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2026년 9월 23일)는 가수 박진영 씨가 '첫열매들' 모임을 통해 펼친 삼위일체 강의가 정통 교리와 충돌한다는 비판 기사를 실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성부만을 궁극적 참 하나님으로 두고, 성자를 성부보다 열등한 위치에 놓으며, 성령을 독립된 위격이 아닌 하나님의 영·능력·에너지로 설명한다.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닌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 대신, 뜻과 계획이 같은 세 존재의 협력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기사는 이 설명을 4세기의 아리우스주의와 나란히 놓고 분석했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인물의 가르침이기에, 이 문제는 한 사람의 사견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의 분별 과제로 다가온다. 다만 이 글은 한 사람을 겨누려는 글이 아니다. 이 논란이 성도들에게 다시 묻게 한 질문,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함께 짚어 보려는 글이다.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다

이 지점은 표현의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4세기 교회가 가장 치열하게 씨름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성자가 성부에게서 난 가장 높은 피조물이라고 가르쳤다.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 그의 주장을 요약하는 표현으로 전해진다. 성자는 존귀하지만, 성부와 같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이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리고 성자가 성부와 본질이 같다(호모우시오스)고 고백했다. 당시 이와 비슷해 보이는 대안도 있었다. 성자가 성부와 본질이 비슷하다(호모이우시오스)는 표현이다. 헬라어로 두 단어의 차이는 글자 하나(ι, 이오타)뿐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글자 하나를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같다'와 '비슷하다' 사이에, 성자가 하나님이신가 아닌가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여기에 성령에 대한 고백을 더했다. 성령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오늘 많은 교회가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왜 그렇게까지 싸웠는가
이 논쟁이 추상적인 철학 싸움이 아니었던 이유는 구원 때문이다.
성자가 성부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면, 십자가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드림이 아니라 한 피조물의 희생이 된다. 아무리 높은 피조물이라도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을 하나님께로 데려갈 수 없다. 아리우스와 맞섰던 아타나시우스가 거듭 붙든 논리가 이것이다. 참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나 에너지라면, 기도와 성화와 교회는 힘의 작용으로 축소된다. 우리는 힘에게 기도하지 않고, 에너지에게 위로받지 않는다.
신론의 오류는 곧 구원론의 오류로 이어진다. 그래서 교회는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통해 "한 본질, 세 위격"을 붙잡아 왔다. 삼위일체는 신학자들만의 난제가 아니다. 예배와 세례와 구원을 지탱하는 신앙의 심장이다.
성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는가
보도된 강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성령을 인격이 아닌 능력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이 문제는 성경 본문 몇 곳만 함께 읽어도 분명해진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가 땅값을 감추었을 때 베드로는 "네가 성령을 속이고"라고 말한 뒤, 이어서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한다. 성령을 속인 것이 곧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쓴다. 능력은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할 수 있는 분은 인격이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약속하시며, 그분이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16장).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은 인격의 일이다.
이 본문들은 성령을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분으로 소개한다.
인기는 진리의 척도가 아니다

요즘 교계를 보면 인기와 조회수와 집회 규모가 진리의 척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수천 명이 모이면 그 자리에서 선포된 말도 옳을 것 같고, 유명한 사람이 말하면 한 번 더 믿음이 간다.
그러나 복음은 여론조사로 확정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하라고 했고(요일 4:1), 바울은 "다른 복음"을 경계했다(갈 1:6–9). 바울이 그 편지에서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받지 말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가 기준이라는 뜻이다.
유명인의 신앙 간증이 유익할 수는 있다. 삶의 무게가 실린 고백은 많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나 간증의 감동과 가르침의 정확성은 따로 물어야 한다. 그 가르침이 성경과 교회의 공적 고백에 부합하는지를.
영향력이 클수록 분별의 책임도 커진다. "듣기 좋은 말"과 "바른 말"을 구분하는 훈련이 성도의 기본 영성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은
그 말이 참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목회 현장에서는 비난보다 가르침으로

목회 현장에서는 이 논란을 비난 경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편이 낫다. 특정 인물을 향한 분노는 쉽게 퍼지지만, 그것으로 성도의 신앙이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성도들이 실제로 헷갈리는 지점은 "삼위일체가 왜 중요한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교리 설명보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 안에 이미 들어 있다.
· 예배는 삼위 하나님께 드린다
· 세례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행한다(마 28:19)
· 축도는 세 위격의 은혜를 빈다(고후 13:13)
· 기도는 성령 안에서,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매주 듣는 축도 한 문장 안에 삼위 하나님이 계신다. 성도들은 이미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예배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보다, 이미 드리고 있는 예배의 문법을 다시 알아듣게 하는 일이다.
흔히 쓰는 비유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
주일학교나 새신자 교육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비유들이 있다. 선의로 쓰지만, 대부분 교회가 오래전에 거부한 가르침으로 기운다.
· 물·얼음·수증기 — 한 물질이 상태만 바뀐다는 비유는, 한 하나님이 때에 따라 성부로, 성자로, 성령으로 모습만 바꾼다는 양태론에 가깝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부의 음성과 성령의 강림이 동시에 있었다는 장면과 맞지 않는다
· 한 사람이 아버지이자 아들이자 남편인 것 — 역시 한 인격이 역할만 바꾼다는 양태론이다
· 달걀의 껍데기·흰자·노른자 — 세 부분이 합쳐 하나가 된다는 비유는, 성부·성자·성령이 각각 하나님의 3분의 1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교회는 세 위격 각각이 온전히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 태양·빛·열 — 빛과 열이 태양에서 나온 결과물처럼 읽히면, 성자와 성령을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보는 종속론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완벽한 비유는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편이 정직하다.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 무엇과도 똑같지 않으시다. 비유보다 나은 것은 성경이 보여 주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마 3:16–17). 세 분이 한 장면에 함께 계신다.
새신자에게 한 문단으로 설명한다면
어려운 용어 없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십니다. 세 분이 각자 따로 있는 세 신이 아니고, 한 분이 모습만 바꾸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도 온전히 하나님, 아들 예수님도 온전히 하나님, 성령님도 온전히 하나님이시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그렇게 보여 주고 교회가 2천 년 동안 그렇게 고백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 삼위일체는 설명을 다 끝내야 믿는 교리가 아니라, 예배하며 알아 가는 하나님이다.
성도가 유명인의 강의를 들고 왔을 때
어떤 성도가 "그분 강의 들었는데 좋던데요"라고 말할 때, 곧바로 틀렸다고 말하면 대화가 닫힌다. 대신 함께 물어볼 질문 세 가지를 건넬 수 있다.
①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는가 — 참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에 가까운 존재인가
② 이 가르침은 성령님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 인격이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힘인가
③ 이 가르침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세례와 맞는가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교회의 고백과 같은 말을 하는가
이 질문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질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분별하는 질문이다. 성도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돕는 편이, 목회자가 대신 정답을 말해 주는 것보다 오래 남는다.
경계는 미움이 아니라 교회의 양심이다
교단 총회들이 이단과 이단성 안건을 다루는 이유도 같은 선상에 있다. 경계는 미움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교회의 양심이다.
그렇다고 경계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무엇이 틀렸는지만 가르치고 무엇이 옳은지는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는 두려움은 배우지만 고백은 배우지 못한다. 성도들이 삼위일체를 '어려운 신학 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으로 말하게 돕는 설교와 교육이 필요하다.
분별은 단죄로 끝나지 않고, 바른 고백을 세우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의 언어로 드러나는 분별

성도의 분별은 결국 예배의 언어로 드러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세례 고백이 익숙한 만큼, 그 고백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함께 익숙해져야 한다.
주일학교와 새신자 교육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성자·성령으로 계신다"는 고백을 생활 언어로 풀어 주는 일이 시급하다. 아이들이 축도를 들으며 그 안에 세 분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되면, 그것이 가장 오래 남는 교리 교육이다.
삼위일체를 알면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를 알면 삼위일체가
살아 있는 신앙이 된다.
유행이 아니라 진리를
인기는 모을 수 있어도 구원하지는 못한다.
한국교회가 이번 논란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특정 인물에 대한 감정 소모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다. 성부·성자·성령이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다시 고백할 때, 예배와 선교와 목회의 기초도 다시 든든해진다.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유행이 아니라 진리이며, 그 진리의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출처: 기독일보, 「박진영 삼위일체론, 아리우스 닮은꼴…교회 경고」, 2026.9.23 —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64482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4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