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석학원 건학 50주년을 맞아 지난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충남 천안 백석대학교에서 '개혁주의 전통 속 철학'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코람데오닷컴이 24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유럽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개혁철학 국제학술대회가 유럽 밖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을 비롯해 네덜란드·미국·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네시아·브라질·멕시코 등 여러 나라 학자들이 모였다. 큰 틀은 '문화·기술·발전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관점', 집중 주제는 '일, 소명 그리고 전문직 삶의 미래'였다.
학술대회 소식이 목회 칼럼의 주제가 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이번 대회가 붙든 질문은 강의실보다 오히려 주일 예배당 의자에 더 가까이 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불안을 안고 가는 성도들이 매주 그 의자에 앉기 때문이다.
기술이 일을 얼마나 대신하느냐가 아니라

대회를 관통한 질문은 단순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사람의 판단을 대신하고 플랫폼과 자동화가 노동 환경을 바꾸는 시대에, 인간의 일과 직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직업이 단지 생계 수단인지,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기술 발전 속에서도 유효한지, 인간의 전문성과 책임을 어디까지 기계에 넘길 수 있는지를 물었다.
크리스천투데이 사전 보도에 소개된 이경직 백석문화대 총장의 말처럼, 물어야 할 것은 "기술이 일을 얼마나 대신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인간의 일이 어떻게 소명이 될 수 있는가"였다.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앞의 질문은 기술을 주어로 삼고, 뒤의 질문은 사람을 주어로 삼는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해마다 바뀐다. 올해 AI가 대신하지 못하던 일을 내년에는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뒤의 질문에 대한 답은 기술의 속도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답을 빨리 내놓는 AI 시대일수록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소명이라는 말의 뿌리
'소명'이라는 말이 오늘 이렇게 넓게 쓰이게 된 데에는 역사가 있다.
중세 교회에서 '부르심'은 주로 사제와 수도자의 길을 뜻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수도원으로 가는 사람이었고, 농부와 상인과 장인의 일은 그보다 낮은 세상의 일로 여겨졌다.
종교개혁은 이 경계를 허물었다. 루터는 구두장이의 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일도 하나님이 맡기신 부르심이라고 가르쳤다. 독일어 '베루프(Beruf)'가 '부르심'이면서 동시에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도 이 흐름과 이어져 있다. 칼뱅도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개혁주의 전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세운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교 연설에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한 치도 없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강연자를 보낸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자유대학교다. 이후 헤르만 도예베르트 같은 학자들이 이 생각을 철학으로 체계화했고, 그것이 오늘 '개혁철학'이라 부르는 전통이다.
이 계보에서 보면 이번 대회의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술이 바뀌어도, 일터 역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는 오래된 고백을 새 시대에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기조강연이 판 자리
기조강연은 그 질문을 더 깊이 팠다.
강영안 교수(서강대 명예·칼빈신학교)는 탈세속 기술시대의 공동선과 인간의 취약성, AI 거버넌스를 다뤘다. 최용준 교수(한동대)는 서구에서 형성된 개혁철학을 아시아의 빠른 기술 변화와 사회문화적 특수성 안에서 새롭게 검토할 필요를 짚었다.
영국의 일레인 스토키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라는 주제로, 노동을 생산성과 효율로만 재단할 수 없으며 이웃을 섬기는 삶과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암스테르담 자유대의 게리트 글라스는 전문직과 소명의 관계를 살폈다.
한국어 세션에서는 AI 환원주의와 인간관, 가상현실을 활용한 복음 경험, 의료 AI의 책임 문제까지 현장의 쟁점이 함께 올라왔다.
강영안 교수가 꺼낸 '인간의 취약성'이라는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기술의 언어는 대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대상으로 본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지치지 않게. 그러나 성경은 연약함을 없애야 할 결함으로만 보지 않는다. 연약함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자리다. 지치지 않는 기계가 일의 기준이 되면, 지치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이 된다. 교회가 이 흐름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AI 목회자'는 말씀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
특히 눈길을 끈 것은 'AI 목회자' 논의다.
감정을 흉내 내고 질문에 답하는 기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을 맡은 인격적 증인의 자리와 같은가. 진리 전달과 영적 돌봄에 따르는 책임을 인공지능에 지울 수 있는가.
기술의 가능성을 말하기 전에 목회의 본질과 책임 주체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며칠 전 HTSN의 AI 신학·윤리 선언이 경계한 '전능한 기술' 낙관과도 맞닿는 대목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증인'이다. 증인은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겪은 것을 자기 삶을 걸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도들이 부활의 증인이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삶 전체가 바뀌었고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기계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장 때문에 회개하지도, 순종하지도, 대가를 치르지도 않는다.
도구는 쓰되,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의 일터는 세속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 논의는 추상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일은 타락 이후의 벌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 2:15) 하셨다. 일은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에게 맡겨진 부르심이었다. 타락 이후 일이 수고와 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일 자체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된 적은 없다.
그러니 성도의 노동은 주일 예배와 떨어진 '세속'이 아니다. 직장과 가정, 돌봄과 전문직의 자리가 곧 소명의 자리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골로새서 3장 17절
바울은 몇 절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 종들도 있었다. 자기 일을 스스로 고를 수 없던 사람들에게도, 그 일은 주께 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 권면은 AI가 효율을 높여 주는 시대에도 일의 주체와 목적을 바꾸지 않는다.
월요일의 불안을 설교가 받아 주는가
요즘 성도들의 직업 세계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번역하는 사람, 디자인하는 사람, 상담하는 사람, 회계를 맡은 사람, 코드를 쓰는 사람. 내 일이 몇 년 뒤에도 남아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불안 앞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두 가지로 갈리기 쉽다. 하나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위로로 서둘러 덮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다. 주일 설교가 월요일의 일터를 다루지 않으면, 성도는 신앙을 일주일에 한 번 켜는 스위치처럼 여기게 된다.
설교와 심방은 그 일상의 무게를 함께 지고 하나님 앞에서 읽어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실제로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 설교에서 직업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부른다 — "직장에서"가 아니라 병동에서, 공장에서, 교실에서, 모니터 앞에서
· 심방에서 가족과 건강만 묻지 말고 일을 묻는다 — "요즘 일은 어떠세요"라는 한 문장이 대화를 연다
·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성도들이 서로의 고민을 나눌 자리를 만든다 — 의료인, 교사, 개발자처럼 비슷한 질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 일을 잃거나 바꾸는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생계만이 아니라 부르심의 자리를 다시 찾는 일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목회자 자신의 일도 같은 질문 앞에 선다
AI가 설교문 초안을 돕고 행정 부담을 덜어 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한 번 물어야 한다. 그렇게 아낀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쓰인다면, 도구는 목회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성도 한 사람 곁에 더 오래 머무는 데, 말씀 앞에 더 오래 앉는 데 쓰인다면, 도구는 목회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특정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며, 말씀 앞에서 먼저 회개하고 순종하는 목자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는다. 성도의 불안한 직업 세계와 노동의 의미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소명의 언어로 다시 붙들어 주는 일이 오늘의 목회가 감당할 몫이다.
학문에도, 목회에도 같은 위험이 있다
원탁토론에서는 '오늘날 기독교 학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물음으로 남았다.
학문을 경력과 전문성의 축적으로만 보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소명의 자리가 흐려진다. 목회에도 같은 위험이 있다. 성과와 콘텐츠에 쫓기다 보면, 말씀과 사람 앞에 머무는 책임이 뒤로 밀리기 쉽다.
소명은 전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문성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묻는다. 의사의 실력은 환자를 위해, 교사의 지식은 학생을 위해, 목회자의 말은 회중을 위해 있다. 그 방향이 거꾸로 서면, 같은 실력이 섬김이 아니라 경력이 된다.
더 빠른 답보다 더 좋은 질문

이번 대회에서 개혁철학이 남긴 것은 더 빠른 답보다 더 좋은 질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기술은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주일 아침 예배당 의자에는 작업복을 벗고 온 사람, 밤 근무를 마치고 온 사람, 내일 발표를 걱정하는 사람이 함께 앉는다. 그들의 일이 AI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다.
교회가 이 질문을 붙들 때,
AI 시대의 일도 목회도
다시 소명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코람데오닷컴 2026.9.24 / 크리스천투데이 2026.9.12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4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