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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명령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 예레미야 24장 묵상

마음은 명령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 예레미야 24장 묵상 본문 이미지

사람을 바꾸려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은 대개 바른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잘못된 태도를 짚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공동체에는 규칙을 세우고, 개인에게는 결심을 권한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옳은 명령이 언제나 새 마음을 낳지는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도 같지 않다. 부모라면 안다. "몇 번을 말했니"라는 말이 늘어날수록 아이는 더 잘 듣는 게 아니라 더 잘 흘려듣게 된다는 것을.

예레미야 24장은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보여 주며 바로 이 틈을 정면으로 다룬다.


성전 앞의 두 광주리

때는 주전 597년 무렵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고냐와 고관들, 그리고 목공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어간 직후였다(렘 24:1). 나라의 지도층과 기술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예루살렘에는 새로 세워진 왕 시드기야와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 주신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었다. 초여름에 가장 먼저 맺히는 첫 무화과는 귀하게 여겨지는 열매였다.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24:2).

하나님의 풀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었다.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24:5). 나쁜 무화과는 시드기야와 고관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사람들이었다(24:8).

남은 자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이 반전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같은 시기 에스겔서에서 보인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겔 11:15).

땅에 남았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끌려갔다는 사실은 버림받았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는 형편만 놓고 보면 그렇게 읽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정은 반대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이 있다. 본문은 그 차이를 포로 공동체의 도덕적 우월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끌려간 이들이 더 경건했다거나 더 잘 회개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공로는 판정의 근거로 나오지 않는다. 중심에 놓인 것은 사람이 스스로 더 나은 마음을 만들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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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요구가 곧 바뀐 마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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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분명한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정의를 행하라, 이웃을 돌보라,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은 흐리게 만들 수 없는 기준이다. 기준이 사라지면 회개할 방향도 사라진다.

예레미야는 누구보다 그 기준을 크게 외친 선지자였다. 그는 스무 해가 넘도록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돌이키라, 악한 길에서 떠나라. 그런데 그 긴 세월 동안 백성은 돌이키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이렇게 탄식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문제는 기준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기준을 말하는 것만으로 변화가 완성된다고 믿는 데 있었다. 같은 권면을 더 큰 목소리로 되풀이한다고 굳은 마음이 저절로 부드러워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일상에서 자주 겪는다.

화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한 상황이 오면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비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누군가의 성취 소식 앞에서 마음은 또 흔들린다. 바울도 이 싸움을 숨기지 않았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원칙을 문서로 만들고 교육을 거듭하지만, 책임을 피하고 싶은 욕망까지 규정집으로 없애지는 못한다. 모르는 게 문제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약한 경우가 더 어렵다.

그러니 변화가 더딜 때 곧바로 설명의 양만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몰라서 못 하는지, 알지만 두려워서 피하는지, 오래된 욕망이 판단을 끌고 가는지 살펴야 한다.

자신을 대할 때도 같다. 결심이 약했다고 자책하며 더 강한 결심을 세우기 전에,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마음을 건너뛴 훈련은 겉모양을 잠깐 정돈할 수는 있어도 방향을 오래 붙들지는 못한다.

같은 권면을 더 크게 외친다고
굳은 마음이 저절로 부드러워지지는 않는다.


보이는 자리와 하나님의 판정은 다를 수 있다

두 광주리가 준 충격은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해석을 뒤집는 데 있다. 하나님은 끌려간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24:6).

세우고 헐지 않겠다, 심고 뽑지 않겠다. 예레미야를 처음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뽑힌 것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세우고 심는 일을 시작하고 계셨다.

다만 이 반전을 고난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된다. 고난받는 사람이 저절로 더 의롭다는 뜻도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 본문은 끌려간 이들의 공로를 판정의 근거로 내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그들에게 향했을 뿐이다.

형편을 영적 성적표로 바꾸는 습관

여기서 우리는 형편을 너무 빨리 영적 성적표로 바꾸는 습관을 경계하게 된다.

일이 잘 풀리면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라 단정한다. 길이 막히면 믿음이 부족했다고 판단한다. 반대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고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분류표를 거절했다. 욥의 친구들도 긴 논리로 욥의 고난에 원인을 붙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옳게 말하지 못했다고 하셨다(욥 42:7).

좋은 자리와 나쁜 자리라는 우리의 분류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정확히 보여 주지는 않는다. 장소나 형편은 해석해야 할 현실이지, 사람의 가치를 확정하는 판결문이 아니다.

교회 안의 광주리

이 관점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바꾼다. 실패한 사람에게 함부로 원인을 붙이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을 결과만 보고 높이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눈에 띄는 역할과 중심에서 멀어진 시간을 신앙의 등급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직분을 맡아 온 사람이 좋은 광주리이고, 몇 해 교회를 떠나 있다 돌아온 사람이 나쁜 광주리인 것이 아니다. 병상에 누워 예배당에 오지 못하는 성도가 뒤처진 사람인 것도 아니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질문은, 그 자리에서 누구의 말씀을 듣고 어느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느냐다. 보이는 위치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향이 사람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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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선물이다

예레미야 24장의 가장 깊은 약속은 귀환이나 생활의 안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

이 문장의 순서를 천천히 읽어 보자. 먼저 하나님이 마음을 주신다. 그다음에 그들이 돌아온다. 사람이 먼저 마음을 고쳐 자격을 증명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이 그 관계를 알아보고 기뻐할 마음까지 주신다. 요구하신 것을 밖에서 지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요구를 따를 수 있도록 안에서부터 새롭게 하신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함께 본 약속

이 약속은 예레미야서 안에서 점점 더 자란다. 31장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돌판에 새긴 법이 이제 마음에 새겨진다.

같은 시대,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있던 에스겔도 같은 약속을 들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앞에서 본,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들을 업신여겼던 그 11장에서도 하나님은 곧바로 이어 말씀하신다. 흩어진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겠다고(겔 11:19).

두 선지자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명령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새로 주셔야 한다.

이 약속은 신앙을 의지력 경쟁으로 만들지 않는다.

누가 더 강하게 결심했고 더 오래 버텼는지를 겨루기 시작하면, 잘하는 사람은 교만해지고 넘어지는 사람은 숨게 된다. 교회가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이 여기 있다. 새벽기도를 몇 년 빠지지 않았다는 사람과, 이번 주도 결국 못 일어났다는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다.

반면 마음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감사와 간구가 함께 살아난다. 변화가 보일 때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다. 변화가 더딜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 대신, 나를 새롭게 하시는 분께 도움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소원을 두시는 분도,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그렇다고 은혜가 책임을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앞 절인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선물로 받은 마음은 실제로 돌아서는 삶을 낳는다. 용서를 구해야 할 때 구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택한다. 되풀이되는 습관을 끊기 위해 구체적인 도움을 받는다. 다만 그 행동은 사랑받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먼저 받은 돌보심에 대한 응답이다.

은혜는 순종의 반대말이 아니다. 순종이 자라고, 넘어진 뒤에 다시 시작될 수 있는 흙이다.

그러면 기도의 내용도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 상황을 통과할 마음을 달라는 기도는 뒤로 미룬다. 그러나 문제가 사라지기만 바라면,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같은 욕망이 다른 모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의 유익을 기뻐하는 마음을 구하면 기도가 변화의 중심을 향한다. 다윗의 기도가 그랬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여기서 '창조하다'로 옮긴 말은 구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쓰는 동사로, 창세기 1장 1절의 그 단어다. 새 마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지어 주시는 것이다.

환경의 회복보다 마음의 회복이 더 깊은 약속임을 배운다.

새 마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 지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고 변화를 돕는 법

마음은 명령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 예레미야 24장 묵상 본문 이미지

이 진리는 목회와 공동체를 돌보는 방식에도 분명한 태도를 요구한다. 네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기준은 구체적으로 말하되 사람을 기준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잘못한 행동은 분명히 다루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잘못을 흐리는 관용은 회복을 돕지 못한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를 신분처럼 붙이는 엄격함도 마음을 닫게 한다. 진실과 소망을 함께 말할 때 권면은 정죄가 아니라 돌아올 길이 된다.

둘째, 결심을 받아 내는 것보다 변화가 가능한 조건을 마련한다. 반복되는 실수에는 반복을 줄일 구조가 필요하다. 책임의 범위를 분명히 하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는 함께 걸을 사람을 세우며, 점검할 때를 정한다. 비밀을 강요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통로도 열어 둔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공동체에는 그 변화가 숨 쉬고 자랄 자리를 성실히 돌볼 책임이 있다. 새싹을 억지로 잡아당기면 뽑힐 뿐이지만, 곁에 지지대를 세우고 물을 주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다.

셋째, 빠른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실한 회개는 열매를 맺지만, 열매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감동적인 말을 했는지보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지, 변명 대신 책임을 받아들이는지, 넘어졌을 때 다시 도움을 청하는지를 오래 지켜봐야 한다. 성급한 낙관은 위험을 놓치고, 성급한 비관은 시작된 변화를 꺾는다. 기다림은 판단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열매를 정직하게 확인할 시간을 주는 일이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칠십 년이 차면"이라고 하셨다(렘 29:10). 약속은 확실했지만, 서두르지 않으셨다.

넷째, 지도하는 사람도 자신이 마음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한다. 설교자와 교사와 책임자는 말씀을 풀어 주고, 경계를 세우고,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관계를 볼모로 잡아 속마음의 복종까지 만들어 내려 하면, 권위는 쉽게 통제가 된다.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내 말솜씨에 달렸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더 분명히 말하면서도 덜 거칠게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롬 2:4)이라는 말씀처럼,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결국 인자하심이다.


맺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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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명령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 말은 명령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명령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이가 사람 안에 있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옳은 길을 배워야 하고, 잘못에서 돌아서야 한다. 동시에 그 길을 사랑할 마음, 하나님을 알아볼 마음, 넘어진 뒤에도 다시 응답할 마음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두 광주리의 환상은 눈앞의 형편과 사람의 성취를 넘어, 먼저 돌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보게 한다. 그분은 뽑힌 듯한 자리에서도 세우고 심는 일을 시작하신다. 요구하신 마음을 친히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니 변화 앞에서 자랑할 이유도, 변화가 더디다고 절망할 이유도 줄어든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억지로 꾸며 내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말씀 앞에 서서 새롭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받은 은혜에 걸맞은 작은 순종 하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 제 마음을 고쳐 달라고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아는 마음을 새로 주옵소서.
그 마음으로 오늘 한 걸음 돌아서게 하옵소서.

이 글은 손하람 목사의 창가에 2026. 9. 28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