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18일, 기독교학술원이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제120회 월례학술포럼을 열었다. 주제는 '바른 성경이해'였다.
기독일보가 23일 전한 바에 따르면, 김영한 원장과 박정관 박사는 한국교회 성경 해석의 고질적 난점으로 단어, 문맥, 영해 세 가지를 꼽으며 경종을 울렸다. 해석의 혼란이 성도의 신앙을 흔들고 교회를 세속화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진단이다.
9월 총회 시즌이다. 결의와 표어가 쏟아진다. 그 한가운데서 이 소식은 교회가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묻게 한다. 제도와 구호보다 먼저, 우리가 매주 펴는 본문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세 가지 난점 — 단어, 문맥, 영해
박정관 박사(문화연구원 소금향 원장, 풀러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장신대 은퇴교수)는 문제를 세 층으로 짚었다.
단어의 어원만 쫓다 보면 한계에 부딪힌다. 단어와 문맥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지 않으면 뜻이 비틀린다. 알레고리 해석, 이른바 '영해'가 자의적으로 흐르면 성경의 권위가 흔들린다.
이 세 가지는 멀리 있는 학문의 문제가 아니다. 설교나 소그룹에서 "이 단어의 원뜻은…"으로 시작하다 본문의 흐름을 놓치거나, "영적으로는…"을 이유로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결론을 끌어오는 일은 낯설지 않다. 그 습관이 반복될수록 성경이 말씀하는 자리에서 밀려나고, 해석자의 기호가 그 자리를 채운다.
박 박사는 자의적 해석과 알레고리가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는 세속적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고백하는 교회일수록 더 진지하게 들을 경고다.
세 가지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하나씩 보자.
단어 — 어원이 뜻을 정하지는 않는다

강단에서 오래 들어 온 설명이 있다. 헬라어 '두나미스(δύναμις)'가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니, 성령의 능력은 폭발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런데 순서가 거꾸로다. 다이너마이트는 19세기에 발명되어 헬라어에서 이름을 빌려 왔을 뿐이다. 바울은 다이너마이트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생긴 단어의 느낌을 거슬러 올라가 옛 본문에 입히는 것을 신약학자 D. A. 카슨은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의미의 시대착오(semantic anachronism)라고 불렀다.
어원 풀이가 늘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단어의 뜻은 어원이 아니라 그 단어가 그 시대에, 그 문장 안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로 정해진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시원하다'고 할 때, 그 말이 온도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사전이 아니라 쓰임으로 안다. 어원은 단서가 될 수 있지만, 본문의 흐름을 이기는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은 이 문제가 더 커졌다. AI에게 "이 헬라어 단어의 원뜻을 알려 달라"고 물으면 몇 초 만에 매끄러운 설명이 나온다. 설명이 매끄러울수록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줄어든다. 그럴듯한 어원 풀이는 예전보다 훨씬 빨리 퍼지고, 한 번 강단에 오르면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문맥 — 한 구절이 단락을 떠날 때
빌립보서 4장 13절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빌립보서 4장 13절
이 구절은 흔히 시험 앞의 학생에게, 경기 앞의 선수에게, 사업을 시작하는 성도에게 건네진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약속처럼 읽힌다.
그런데 바로 앞 두 절을 함께 읽으면 결이 달라진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그리스도 안에서 견딜 수 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은 무엇이든 이룬다는 뜻이기보다 어떤 형편도 견딜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예레미야 29장 11절도 비슷하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는 약속은 개인의 앞날을 축복하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바로 앞 절은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라고 말한다. 포로로 끌려간 공동체에게, 칠십 년을 그 땅에서 살아 내라는 말씀과 함께 주어진 약속이다. 희망은 빠른 탈출이 아니라 긴 기다림 끝에 있었다.
두 구절 모두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단락을 떠난 구절은 원래 하려던 말보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영해 — 영적 의미가 본문을 덮을 때

알레고리 해석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읽은 방식이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여관을 교회로, 여관 주인을 사도 바울로 읽었다. 비유의 세부 하나하나에 구원의 역사를 대응시킨 것이다.
아름다운 묵상이고, 그 안에 담긴 신앙고백도 참되다. 문제는 그 비유가 원래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는가를 놓친다는 데 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는 율법교사의 질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유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로 끝난다. 이웃이 되라는 날카로운 부름이, 여관과 데나리온의 상징 풀이 속에서 흐려진다.
한국교회 강단의 '영해'는 대개 이보다 훨씬 가볍다. 본문에 나온 숫자나 물건, 지명에 영적 의미를 붙여 설교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듣는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게 하면, 그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해석자에게 돌아간다.
본문 중심 해석과 역사적 지시성
김영한 원장은 한스 프라이(1922–1988)의 본문 중심 해석이 남긴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역사적 지시성이 약해지지 않도록 개혁신학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라이는 예일대학교의 신학자로, 『성경 내러티브의 쇠퇴』(1974)에서 근대 이후 성경 해석이 본문 뒤의 '실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몰두하다가 정작 본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자체를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성경을 먼저 이야기로, 그 이야기가 그리는 세계 안에서 읽자는 제안은 설교자에게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 방향에는 조심할 지점이 있다. 본문의 세계만 강조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흐려질 수 있다. 부활이 '이야기 속의 사건'으로만 남으면 신앙은 서사의 감동은 얻어도 역사의 소망은 잃는다. 김 원장이 말한 개혁신학의 보완이 필요한 자리가 여기다.
그리고 김 원장은 해석의 최종 목표가 지적 과시가 아니라 삶의 적용과 성품의 변화, 곧 섬김(케노시스)과 봉사(디아코니아)에 있다고 전했다. 케노시스는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말에서 온 표현이다. 말씀을 바르게 읽는 일의 끝은, 말씀처럼 자기를 비우는 삶이라는 뜻이다.
포럼은 성육신 유비처럼 인간 언어로 오신 말씀을 온전히 받되, 문자적·역사적 읽기와 성령의 조명 아래 영적 의미를 구하는 일을 나누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른바 '신학적 성경 읽기'다.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영적 의미를 구하며 삶에 적용하라는 방향이다.
말씀이 사람의 언어로 오셨기에
우리는 그 언어를 성실하게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한다.
적용이 본문보다 앞설 때

이 진단은 설교자와 교사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유튜브와 단편 콘텐츠가 해석의 속도를 높일수록 성도 역시 '빠른 적용'을 원하게 된다. 1분짜리 영상은 본문 한 절과 삶의 교훈 한 줄을 곧바로 잇는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단락과 장르와 역사적 배경은 시간이 없어서 빠진다.
그런데 적용이 본문보다 앞서면 적용은 결국 자기 확신이 된다. 이미 정해 둔 결론이 있고, 본문은 그 결론을 꾸미는 인용문이 된다. 설교는 설득력 있어 보여도 권위는 잃는다.
개혁교회가 붙들어 온 역사적·문법적 해석은 건조한 학문 절차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해석의 주도권을 교회 권력이나 개인의 영감이 아니라 성경 자신에게 돌려드리겠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니 이 해석 방법은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의 훈련이다.
문맥을 읽고, 장르를 살피고, 성경 전체의 증언 안에서 한 구절을 듣는 일은 느리다. 그 느림이 교회를 지킨다. 해석이 흔들리면 예배와 교육과 심방의 말들도 함께 가벼워진다.
빨리 적용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
그것이 말씀 앞의 겸손이다.
분당의 한 회중을 섬기는 자리에서

한 교회를 섬기는 자리에서 돌아보면, 프로그램과 행사보다 먼저 물을 질문이 있다.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가.
소그룹 교재와 설교 준비에서 어원 설명과 '영적 적용'이 문맥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주중 성경공부에서도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한 구절을 빠르게 '의미'로 바꾸기보다, 문장이 속한 단락과 책 전체를 먼저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을 위해 설교를 준비할 때, 소그룹을 인도할 때, 혼자 말씀을 읽을 때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질문 다섯 가지를 적어 둔다.
① 이 구절의 앞뒤 단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 최소한 한 단락 앞과 뒤를 함께 읽는다
② 이 본문은 어떤 종류의 글인가 — 이야기인지, 시인지, 편지인지, 예언인지에 따라 읽는 법이 다르다
③ 처음 들은 사람들에게 이 말은 무슨 뜻이었는가 — 포로기 공동체인가, 감옥의 사도인가, 율법교사인가
④ 성경 전체의 증언과 어떻게 맞물리는가 — 한 구절로 교리를 세우지 않고, 다른 본문과 함께 듣는다
⑤ 그다음에,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 적용은 이 순서의 맨 끝에 온다
다섯 번째 질문이 맨 끝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용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적용의 자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다.
본문 앞에서 멈추는 연습
포럼이 제안한 방향은 단순하다. 역사적·문법적 토대 위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영적 의미를 구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길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한국교회가 본질을 회복하려면 화려한 구호보다 본문 앞에서 멈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거창한 결단이 아니어도 된다.
오늘 읽은 본문 한 단락을
문맥과 함께 다시 천천히 읽는 데서,
그 연습은 시작된다.
참고: 기독일보, 「성경 해석의 혼란, 한국교회 본질 회복 절박한 과제」, 2026.9.23 / 기독교학술원 제120회 월례학술포럼, 2026.9.18, 온누리교회 화평홀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4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