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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지팡이와 웃음이 함께 있는 거리 (스가랴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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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본문 · 스가랴 8:1-8
2026년 9월 24일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미래를 말할 때 자주 숫자부터 봅니다.

출석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다음 세대가 몇 명인지, 봉사자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예산이 늘었는지 줄었는지를 살핍니다. 숫자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 필요합니다. 그러나 숫자만 바라보면 우리의 눈은 쉽게 두려움에 붙잡힙니다. 사람이 줄면 미래도 줄어든 것처럼 느끼고, 힘이 약해지면 하나님의 일도 약해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스가랴의 말씀은 폐허를 바라보던 백성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미래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건물이나 강한 군대가 먼저 서 있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과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함께 있습니다.

"예루살렘 길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4-5절).

폐허 위에서 들은 약속

스가랴가 말씀을 전하던 공동체는 상처를 지나온 공동체였습니다.

스가랴서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 제2년, 곧 주전 520년 무렵에 시작됩니다(1: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이십 년 가까이 지났지만, 무너진 성전의 재건은 반대와 낙심 속에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같은 해에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 백성을 다시 일으켰고, 멈췄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스 5:1-2).

그들은 무너진 성읍과 흔들린 신앙, 돌아왔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일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귀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모든 것이 곧바로 제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은 쌓아야 했고, 예배는 다시 배워야 했고, 두려움에 익숙해진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받아야 했습니다.

8장은 7장에서 이어지는 대답입니다. 다리오 제4년, 백성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날을 기억하며 지켜 온 금식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7:1-3).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금식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되물으시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7:5-10). 그리고 8장에서 슬픔의 날이 기쁨의 절기로 바뀔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그 미래의 첫 장면이 바로 노인과 아이가 함께 있는 거리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꾸며 낸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거하시겠다는 언약적 약속이 일상으로 번역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6절). 폐허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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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인과 아이입니까

공동체에서 가장 빠르게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앞세운 장면이 아닙니다.

노인은 걸음이 느리고 때로 돌봄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아직 생산성으로 평가하기 어렵고, 실수하며 자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화는 쓸모가 큰 사람만 안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가장 느린 사람과 가장 작은 사람이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세상입니다.

지팡이는 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당장 이익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지팡이와 웃음을 회복의 증거로 삼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강은
강한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약한 사람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예배당에도 여러 세대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지킨 분이 있고, 이제 막 신앙의 말을 배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질문이 많아진 청년이 있고, 자녀를 돌보느라 지친 부모가 있으며, 역할이 줄어들어 자신이 뒤로 밀렸다고 느끼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예배하지만 서로의 시간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어른은 젊은 세대를 조급하다고 여기고, 젊은이는 어른의 말을 오래된 방식이라고 밀어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조용히 있어야 할 대상으로, 노인은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분류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세대를 따로 관리하지 않고 한 거리에 함께 세웁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입니까. 모든 연령이 각자의 방에서 방해받지 않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한 거리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교회입니까.

오늘 본문은 세 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한 사람이 안전한 공동체를 회복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세대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오늘의 진실과 평화로 준비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 우리 교회의 거리와 가정의 식탁, 우리의 말과 시선을 다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한 사람이 안전한 공동체를 회복하십니다

본문의 노인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노년을 낭만적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힘이 줄고 걸음이 느려지며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시편 71편의 시인도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절)라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깊으면 약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함을 부인하는 기술이 아니라 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도 지팡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복은 지팡이가 필요 없는 몸을 약속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팡이를 든 채 거리로 나와도 두렵지 않은 공동체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빠른 사람을 중심으로 공간과 시간을 설계하는 데 익숙합니다. 회의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고, 안내는 작은 글씨를 잘 읽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며, 봉사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합니다. 말이 느린 사람의 이야기는 중간에 끊기고, 여러 번 설명해야 하는 사람은 수고를 더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은 가장 빠른 사람만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밀려나지 않고, 아이가 눈치를 보지 않으며, 질문이 많은 청년이 침묵을 강요받지 않는 곳입니다. 평화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약한 사람의 몸이 실제로 안심하는 질서입니다.

생존의 기도가 증언의 기도로

시편 71편의 노인은 자신을 약한 사람으로만 규정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쇠하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지만, 뒤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8절). 노년의 기도가 생존에서 증언으로 자랍니다.

이것은 노인의 약함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노년을 수동적인 대기실로 만들지 않는 성경의 시선입니다. 교회가 어르신을 식사 대접의 대상이나 행사의 관객으로만 바라본다면, 귀한 사명을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돌봄은 필요하지만, 돌봄만으로 사람을 규정하면 그의 이야기를 잃습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에게는 공동체가 들어야 할 증언이 있습니다.

노년의 사명은 예전 자리를 끝까지 붙잡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직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시무의 종료와 소명의 소멸을 구별해야 합니다. 민수기의 레위인 규정을 보면 오십 세부터는 무거운 회막 일을 그치지만, 그 뒤에도 형제들과 함께 회막에서 돕는 역할이 남았습니다(민 8:25-26).

자리를 비우는 것과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이는 앞에서 결정하던 자리에서 물러나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직접 운영하던 일을 다음 사람에게 맡기고 경험을 나누는 멘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 자리의 소유권이 아니라, 때마다 공동체를 살리는 다른 형태의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교회가 노년의 성도를 존중한다는 것은 무조건 모든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새것을 위해 오래된 사람을 치운다는 뜻도 아닙니다. 존중은 그의 몸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의 경험을 듣고, 동시에 다음 세대가 책임 있게 자라도록 자리를 열어 주는 것입니다.

어르신도 후대가 자신과 똑같이 해야만 믿음을 지킨 것이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도 이전 세대의 언어가 낯설다는 이유로 그 안의 눈물과 충성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평화의 거리는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이기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명이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아이의 놀이는 안전의 척도입니다

본문 속 아이들은 거리에서 놉니다.

위험이 가득한 거리에서 아이는 자유롭게 뛰지 못합니다. 어른의 눈빛이 차갑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공간에서도 아이는 몸을 움츠립니다. 아이들이 논다는 것은 성읍에 위협이 줄었다는 뜻이며, 공동체가 생존을 넘어 기쁨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의 아이들이 예배당에서 단지 소음을 만드는 존재로만 보인다면 우리는 본문의 기쁨을 놓칩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공동체가 아직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물론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이 질서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는 배우고 훈련받아야 하며, 예배를 존중하는 태도도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의 목적은 아이를 어른처럼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통제하면 잠깐 고요할 수 있지만 마음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신앙은 따뜻한 돌봄과 안전한 관계 속에서 자랍니다. 아이는 설명보다 먼저 표정을 읽고, 교리보다 먼저 공동체가 자신을 반기는지 느낍니다. 우리가 주는 눈빛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첫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의 '조용한 이탈'을 걱정합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출석하면서도 자신의 질문이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마음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질문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는 함께 가야 합니다.

질문을 불신앙으로 몰아붙이면, 우리는 진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사람을 진리의 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칭찬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의심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던 도마를 밀어내지 않으시고 가까이 부르셔서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요 20:27).

공간과 시간과 언어를 살피십시오

그렇다면 약한 사람이 안전한 교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먼저 공간을 살펴야 합니다. 누가 계단 앞에서 멈추는지, 누가 안내를 읽지 못하는지, 누가 예배 후 혼자 남는지, 누가 식탁에 자리를 얻지 못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시간을 살펴야 합니다. 느린 사람의 말을 기다려 주는지, 아이를 돌보는 부모에게 참여 가능한 시간을 마련하는지, 직장인의 피로와 돌봄 노동을 고려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언어를 살펴야 합니다. 나이가 많다고 결정에서 자동으로 배제하거나, 젊다고 미숙함만 강조하거나, 아이를 문제로 부르는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거룩함은 약함을 숨기는 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을 품되 죄와 무책임을 방치하지 않고, 책임을 묻되 사람을 버리지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 안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라, 진실을 사랑으로 말하고 회복할 길을 함께 찾는 질서입니다.

피해와 위험이 있는 일을 덮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을 이유로 사람을 조롱하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것도 복음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거리는 진실과 자비가 함께 걷는 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강한 사람만 가까이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고(막 10:14), 병든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세상이 가장자리로 밀어낸 이들을 식탁으로 부르셨습니다. 동시에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그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거룩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버리지 않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전은 친절한 분위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진실과 은혜가 우리의 말, 제도, 예산, 동선에 스며들 때 약한 사람이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지팡이를 든 사람에게는 전할 이야기가 있고,
뛰노는 아이에게는
공동체가 들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세대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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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보여 주는 거리에는 세대가 함께 있습니다.

단지 같은 건물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공의 삶을 나눕니다. 오늘 교회는 부서가 잘 나뉘어 있어서 각 연령에 맞는 돌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분화가 단절이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는 장년의 예배를 모르고, 장년은 청소년의 질문을 모르며, 청년은 노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잃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지만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세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거리는 각 세대의 방을 없애라는 명령이 아니라, 방 사이에 길을 내라는 초대입니다.

신앙은 정보처럼 파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물건처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어지며 자라는 것입니다. 노년의 이야기는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고, 청년의 질문은 전통을 공격하는 소음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묻고 어른이 대답하며, 어른이 모르는 것을 젊은이가 설명하고, 모두가 성경 앞에서 다시 배우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말씀 아래 있고 배우는 사람도 말씀 아래 있습니다. 권위는 질문을 금지하는 힘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람을 자라게 하는 책임입니다.

성공담보다 은혜로 다시 일어난 이야기

시편 71편의 노인은 후대에 하나님의 힘을 전하려 합니다.

그가 전할 것은 자신의 업적이 아닙니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세웠는지, 내가 얼마나 오래 봉사했는지만 남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지나며 하나님이 어떻게 붙드셨는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산은 성공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패했을 때 어떻게 회개했는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시간에 어떻게 예배를 지켰는지, 관계가 깨졌을 때 어떻게 먼저 사과했는지, 상실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곁을 내주었는지가 다음 세대에게 필요합니다. 완벽한 어른의 이야기는 거리감을 만들지만, 은혜로 다시 일어난 어른의 이야기는 길을 보여 줍니다.

어르신에게 부탁드립니다. 젊은 세대에게 결론만 주지 말고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요즘 사람은 참을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전에, 여러분도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음을 말해 주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언제나 쉬웠던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붙들었지만 눈물이 났고, 순종했지만 답을 몰랐으며, 넘어졌지만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다음 세대는 위대한 영웅보다, 자기와 같은 연약함을 지나며 하나님께 붙들린 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젊은 세대에게도 부탁드립니다. 오래된 말투가 불편하다고 그 안의 모든 지혜를 버리지 마십시오. 어떤 표현은 고쳐야 하고, 어떤 관행은 성경과 복음 앞에서 새롭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누리는 예배의 자리에는 누군가 오래 지켜 온 기도와 수고가 있습니다. 지금은 낯설어 보이는 찬송 한 곡에도 한 사람의 장례와 한 가정의 회복, 전쟁 같은 세월을 통과한 믿음의 기억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존중은 무비판적 복종이 아니며, 경청은 동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먼저 들은 뒤 말씀 앞에서 함께 분별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아이들과 청소년에게는 질문할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질문과 대화는 신앙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성경과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충돌해 보일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게 하십시오.

어른이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확인한 뒤 다시 이야기하자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한다고 권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권위를 세웁니다.

가정은 세대가 만나는 첫 거리입니다

신앙은 교회에서 가정으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말씀에서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신명기의 가르침은 특별한 교실만이 아니라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신 6:7) 이루어집니다. 식탁에서 감사의 이유를 나누고, 차 안에서 한 주의 두려움을 듣고, 잠들기 전 짧게 축복하는 작은 반복이 영혼을 만듭니다. 거창한 가정예배를 시작했다가 며칠 만에 포기하는 것보다, 짧아도 정직하게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화를 내고도 예배 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아이는 신앙이 현실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말을 돌아보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함께 기도하면, 아이는 회개가 패배가 아니라 복음의 길임을 배웁니다.

가정의 권위는 실수하지 않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 먼저 무릎 꿇는 데서 생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세대 사역을 행사로만 생각하면 아이들은 무대 위에 있을 때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신 거리에서는 아이가 일상의 구성원입니다. 예산을 세울 때 그들의 필요를 묻고, 공간을 정할 때 안전과 접근성을 살피며, 예배와 봉사의 일부를 실제로 맡겨야 합니다. 참여는 사진을 찍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책임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작은 일을 맡기고 기다려 주며, 실패했을 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양육입니다.

노년의 성도 역시 행사 때 간증 한 번 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지 않습니다. 한 명의 청년과 정기적으로 식사하며 기도할 수 있고, 부모 세대가 지친 가정에 따뜻한 연락을 건넬 수 있으며, 교회 역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노년은 돌봄을 받는 시기만이 아니라 영적 유산을 남기는 증인의 시기입니다. 기억을 기록하고 축복 기도문을 남기며, 자신의 실패와 회복을 정직하게 나누는 일은 다음 세대의 뿌리를 깊게 합니다.

차이를 다루는 복음의 문법

그러나 세대 연결을 낭만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대 사이에는 실제 갈등이 있습니다. 예배 음악, 의사결정 방식, 언어, 정치적 판단, 재정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차이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처리하는 복음의 문법입니다. 상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지 않고, 사실과 해석을 구별하며, 성경이 명확히 말하는 것과 지혜롭게 판단해야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통일은 모든 의견의 동일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사랑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의 문제이지만, 그 잘못 앞에서 내가 어떤 영을 품는지는 나의 문제입니다.

세대 갈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윗세대의 실수가 젊은 세대의 냉소를 의롭게 만들지 않고, 젊은 세대의 미숙함이 윗세대의 모욕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내 반응이 그리스도를 닮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옳은 말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몸에는 눈과 손, 발과 귀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눈이 손더러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합니다(고전 12:21). 세대도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완성되지 않은 어른이기 전에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지체입니다. 노인은 지나간 세대이기 전에 지금 공동체에 필요한 증인입니다. 청년은 미래의 일꾼이기 전에 오늘 함께 책임지는 성도입니다. 중년은 모든 부담을 혼자 짊어지는 기둥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대기 명단에 있지 않습니다.

세대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거리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어른의 지팡이는 아이에게 두려운 노쇠의 상징만이 아니라 끝까지 붙드신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아이의 웃음은 어른에게 소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직 일하고 계신다는 소망의 소리가 됩니다. 청년의 질문은 공격이 아니라 공동체가 더 깊이 진리를 배울 기회가 됩니다. 부모의 피로는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함께 짐을 나눌 요청으로 들립니다. 이것이 한 몸의 청각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미래는 오늘의 삶에서 진실과 평화의 습관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회복의 환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사는 힘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미래의 평화를 오늘의 진실로 준비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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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8장의 약속은 감상적인 그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장의 뒷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16-17절).

노인과 아이가 함께 있는 평화로운 거리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거짓이 줄고, 약자를 해치는 판단이 멈추고, 이웃을 향한 악한 계획이 거부될 때 그 거리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주시지만, 백성은 그 미래에 합당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는 덮어 두는 고요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갈등이 없는 상태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드러나면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린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말한 사람이 평화를 깬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거짓과 불의가 평화를 깨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평화는 덮어 두는 고요함이 아닙니다. 진실과 공의가 자리를 잡아 약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편한 사실을 정직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사실을 이용해 사람을 조롱하거나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진실과 회복을 함께 붙드는 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다투지 않는다고 평화로운 가정은 아닙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고, 한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모두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얼어붙은 질서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질문할 수 있고, 배우자가 상처를 말할 수 있으며, 부모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가정이 안전한 가정입니다. 진실을 말할 때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 들을 때 곧바로 변명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평화는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지 않고, 매일의 대화 습관으로 자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진실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고,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이름과 직분이 아니라 내용과 열매를 살펴야 합니다. 의견을 낸 사람의 편을 먼저 가르는 대신, 그 말이 성경과 사실에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누가 이기는가보다 공동체가 어떻게 더 거룩하고 안전해지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평화를 향해야 한다는 본문의 방향은 오늘 회의실과 당회실, 부서 모임과 가정의 대화에도 적용됩니다.

말과 예산에서 평화가 드러납니다

미래의 평화를 준비하려면 우리의 말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세대를 향한 낙인을 멈추십시오.

요즘 아이들은 다 그렇다거나, 어른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거나, 청년은 책임감이 없다거나, 노인은 고집만 세다는 식의 말은 사람을 보기 전에 범주로 재판합니다. 범주는 편리하지만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세대를 무더기로 사랑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이름과 사정을 아십니다. 우리도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에게 책임 있게 말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분노가 빠르게 퍼집니다. 짧고 강한 문장이 사람을 한순간에 선과 악으로 나누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공동체의 판단을 끌고 갑니다. 다음 세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자신이 보고 싶은 정보만 반복해서 보며 확신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사랑하는 신앙은 공유하기 전에 확인하고, 모르면 단정하지 않으며, 정정해야 할 때 체면보다 진실을 택합니다. 예배에서 진리를 고백하고 일상에서 소문을 즐긴다면 우리의 거리는 안전해질 수 없습니다.

평화는 예산에서도 드러납니다. 무엇에 돈을 쓰는지는 우리가 어떤 미래를 믿는지 보여 줍니다. 다음 세대를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안전한 공간과 훈련된 교사, 돌봄 체계에는 인색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접근 가능한 시설과 이동 지원은 뒤로 미룰 수 있습니다.

한 몸을 고백한다면 자원도 한 몸의 필요를 따라 흘러야 합니다. 화려한 행사를 줄이더라도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돌봄, 질문을 나눌 작은 모임, 세대가 만날 식탁에 투자해야 합니다.

상호 돌봄은 특정 부서의 사업이 아닙니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영구히 나누지 않는 공동체의 방식입니다. 오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내일 다른 이를 도울 수 있고, 젊은이가 디지털 사용을 어르신에게 가르치는 동안 어르신은 인생의 기다림을 젊은이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어른에게 기쁨을 주고, 어른은 아이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합니다. 돌봄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시혜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순환입니다.

평화가 몸을 얻는 작은 실천들

우리가 만드는 작은 실천을 생각해 봅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세대가 함께 식사하며 정해진 답 없이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르신 한 분과 청년 한 명을 연결해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예배에서 읽을 수 있는 짧은 순서를 맡기고, 실수해도 따뜻하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기록할 때 건물과 직분자의 명단만이 아니라 이름 없이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회의 자료의 글씨를 크게 하고, 늦은 시간 모임을 줄이며, 돌봄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이의 의견을 미리 들을 수 있습니다. 평화는 이런 구체성 속에서 몸을 얻습니다.

설교 | 지팡이와 웃음이 함께 있는 거리 (스가랴 8:1-8) 본문 이미지

그러나 실천만 강조하면 우리는 다시 자기 힘으로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려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의 약속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시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절).

회복의 근원은 우리의 기획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생산해 하나님께 가져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받아 순종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실천은 자랑이 아니라 응답이며, 실패했을 때도 다시 은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어진 약속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고, 십자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세대와 계층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교회의 평화는 취향이 맞아서 생기는 친밀감보다 깊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은혜로 용서받았고 같은 주님의 식탁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다른 세대를 정죄하는 손이 내려가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람을 나도 받을 용기가 생깁니다.

십자가는 평화의 대가가 값싸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갈등을 피해서 평화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를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도 평화를 위해 편안함의 일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시간표를 조정하고, 익숙한 방식을 조금 양보하고, 내가 말할 차례에 먼저 듣고, 사과할 이유를 찾으며, 약한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야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의 호의만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내 속도를 바꾸는 행동입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물러나는 일도 아니며, 오래된 사람이 끝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일도 아닙니다. 책임 있게 이양하고 책임 있게 배우는 과정입니다.

어른은 자리를 열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젊은이는 자리를 받으면서도 이전 세대의 수고를 잊지 않습니다. 아이는 구경꾼이 아니라 작은 책임을 배우고, 공동체는 그 성장을 오래 기다립니다. 이렇게 세대가 연결될 때 전통은 돌처럼 굳지 않고 강물처럼 흐르며, 변화는 뿌리 없는 유행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종이 됩니다.

현실이 약속과 멀어 보일 때

혹시 오늘 우리 눈앞의 현실이 이 약속과 너무 멀어 보입니까.

교회학교 숫자는 줄고, 어르신은 외롭고, 청년은 바쁘며, 중년은 지쳐 있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의 청중도 완성된 성읍에서 이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전 공사가 겨우 다시 시작된 폐허 한가운데서, 아직 두려움과 부족함이 남은 자리에서 약속을 들었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듭니다. 작은 순종이 당장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해도 하나님이 이루실 거리를 바라보며 오늘 한 칸을 정돈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작아 보여도 미래의 거리를 세우는 일입니다. 한 어르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일이 느려 보여도 언약의 기억을 잇는 일입니다. 한 청년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고 함께 공부하는 일이 번거로워 보여도 믿음의 뿌리를 돕는 일입니다. 한 부모에게 쉬어 갈 시간을 주는 일이 사소해 보여도 가정의 예배를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대 통합을 말하면서도 서로를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일의 짧은 인사만으로는 한 사람의 계절을 알기 어렵습니다. 공동체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만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름을 묻고, 살아온 길을 듣고, 지금 가장 두려운 것과 감사한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해야 합니다. 경청은 대답을 준비하는 침묵이 아니라,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배우는 사랑입니다.

또한 회복은 한 번의 행사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세대 연합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보다 그 뒤에 관계가 남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진 속에서는 함께 웃었지만 평소에는 연락하지 않는다면 연결은 아직 시작에 머문 것입니다.

작은 약속을 정하고 지키십시오. 한 달에 한 번 안부를 묻고, 기도 제목을 기억하고, 다음 만남에서 지난 이야기를 다시 물으십시오. 신뢰는 큰 감동보다 기억해 주는 성실함 속에서 자랍니다. 하나님은 반복되는 작은 충성을 통해 낯선 사람을 가족으로 빚으십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찾아야 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의 의견만 전체의 뜻으로 여기지 말고, 돌봄과 노동과 건강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의 필요를 물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직접 무엇이 두려운지 묻고, 어르신에게 어떤 도움이 존엄을 지키는지 물으며, 청년에게 무엇을 맡고 싶은지 묻고, 지친 부모에게 무엇을 내려놓아야 숨을 쉴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대신 말해 주는 친절을 넘어 당사자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깊은 존중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효율만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가장 느린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일정이 늦어질 수 있고, 질문을 충분히 듣는 동안 결론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자신이 일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도 한 사람을 멈추어 보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옷자락을 만졌을 때, 급히 가야 할 길 위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찾으셨습니다(막 5:30-34). 교회도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사람을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놓친 한 사람을 다시 식탁으로 부르는 일이 곧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로운 거리는 오늘 우리의 진실한 말, 공정한 판단, 열린 자리, 서로 돌보는 습관을 통해 미리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종의 근원은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약속 때문에 진실을 말하고, 경쟁이 아니라 한 몸의 은혜 때문에 자리를 나누며,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 때문에 느린 사람을 기다립니다.


맺으며

설교 | 지팡이와 웃음이 함께 있는 거리 (스가랴 8:1-8) 본문 이미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 앞에 한 거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거리에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있고 뛰노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지팡이는 약함을 숨기지 않고, 아이의 웃음은 미래가 살아 있음을 알립니다.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평화입니다. 한 세대가 사라진 뒤 다른 세대가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함께 머무는 장면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거리를 만들고 있습니까. 빠른 사람만 편한 거리입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만 들리는 거리입니까. 오래된 사람은 물러나기만 하고 젊은 사람은 기다리기만 하는 거리입니까. 아니면 약한 사람이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어르신이 증언할 수 있으며, 청년이 질문할 수 있고,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 수 있는 거리입니까.

이 질문을 프로그램에만 맡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표정, 대화, 회의, 예산, 식탁, 예배의 습관이 그 거리를 만듭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마음에 품읍시다.

첫째, 약한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한 걸음 걸읍시다. 누가 우리 공동체에서 자꾸 뒤처지는지 살피고 그의 곁에 서십시오.

둘째, 다른 세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읍시다. 가르치기 전에 묻고, 판단하기 전에 들으며, 들은 것을 기도로 가져가십시오.

셋째, 평화를 위해 진실을 선택합시다. 소문을 멈추고, 잘못했을 때 사과하며, 불편한 문제를 사랑과 책임으로 다루십시오. 큰 구호보다 이 작은 순종이 거리를 바꿉니다.

설교 | 지팡이와 웃음이 함께 있는 거리 (스가랴 8:1-8) 본문 이미지

어르신 여러분, 여러분의 지팡이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붙드신 세월을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자리를 사랑하기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후대가 자라도록 문을 열어 주십시오.

청년과 장년 여러분, 여러분의 분주함이 관계를 잃게 하지 마십시오. 앞선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동시에 아이들이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십시오.

부모 여러분,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려 하지 말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복음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아이들과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에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귀한 지체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이 거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쉽게 자기 세대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속도를 불편해하며, 내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서로를 한 몸으로 부르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실 때 지팡이를 짐으로만 보지 않고 증언으로 보며, 아이의 소리를 방해로만 듣지 않고 소망으로 듣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우리의 두려움보다 클 때 자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폐허 속의 백성에게 완성된 그림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오늘의 순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눈앞의 부족함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실 공동체를 바라봅시다.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약한 사람이 안전하며, 의와 화평이 입 맞추고(시 85:10), 아이들의 웃음과 어른들의 기도가 함께 울리는 교회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미래를 오늘 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일로 시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팡이와 웃음이 함께 있는 거리를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스가랴가 성전 기초를 놓던 백성에게 전한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견고히 하십시오(슥 8:9, 13).

세대를 갈라놓는 말 대신 이어 주는 말을 선택하고, 약한 사람을 재촉하는 대신 곁에서 걸으며, 미래를 염려하는 대신 오늘의 진실을 살아냅시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의 평화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거리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함께 나눌 질문

소그룹이나 가정에서 이 말씀을 나누실 때 다음 질문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① 스가랴 8장 4-5절의 거리 풍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장면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지팡이입니까, 아이들의 웃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② 우리 교회에서 계단 앞에서 멈추거나, 예배 후 혼자 남거나, 말하다가 끊기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번 주에 그 곁에 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③ 나와 다른 세대의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달에 어떤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④ 16-17절은 평화로운 거리를 만드는 '오늘의 일'을 말합니다. 내 말과 판단 가운데 진실과 화평을 위해 바꾸어야 할 것 하나는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지팡이를 든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거리를
우리 교회와 가정에서 먼저 보게 하소서.
빠른 걸음보다 곁에 머무는 걸음을 배우게 하시고,
가르치기 전에 듣고, 판단하기 전에 묻게 하소서.
진리와 공의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따라
오늘 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4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