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천투데이에 지난 23일 실린 이금석 교수의 글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간 이야기를 다룬다.
500년 전 한 도시에서 벌어진 갈등인데, 읽다 보면 오늘 한국교회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교회가 양보해도 되는 일과, 양보하는 순간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되는 일. 칼빈이 제네바에서 가르려 했던 것이 바로 그 경계였기 때문이다.
1538년 부활절, 성찬상 앞에서
1536년 여름, 스물일곱 살의 칼빈은 하룻밤만 묵고 지나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들렀다. 그 도시는 불과 두 달 전 시민 총회에서 "복음에 따라 살겠다"고 서약하며 개혁 도시가 되었다. 파렐은 그를 붙잡았다. 학자로 조용히 살고 싶었던 칼빈은 결국 그 도시에 남았다.
문제는 곧 드러났다. 칼빈과 파렐은 성찬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을 교회가 권면하고, 필요하면 성찬에서 잠시 멀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 스스로 권징할 권한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의회는 그 권한을 교회에 넘기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성찬 방식의 문제가 겹쳤다. 시의회는 이웃 도시 베른의 예식을 따라 누룩 없는 떡을 쓰라고 명령했다. 칼빈과 파렐에게 떡의 재료 자체가 본질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를 시의회가 정치적 이유로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1538년 부활절, 두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성찬을 집례할 수 없다며 성찬을 베풀지 않았다. 이틀 뒤인 4월 23일, 시의회는 그들에게 사흘 안에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편의와 타협이 더 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명령대로 떡을 바꾸고, 권징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면 자리는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 길로 가지 않았다.
교회가 양보해도 되는 일과
양보하는 순간 교회가 아니게 되는 일.
칼빈은 그 둘을 가르려 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3년

추방된 칼빈을 받아 준 곳은 스트라스부르크였다. 그곳의 개혁자 마르틴 부처가 그를 불러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맡겼다.
돌아보면 이 3년은 칼빈의 생애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많은 것을 거둔 시간이었다. 1539년에는 『기독교 강요』를 크게 고쳐 썼다. 1536년의 초판이 작은 신앙 교본이었다면, 1539년 판은 거의 새 책이라 할 만큼 분량과 체계가 달라졌다. 이듬해에는 『로마서 주석』을 냈고, 1541년에는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피난민 교회에서는 회중이 함께 부를 시편 찬송을 엮었다. 부처 곁에서 목회하며, 권징과 직분이 실제로 교회 안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가까이서 보았다. 제네바에서 이루지 못한 교회의 질서를 그는 이 도시에서 몸으로 배웠다.
같은 시기 제네바 교회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도력이 비자 분열이 생겼고, 예배 출석은 줄었다. 1539년 3월, 카르펜트라의 주교이자 추기경인 야코포 사돌레토가 제네바 시민에게 편지를 보내 로마 교회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제네바에는 그 편지에 제대로 답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답장은 추방당한 칼빈이 썼다. 1539년 9월 1일 자로 나온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이다. 자신을 내쫓은 도시를 위해, 그 도시 교회의 고백을 대신 변호한 것이다. 몸은 제네바 밖에 있었지만 그는 그 교회를 내려놓지 않았다.
"하루에도 천 번씩 죽어야 하는 십자가"
제네바는 점점 칼빈을 다시 부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1540년 3월 29일,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제네바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백 번 죽는 편을 택하겠다고. 그곳의 삶은 하루에도 천 번씩 죽어야 하는 십자가였다고.
상처가 남은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일은 그만큼 두려웠다. 그를 모욕하고 내쫓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도시에 있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는 존경받는 동료와 안정된 목회, 연구할 시간이 있었다.
1541년 5월 1일, 제네바 시의회는 만장일치로 칼빈을 다시 청했다. 그는 여러 달을 망설였다. 파렐은 다시 한번 그를 강하게 설득했다. 1541년 9월 13일, 서른두 살의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 자리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다. 부르심이 거기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뒤 첫 설교에서 그는 3년 전 멈추었던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이어서 강해했다고 전해진다. 누구를 탓하는 연설도, 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말씀이 끊긴 자리에서 다시 말씀을 이어 간 것이다.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다.

칼빈이 붙든 교회의 표지
그는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질서부터 세웠다. 1541년 11월 20일, 제네바는 칼빈이 초안을 쓴 『교회 법규』를 채택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네 직분을 두고, 목사와 장로가 함께 성도의 삶을 살피는 치리회(컨시스토리)를 만들었다. 3년 전 추방의 원인이 되었던 권징이 교회의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이다.
칼빈에게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강요』 4권에서 그는 참된 교회의 표지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들리는 것, 그리고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대로 집행되는 것이다.
권징은 그 두 표지와 나란히 놓인 세 번째 표지로 적히지는 않았다. 대신 칼빈은 권징을 교회의 힘줄에 비유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가르침이 교회의 영혼이라면, 권징은 몸의 지체들을 서로 붙들어 제자리에 있게 하는 힘줄과 같다는 것이다. 힘줄이 끊어진 몸은 모양은 남아 있어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칼빈의 뒤를 이은 개혁교회가 벨직 신앙고백에서 권징을 교회의 세 번째 표지로 적은 것도 이 생각에서 나왔다.
말씀을 듣고, 함께 떡을 떼고, 죄와 상처를 치유하는 질서가 없으면 공동체의 모양은 남아도 방향은 사라진다. 편의와 인기에 맞춰 말씀을 줄이고 권징을 형식만 남겨도,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칼빈이 없던 3년 동안 제네바가 겪은 혼란은 그런 버팀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경고다.
표지를 잃으면
교회의 모양은 남아도
방향은 사라진다.
권징은 벌이 아니라 회복이다
권징이라는 말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무겁게 들린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거나, 교권이 약한 사람을 누르는 도구로 쓰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권징이 그렇게 쓰였다면 그것은 칼빈이 말한 권징이 아니다.
칼빈은 권징의 목적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추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지 않게 하는 것. 둘째, 선한 사람들이 악한 본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것. 셋째, 잘못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세 목적 어디에도 복수나 배제가 없다. 권징의 끝은 회복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순서도 그렇다. 먼저 단둘이 만나 권하고,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과 함께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한다. 바울도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했다.

오늘의 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

이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기술이나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도 비슷한 유혹 앞에 서 있다. 일이 쌓이면 본질보다 효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도가 줄면 표지보다 분위기를 살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설교는 짧고 가볍게, 성찬은 1년에 두어 번 형식만, 권징은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쪽이 편하다. 총회와 교단의 현안으로 분주할수록 개교회는 "우리가 정말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목회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남는다. 내가 지키는 것은 제도인가, 말씀과 성례와 돌봄인가.
성찬 앞에서 서로를 살피는 교회
칼빈이 추방을 무릅쓰고 지키려 한 것은 결국 성찬의 자리였다. 성찬은 한 떡과 한 잔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의 식탁이다. 그 식탁 앞에서 우리는 자기를 살피고(고전 11:28),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한다(마 5:23-24).
성찬 주일을 앞두고 한 주 동안 자기 성찰의 본문과 기도를 함께 나누는 일, 성찬 전에 서로 용서를 구할 시간을 조용히 마련하는 일은 작은 교회도 할 수 있다. 권징이 무섭게 들린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성찬 앞에서 서로를 살피는 교회가 권징을 사랑의 회복으로 다시 세울 수 있다.
당회가 먼저 말씀 아래 서는 교회
칼빈이 세운 치리회는 목사 혼자가 아니라 장로들과 함께 성도의 삶을 살폈다. 오늘의 당회도 행정과 재정만 다루는 회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요즘 예배에서 보이지 않는지, 누가 오래된 갈등 속에 있는지, 누가 회복의 길을 찾고 있는지를 함께 묻고 기도하는 자리여야 한다. 그리고 그 권면은 당회원 자신에게도 먼저 향해야 한다.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 권징은 곧 교권이 된다.
떨어져 있는 시간도 준비의 시간이다
칼빈에게 스트라스부르크는 실패의 시간이 아니었다. 추방은 상처였지만, 그 3년 동안 그의 신학은 깊어졌고 목회는 단단해졌다. 제네바의 재출발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그 시간에 무르익은 고백과 경험이었다.
지금 사역이 멈춘 것 같은 목회자, 공동체에서 밀려나 있다고 느끼는 성도에게도 이 이야기는 위로가 된다. 떨어져 있는 동안 단련된 고백이 공동체를 다시 세운다. 하나님은 쫓겨난 자리에서도 다음을 준비하게 하신다.
개혁은 구호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질을 붙든 채 고난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들어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사명은 편한 길보다 이미 상처 난 자리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떠나기 쉬운 자리보다 다시 서야 할 자리를 택했다.
부르심이 있는 자리로

칼빈이 "하루에도 천 번씩 죽어야 하는 십자가"라고 부른 길을 택했듯, 2026년의 교회도 본질에서 벗어난 습관을 되짚고 다시 말씀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
돌아간 칼빈이 먼저 한 일은 멈췄던 본문을 다시 펴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다시 펴야 할 본문이 있다. 말씀을 줄여 온 강단, 형식만 남은 성찬상,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된 권면의 자리가 그렇다.
고달프더라도 교회를 살리는 길은 결국 그 길 하나다.
다시 제네바로 돌아간 칼빈처럼,
우리도 부르심이 있는 자리로
돌아갈 용기를 구한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이금석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 다시 제네바로」(2026.9.23) / 장 칼뱅, 『기독교 강요』(1559) 4권 1장 9절, 12장 1·5절 / 칼뱅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1540.3.29) / 제네바 『교회 법규』(1541)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5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