴진다면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정말 보화를 보았는가.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많이 배웠지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는가. 예배 순서를 알고 봉사의 책임을 알고 신앙인의 예절을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복된 소식을 기뻐하고 있는가.
보화를 보지 못한 채 소유를 팔라는 말만 들으면 신앙은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보화를 발견하면 계산이 달라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포기보다 먼저 기쁨을, 의무보다 먼저 은혜를, 우리의 결심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발견되는 보화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길 위에 놓인 장식품이 아닙니다. 누구나 무심히 지나가며 볼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거짓되거나 일부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허락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 가치는 세상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기준으로는 쉽게 알아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크기와 속도와 영향력으로 가치를 판단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빨리 성취하면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작은 씨앗과 누룩처럼 시작되고, 낮아짐과 섬김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권력과 군대와 즉각적인 승리를 기대한 눈에는, 갈릴리 길을 걸으시고 병든 이에게 손을 내미시며 죄인과 식탁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작아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시는 왕은 세상의 성공 공식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습니다. 죄인을 정죄로만 밀어내지 않고 회복으로 부르시는 통치,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소모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통치, 죽음이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는 통치입니다.
욥기 28장은 사람이 어둠을 뚫고 광산 깊은 곳까지 내려가 감추어진 광물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노래합니다. 사람은 산을 뿌리까지 뒤엎고 반석에 길을 내며 감추어진 것을 밝은 데로 끌어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술로도 지혜의 자리는 찾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손바닥 안의 기기로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곧바로 불러옵니다. 검색하면 지식이 쏟아지고, 생성 도구는 그럴듯한 문장을 순식간에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난 중에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는 정보의 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생성형 기술은 설교와 음악과 영상의 준비를 돕는 유용한 보조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몸으로 서서 경외하고 기뻐하며 응답하는 예배자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만나는 사건이며, 우리의 몸과 감각과 반복되는 실천을 통해 사랑이 형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보화에 관한 설명을 많이 읽는 것과
실제로 보화를 발견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
왕이신 주님 앞에 내 삶을 맡기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을 정보로만 소유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 지식을 쌓고 설교를 많이 듣고 신학 용어를 익히는 것은 귀합니다. 잠언 2장은 지혜를 은처럼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처럼 찾으라고 합니다. 대충 읽고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며 깊이 찾으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공부의 끝은 자료가 아니라 한 분입니다. 지혜를 찾는 여정의 도착점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이웃을 함부로 판단할 권리가 되고, 교리를 아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장식이 되며, 설교를 듣는 일이 실제 순종을 미루는 핑계가 된다면, 우리는 보물 지도를 자랑하면서 정작 보화 앞에는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신약의 지평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더 나은 인생 기술 몇 가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공을 돕는 수단으로 추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보화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의 새 신분을 얻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를 얻으며, 죽음 너머까지 이어지는 소망을 얻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도 귀하지만, 선물을 주시는 주님 자신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기도를 바꿉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관계의 회복과 필요한 길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오직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되면, 우리는 보화보다 보화가 담긴 밭에서 얻을 수 있는 부수적 이익만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의 깊은 자리에서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문제가 당장 풀리지 않아도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답을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님의 손에 있는 것만 원하지 않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욥은 고난의 이유를 끝내 다 설명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지혜임을 배웠습니다.
이 발견은 사람을 대하는 눈도 바꿉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과가 큰 사람만 들어가는 전시장이 아닙니다.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 초대받는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보화를 발견한 교회는 세상에서 가치가 낮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됩니다. 말이 느린 사람, 몸이 약한 사람, 사회적 성취가 적은 사람, 믿음의 질문이 많은 사람, 오랫동안 교회 문턱에서 머뭇거린 사람을 효율의 기준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고 사신 사람을 우리가 쓸모의 크기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도 새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 보화를 발견할 때 비로소 다음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둘째, 그 기쁨은 실제 선택을 새롭게 합니다

비유 속 사람은 밭에서 감동만 받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뻐했고, 돌아갔고, 팔았고, 샀습니다. 마음의 놀라움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좋은 진주를 찾던 장사도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뒤 자신의 소유를 정리하여 그것을 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상적으로 칭찬하는 사람보다, 그 가치를 알아보고 삶의 질서를 바꾸는 사람을 보여 주십니다.
잠언 4장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는 권면 뒤에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라는 값의 언어를 덧붙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늘 남은 시간만 줄 수 있습니다. 예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일정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밀어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불편이 생기면 곧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엇을 위해 시간과 편안함과 자존심을 내어놓는지가 우리의 우선순위를 드러냅니다.
다시 강조해야 합니다. 이것은 더 많이 버린 사람이 더 큰 은혜를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를 팔았다는 행동을 공로의 목록으로 만들면 비유의 기쁨을 잃습니다. 은혜는 거래의 결과가 아닙니다.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에 다른 것의 상대적 가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오래된 서랍을 정리할 때, 이전에는 버리지 못하던 물건도 더 중요한 것을 위한 자리가 필요하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손에 이미 귀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덜 중요한 것을 놓는 일이 단순한 상실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절제와 헌신은 빈손이 되려는 수행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붙들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판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직업을 버리고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비유를 문자적 거래 지침으로 바꾸면 본문의 중심을 놓칩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는 임의로 세부마다 숨은 상징을 붙이지 말고, 문학적 문맥과 중심적 충격을 살펴야 합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는 한 인물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의 전인적 응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와 경쟁하는 거짓 절대성을 분별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지는 대개 스스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잃으면 내가 끝난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 시간은 어디로 갑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양심을 조금 접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질문은 두려움이 가장 큰 자리를 알려 주고, 둘째 질문은 습관이 진짜 애정을 알려 주며, 셋째 질문은 타협의 지점에서 우상의 이름을 알려 줍니다.
어떤 분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팔아야 할 소유입니다. 칭찬받지 못하면 선한 일도 중단하고,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공동체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하며,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내 실패처럼 느낀다면 인정 욕구가 마음의 왕좌에 오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해방합니다. 아버지께서 은밀한 충성을 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보화가 되면, 사람의 박수는 감사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 없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남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의 열매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공로를 독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통제하려는 욕망이 내려놓아야 할 소유입니다. 계획대로 되어야 마음이 놓이고, 가족이 내 기대대로 움직여야 사랑받는다고 느끼며, 교회도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만 움직여야 옳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왕이 아니라는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왕좌에서 내려오는 일은 자존심에는 아프지만 영혼에는 쉼입니다.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맡은 책임은 성실히 감당하되 다른 사람의 삶과 하나님의 시간을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화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지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이신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소비와 비교의 습관이 가치 질서를 흐립니다. 우리는 필요보다 비교 때문에 사고, 기쁨보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소비하며,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면서 내 삶의 선물을 작게 여깁니다. 세상의 시장은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더 가져야 안전하고, 더 새로워야 존중받으며, 더 보여 주어야 존재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하면 소유는 주인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물질을 악하다고 부르지 않지만, 물질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맡기지도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누리되 감사하고, 남은 것을 움켜쥐기보다 흘려보내며, 빚과 과시와 충동을 정직하게 점검합니다.
역대하 11장은 참 예배를 지키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자기 목장과 산업을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장면을 전합니다. 그 선택을 오늘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형태의 이주로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문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 믿음의 중심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로보암은 정치적 두려움과 편의를 위해 예배의 질서를 자기 목적에 맞게 바꾸었습니다. 반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은 손실을 감수하고 참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보화를 안다는 것은 편리한가만 묻지 않고 진실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일터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익을 위해 사실을 과장하고, 약한 사람에게 비용을 떠넘기고, 모두가 한다는 이유로 부정직한 관행을 따르면서 주일의 예배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요일의 한 시간만 사는 보화가 아닙니다. 월요일의 계약서와 화요일의 회의와 수요일의 고객 응대 안에서도 왕이신 주님을 인정하게 합니다. 정직 때문에 단기적 손해를 볼 수 있고,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면서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어려움을 자동으로 순교라고 부를 수는 없으므로 공동체의 지혜로운 조언과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도 거짓을 주인으로 섬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에서는 자존심을 파는 결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과하면 지는 것 같고, 오래된 서운함을 놓으면 상대의 잘못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마음에 장부를 붙들고 삽니다.
여기서 반드시 덧붙여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용서는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거나 안전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와 심각한 침해가 있는 관계에서는 피해자의 안전과 적절한 보호 절차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일상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붙드는 작은 우월감과 말의 승리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다는 보화가 더 크기 때문에, 변명보다 고백을 택하고 공격보다 경청을 택하며, 필요한 경계를 세우되 보복을 삶의 목적에 두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가치 질서를 점검해야 합니다. 큰 행사와 눈에 보이는 성과가 보화가 되면 사람은 수단이 됩니다. 봉사자는 숫자로 평가받고, 연약한 사람은 효율을 늦추는 존재로 취급되며, 다음 세대는 교회의 미래 회원을 확보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보게 됩니다. 아이들을 잔존율로 다루는 순간 사역은 실패합니다. 신앙은 정보만 전달해서 형성되지 않고, 따뜻한 관계와 반복되는 공동체의 실천 속에서 자랍니다. 이것은 성인 공동체에도 같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고객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알고 짐을 나누며 함께 주님을 따르는 몸입니다.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만큼 무엇을 반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비교와 분노와 소비를 훈련할 수 있습니다. 화면을 켤 때마다 타인을 평가하고, 자극적인 말에 오래 머물며, 내 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만 상상한다면 그런 반복이 마음의 방향을 만듭니다. 반대로 정해진 시간에 말씀 앞에 앉는 일, 식탁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 감사할 일을 입술로 고백하는 일, 정기적으로 나누고 섬기는 일은 보화를 향한 사랑을 몸에 새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한꺼번에 거대한 결정을 과시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과장된 결심보다 신실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이번 주에 무엇 하나의 자리를 바꾸어 보십시오. 하루의 첫 화면을 열기 전에 짧게라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오래 미룬 사과를 정직하게 시작하십시오. 소비하려던 것 하나를 멈추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누십시오. 불필요한 험담의 자리에서 침묵하거나 대화를 바른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가족 한 사람의 말을 해결하려 서두르지 말고 끝까지 들으십시오.
이 행동들이 구원을 사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어떤 보화를 발견했는지를 증언합니다. 우선순위는 감정적인 순간의 고백만으로 증명되지 않고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길을 혼자 힘으로 완성하려 하면 곧 지치거나 교만해집니다. 우리는 보화를 찾는 사람인 동시에, 보화를 보여 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셋째, 교회는 그 보화를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비유에는 한 사람이 등장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 사람을 고립된 수집가로 만들지 않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기쁨은 사람을 이웃에게로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자기 백성을 한 몸으로 부르시고, 받은 은혜를 세상 속에서 증언하게 하십니다. 나 혼자만 안전한 신앙, 나만 위로받고 나만 복받는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넓이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함께 보화를 기뻐한다는 것은 먼저 예배를 다시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예배는 종교적 의무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흩어진 욕망이 다시 하나님께 향하고 세상의 가격표가 말씀 앞에서 교정되는 시간입니다. 한 주 동안 우리는 성과가 곧 가치라고 배우고, 소유가 곧 안전이라고 들으며, 상대를 이겨야 산다는 압력을 받습니다. 예배는 그 거짓말을 멈추고 창조주와 구원자 앞에 서게 합니다. 우리는 생산하지 않고 먼저 받습니다.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자비를 구합니다. 서로 다른 형편의 사람들이 같은 은혜로 살아가는 한 몸임을 고백합니다.
예배는 몸의 일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듣고, 말씀 앞에 자세를 낮추며, 서로의 존재를 견딥니다. 기술은 거리가 있거나 몸이 약한 성도에게 참여의 길을 넓힐 수 있고 준비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 유익을 가볍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면으로 필요한 부분만 골라 소비하는 습관이,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주는 예배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편리한 콘텐츠 묶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으신 사람들의 몸입니다.
함께 기뻐하려면 질문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의 탐구와 의심이 반드시 배교의 증거는 아닙니다. 성숙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가" 묻는 사람,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 교회의 상처 때문에 문턱에서 망설이는 사람에게 성급한 정답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감추어진 일을 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고난받는 이를 정죄했습니다.
때로 가장 지혜로운 목회적 응답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그럼에도 주님을 함께 바라보며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랑을 설교하면서 서로의 이름과 형편을 모른다면 세상은 우리의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조용히 멀어지는 일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 자리에 앉아 있지만 오래도록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은 장년, 가족을 돌보느라 지쳐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 퇴직 후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 신앙의 회의를 숨긴 채 미소만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안다는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모든 돌봄에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큰 프로그램 하나보다 이름을 부르는 작은 관계를 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짐을 맡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성도가 서로의 삶을 살피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식사 한 번, 정기적인 전화 한 통, 병원에 동행하는 시간, 새로 온 사람 옆에 앉아 예배 순서를 알려 주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이게 합니다. 이런 일은 통계표에 크게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화는 종종 밭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이 드린 돌봄과 아무도 보지 않은 눈물과 오래 참고 지킨 약속을 귀하게 보십니다.
돈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재정은 목적이 아니라 사명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많이 모으는 것 자체가 믿음의 승리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건물과 행사와 조직 유지가 사람을 살리는 목적을 밀어내지 않도록 계속 물어야 합니다. 재정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다루고, 결정 과정에서 약한 이들의 필요를 듣고, 어려운 성도와 지역의 이웃을 실제로 돌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과시와 경쟁을 좇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말한다면 메시지는 흐려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승리나 문화적 지배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집단의 힘이 커지는 것보다 크고, 어느 선거의 결과보다 오래갑니다. 우리는 정의와 생명을 위해 책임 있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우리의 판단을 하나님의 최종 심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거짓을 퍼뜨리며 두려움을 선동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왕을 따르는 증언은 진실과 사랑과 인내를 함께 요구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그 증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데서 시작됩니다. 약속 시간을 지키고, 실수를 숨기지 않으며, 공을 독점하지 않고, 불리한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십시오. 권한이 있을 때 더 조심하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경쟁자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선하게 수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다른 질서를 보여 주십시오. 모든 선택에서 즉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때로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온유한 사람이 약하다고 오해받으며, 섬김이 당연하게 소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화는 즉각적인 보상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서로를 성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증언입니다. 자녀를 성적과 진로의 결과로만 바라보지 않고, 배우자를 기능과 역할로만 대하지 않으며, 연로한 부모를 효율의 부담으로만 보지 않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삶의 리듬과 관계적 따뜻함이 신앙 형성에 깊이 관여합니다. 가정예배를 완벽한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전에, 식탁에서 서로의 말을 끊지 않는 연습을 하십시오. 실패한 가족에게 "왜 그것밖에 못했느냐"고 묻기 전에 "지금 네 마음은 어떠냐"고 물으십시오. 기도는 훈계의 마무리가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하나님께 함께 맡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지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단지 교회 건물과 운영 방식과 익숙한 노래만 남겨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남겨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어떤 성공보다 귀하다는 살아 있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어른들이 실제로 어떻게 시간과 돈을 쓰며, 갈등 속에서 어떻게 사과하고, 약한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전달됩니다. 잠언 4장은 가르치는 이도 한때 배우는 자리에 있었다는 세대의 전승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어른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배우는 어른으로 서야 합니다.
그렇기에 실패를 숨기지 않는 것도 전승의 일부입니다. 자녀와 후배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복음의 권위는 무오한 부모와 지도자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붙드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내가 그때 옳지 않았다. 네 말을 듣지 않았고 상처를 주었다.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어른은 복음이 실제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도 잘못된 관행과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책임 있게 고쳐야 합니다. 진실을 감추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보화 위에 먼지를 쌓는 일입니다.
우리 곁에는 아직 보화를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일 수도 있고,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우리가 할 일은 밭을 대신 파 주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결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진주 장사도 오래 찾았습니다. 신앙을 손해와 의무의 목록으로 소개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기려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이긴 논쟁이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지 보이게 하십시오.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을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로만 받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를 완벽하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받은 나라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순종이 세상을 단숨에 바꾸지 못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도 진행됩니다. 한 사람을 오래 품는 인내, 진실한 회계 한 줄, 화해를 향한 첫 문장, 다음 세대를 위한 꾸준한 기도가 주님의 손에서 사용됩니다.
지친 이에게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만 주지 말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여 주십시오. 성공한 이에게 세상의 박수만 더하지 말고 그 성공보다 주님이 크심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실패한 이에게 낙인을 찍지 말고 회개의 길과 다시 시작할 자리를 열어 주십시오. 의심하는 이에게 조급한 결론을 강요하지 말고 함께 말씀을 찾으십시오. 외로운 이의 곁에 앉으십시오. 교회가 이렇게 살 때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단지 말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현실임을 엿보게 됩니다.
맺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두 비유는 짧지만 우리 삶 전체를 비추는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보화로 여기고 있는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실은 무엇이며, 무엇을 얻기 위해 시간과 힘과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가. 내 일정과 소비와 말과 관계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귀하다는 고백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자신을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을 평가하려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우리를 보화 앞으로 초대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낸 위대한 탐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길 잃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값을 지불해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값없이 사랑받았기에 다른 주인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얼마나 값진지 보여 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결단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도 버려야 합니까, 저것도 포기해야 합니까?"만 묻지 말고 "주님 안에서 내가 무엇을 받았습니까?"를 먼저 물으십시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습니다. 실패가 마지막 이름이 되지 않는 새 길을 얻었습니다. 죽음조차 끊을 수 없는 소망을 얻었습니다. 이 보화를 바라볼 때 내려놓음은 공허로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더 든든한 손에 삶을 맡기는 일이 됩니다.
혹시 지금 신앙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분이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은 쌓이는데 기쁨은 메말랐습니까. 자신을 더 몰아붙이기 전에 주님께 눈을 열어 달라고 구하십시오. 보화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판매 목록만 길게 건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천천히 읽고, 십자가 앞에 머물고, 받은 은혜를 하나씩 기억하십시오.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받으십시오. 기쁨은 억지 미소가 아니라 가치의 발견에서 옵니다. 눈물 중에도 주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깊은 기쁨이 자랄 수 있습니다.
혹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미루지 마십시오.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한 사과, 이익 때문에 붙든 부정직, 불안을 달래기 위한 과도한 소비,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반복,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과장, 다른 이를 통제하려는 집착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중독과 부채와 관계의 문제는 믿을 만한 목회자와 전문가와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모든 문제를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우리를 진실하게 도움을 구하는 자리로도 이끕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한 가지 작은 순종을 정하십시오.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에 드리거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거나, 감추었던 잘못을 인정하거나, 필요한 이에게 구체적으로 나누십시오. 가족과 함께 감사 한 가지를 말하고, 공동체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의 이름을 불러 안부를 물으십시오. 작은 순종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견한 보화가 우리 몸의 길을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함께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의 수와 행사의 크기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약한 사람의 속도에 맞추며, 다음 세대를 미래의 자원으로 소비하지 않고 지금 우리와 함께한 지체로 사랑하겠습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다루고, 세상의 진영 논리보다 진실과 이웃 사랑을 앞세우며, 잘못했을 때 회개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힘을 자랑하는 계획이 아니라 보화이신 주님을 높이는 길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비유의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기쁨이 그를 움직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못하는 메마른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을 발견했기에 좋은 것들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더 깊이 사랑하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서 감사히 사용하며, 일을 자기 가치의 근거로 삼지 않으면서 성실히 감당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되 그것을 주신 분을 잊지 않고, 상실 속에서 울되 소망 없는 사람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당장 눈에 띄는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낙심하지 맙시다. 정직을 택했는데 손해를 볼 수 있고, 화해를 시도했는데 상대가 아직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으며, 자녀와 이웃을 오래 품어도 변화가 더딜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선택의 가치를 결과만으로 다시 계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든 보화는 상황의 호전에만 있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열매를 재촉하지 말고 오늘 맡겨진 선을 행하십시오. 할 수 있는 만큼 진실하게 말하고, 안전한 경계를 지키며, 사랑으로 기다리십시오.
밭 아래 감추어져 있어도
보화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듯,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은 충성도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를 빈 들판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보화가 감추어진 밭으로 부르십니다. 우리 손에 든 작은 것만 바라보다가 보화를 놓치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시다. 그 가치를 믿고, 기쁨으로 선택하고, 공동체와 함께 그 길을 걸읍시다. 우리의 시간과 소유와 관계와 미래를 왕이신 주님께 맡깁시다. 그분은 우리가 내려놓은 것보다 크시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신실하시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선하십니다.
주님, 주님이 우리의 보화이십니다.
주님을 아는 기쁨이 다른 욕망의 질서를 새롭게 하게 하소서.
억지 희생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기쁜 응답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이 보화를 말로만 자랑하지 않고,
사랑과 진실과 나눔과 인내로 보이게 하소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기뻐하며 돌아가,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한 걸음을 믿음으로 내딛게 하소서. 아멘.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2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