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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이슬람 이해와 오늘의 선교 | 외부의 위협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먼저 돌아보는가

루터의 이슬람 이해와 오늘의 선교 | 외부의 위협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먼저 돌아보는가 본문 이미지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가 지난 9월 19일 광명 대원장로교회에서 제135차 정기학술대회를 열었다. 주제는 '이슬람 선교'였다.

유해석 교수의 은퇴를 기념하는 자리였지만, 발표는 역사의 한 장면을 되짚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16세기 유럽이 오스만 제국의 팽창 앞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마르틴 루터가 그 위기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읽어 냈는지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질문을 던졌다.

기독일보(9월 20일)가 전한 이 학술대회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모인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곧 교회 자신의 신앙 상태를 비춘다는 것이다.


"다음은 어디인가"라는 불안

유해석 박사는 '16세기 유럽 위기 담론과 마르틴 루터의 이슬람 이해'를 발표했다. 그는 루터가 활동하던 시기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고 짚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천 년을 이어 온 동방 기독교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것이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가 무너졌고, 1529년 가을에는 술레이만 1세의 군대가 비엔나를 포위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비엔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것은 군사 소식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어디인가"라는 불안이 신앙과 세계를 보는 눈 자체를 흔들었다. 거리마다 종말의 소문이 돌았고, 설교단에서는 두려움이 쉽게 증오로 바뀌었다.

그런데 루터는 이 불안을 정치나 군사 문제로만 남겨 두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의 확장을 기독교 공동체의 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했다. 바깥의 적과 싸우기 전에 교회 안의 부패부터 회개해야 한다고 보았다.

위기가 '공포에서 심판으로, 심판에서 개혁의 요구로' 읽힌 셈이다. 논찬을 맡은 최유석 박사도 루터가 외부 위기를 넘어 공동체의 영적·신학적 회복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오늘에 주는 의미를 찾았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벧전 4:17)


회개를 먼저 말한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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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년 비엔나 포위 무렵, 루터는 『튀르크인과의 전쟁에 관하여』를 썼다. 이 글에서 그는 두 가지를 분명히 나누었다.

첫째,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와 기도다. 루터는 황제의 군대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가 자기 죄를 돌아보지 않은 채 적을 향해 칼을 드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했다. 1541년에는 『튀르크에 맞서 기도하라는 권고』를 따로 써서 온 교회에 회개의 기도를 요청했다.

둘째, 이슬람과의 전쟁을 십자군식 종교전쟁으로 정당화하지 않았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걸고 군대를 모으는 것을 그는 강하게 비판했다. 백성을 지키는 군사적 대응은 세속 권력, 곧 황제의 책임이었다. 교회의 무기는 말씀과 기도였다. 이른바 두 왕국론이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대하 7:14). 루터가 붙든 순서도 이것이었다. 땅의 회복보다 먼저 백성의 돌이킴이 있었다.

거울로 삼은 무슬림의 경건

눈여겨볼 대목은 루터의 인식이 한 시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보가 제한되어 있던 초기에 루터는 무슬림의 기도와 금식, 절제된 삶에 주목했다. 1530년에는 튀르크 포로로 살았던 한 수도사의 견문록에 서문을 붙여 다시 펴냈는데, 거기서 그는 무슬림의 겉으로 드러난 경건이 많은 그리스도인보다 낫다고 인정했다.

루터는 그것을 유럽 기독교 사회의 신앙적 태만과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거울로 삼았다. 우리가 복음을 모른다고 여기는 이들도 저렇게 기도하고 절제하는데, 복음을 안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묻는 셈이었다.

꾸란을 직접 읽은 뒤

1542년, 루터는 로버트 오브 케튼의 12세기 라틴어 번역으로 꾸란을 직접 읽었다. 그해 그는 1300년 무렵 도미니코회 수사 리콜도가 쓴 『꾸란 반박』을 독일어로 옮겨 펴냈다. 이 무렵부터 그의 비판은 도덕 비교를 넘어 교리적 대립으로 깊어진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은 구원론의 토대다. 꾸란은 예수를 존귀한 선지자로 부르지만 그분의 신성과 십자가의 죽음을 부인한다. 루터는 예수를 선지자 정도로만 이해하는 체계가 복음의 핵심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1543년 바젤에서 신학자 비블리안더가 꾸란 라틴어 번역을 처음으로 인쇄해 내려 하자, 시 당국은 위험하다며 출판을 막았다. 루터는 이 출판을 지지했고, 결국 나온 책에 서문을 썼다. 무슬림이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제대로 반박하고 제대로 증언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모르면서 두려워하기보다 알고 분별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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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전도, 세 가지 접근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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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김성운 박사는 '무슬림 전도 방법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와 대안'을 발표했다. 그는 대결적 접근, 성취론적 접근, 역동적 등가 접근을 차례로 살폈다.

대결적 접근은 논쟁과 변증으로 이슬람의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진리를 분명히 하는 장점이 있지만, 사람을 이겨야 할 상대로 만들기 쉽다. 성취론적 접근은 이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조각을 복음이 완성한다고 보고, 꾸란의 예수 구절 같은 것을 다리로 삼는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만 꾸란을 제멋대로 기독교식으로 읽을 위험이 있다. 역동적 등가 접근은 무슬림의 문화와 형식 안에서 복음의 의미를 옮기려 한다. 문화의 벽은 낮추지만, 복음 고유의 표현이 흐려질 수 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분명하다. 차이는 정직하게 대조하되, 무슬림을 적대하지 말고 온유하게 들은 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선명하게 증언하라는 것이다.

차이는 숨기지 않고,
사람은 적대하지 않고,
복음은 흐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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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일

논찬을 맡은 최원진 박사의 지적은 목회 현장에 더 가까이 닿는다. 무슬림 선교는 더 이상 해외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학생, 이주노동자, 난민, 국제결혼 가정을 통해 지역교회는 이미 일상에서 무슬림을 만나고 있다. 공장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 아이 학교의 학부모, 편의점에서 일하는 청년, 원룸 건물의 이웃이 그렇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이제는 선교지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목회에 남기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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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술대회가 목회에 남기는 울림은 분명하다. 타종교와의 만남은 두려워할 거리도 아니고, 섞여 들어갈 기회도 아니다. 교회가 자신이 믿는 복음을 얼마나 선명하게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얼마나 겸손하게 대하는지가 드러나는 자리다.

루터가 위기 앞에서 교회 내부부터 돌이켰듯, 다문화 시대의 한국교회도 선교 기술을 찾기 전에 회개와 복음의 중심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그리스도'가 흐려지면 어떤 전도 기법도 길을 잃는다.

반대로 복음은 선명한데 이웃을 향한 태도가 차갑다면, 그 선명함은 이웃에게 닿지 않는다. 루터 자신도 말년에는 유대인과 무슬림을 향해 거칠고 적대적인 언어를 쏟아 냈고, 그 말은 이후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개혁자의 통찰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그의 약점까지 반복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차이를 숨기지 않으면서 사람을 존중하는 증언이야말로 오늘 강단과 교구가 함께 붙들어야 할 선교의 자세다.

두려움도 흐림도 아닌 길

분당과 성남 일대만 봐도 외국인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은 이미 일상이다. 그렇다면 설교와 성경공부, 구역 모임에서 복음의 독특성과 이웃 사랑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공포를 부추기는 쪽도, 차이를 흐리는 쪽도 피해야 한다. 이슬람을 '다가오는 위협'으로만 말하면 성도들은 이웃을 경계하는 법만 배운다. 반대로 "결국 다 같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설 자리가 사라진다.

성경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레 19:34).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분명히 하되 사람을 존중하는 언어를 익히게 하는 것. 그것이 지역교회의 선교 교육이 되어야 한다. 바울의 권면처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구역 모임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

거창한 선교 훈련이 아니어도 된다. 작게 시작할 수 있다.

구역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이웃 가운데 무슬림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만난 경험을 나누어 보자. 그때 무엇이 두려웠고 무엇이 궁금했는지 정직하게 말해 보는 것이다. 성경공부 시간에는 꾸란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과 복음서가 말하는 것을 나란히 놓고, 무엇이 같고 무엇이 결정적으로 다른지 차분히 살펴볼 수 있다.

외국인 이웃을 위한 한국어 교실이나 명절 식사 자리를 연다면, 그 자리를 전도의 '기회'로만 계산하지 말자. 먼저 이웃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가 오면, 그 관계 안에서 정직하고 온유하게 전하면 된다.


거울 앞에 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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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위협 앞에서 교회가 가장 먼저 돌아볼 곳은 바깥이 아니라 안이다. 루터는 500년 전 그것을 보았다.

두려움은 쉽게 적을 만든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우리 자신을 심판대 앞에 세우고, 그다음에 이웃 앞으로 보낸다. 회개한 교회만이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이 선명한 교회만이 이웃과 섞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 훈련을 위한 역사적·신학적 밑그림을 다시 그려 주었다. 이제 그 밑그림 위에 색을 입히는 일은 우리 교회의 강단과 구역, 그리고 이웃과 마주 앉는 식탁의 몫이다.


출처: 기독일보 2026.9.20 「루터의 이슬람 이해부터 전도 방법까지… 이슬람 선교 방향 모색」 / 마르틴 루터, 『튀르크인과의 전쟁에 관하여』(1529), 『튀르크에 맞서 기도하라는 권고』(1541), 『꾸란 반박』(1542) / 비블리안더 편 라틴어 꾸란(바젤, 1543)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7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